[불면석 그늘 아래 ]
풍경소리를 좋아했던 청년의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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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스님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5 10:01 / 조회1,159회 / 댓글0건본문
소납의 고향은 경북 구미시입니다. 2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둘째 형이 일찍 요절한 후에 자식들이 태어나지 않자 3대 독자 집안이 될까 싶어 30대 초반부터 부모님들은 한 달에 한 번씩 977m나 되는 금오산 약사암에 생남生男 기도를 다니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32세, 아버지가 42세 때 소납이 태어난 후 몇 년 후에 동생이 태어나서 3대 독자 집안이 되는 일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금오산 약사암, 다섯 살 조막손의 합장
태어나서 처음으로 5살 때 아버지를 따라 절에 갔는데, 그곳이 금오산 약사암이었습니다. 그때는 70년 전이라 차도 없고 순전히 도보로 갔는데, 아침 10시경에 출발해서 오후 4~5시경에 도착하였는데 별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기암괴석에 우뚝 솟은 한 채의 작은 암자인데, 제가 사는 마을과 낙동강이 보이고 신선이 사는 것 같았고 처음 보는 절인데도 마치 우리집같이 너무 좋았습니다.
저녁예불을 할 때 조막손을 모아 처음으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난 후 곧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양주도 없고 노스님이 직접 불을 지펴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셨습니다. 흰쌀밥에 우거지 된장국, 고춧가루가 별로 들어가지 않은 멀건 김치와 콩자반이 전부였는데 완전히 꿀맛이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5살 꼬마가 약사암까지 와서 기특하다며 밥을 먹고 있는데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구운 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약사암에 기도해서 얻은 셋째 아들이니까 아버지께서 부처님께 신고식을 하신 듯합니다. 5살 때의 금오산 약사암을 참배한 기억은 강력한 인상으로 남아 출가한 첫 번째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고향집은 138평이나 되는 넓은 남향집으로 방을 나와 마루에 서면 구미 시내에 빌딩이 서기 전인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금오산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3~4살 때 기억은 어리니까 항상 동생과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는데, 낮이 오고 밤이 오며 시간이 흐르고 참 안온했지만 그때 두려움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다른 애들의 부모님보다 늙어 보여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우리 형제는 어쩌지? 하는 것이 유일한 두려움이었고, 나중에 출가의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흥회보다 풍경소리가 좋았던 학창시절
집안이 넓어서 방이 많았는데 심부름 나온 동자승부터 노스님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님들의 왕래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약사암에 사시는 스님들은 출타했다가 밤열차로 구미역에 도착하면 우리집에서 쉬시고 다음 날 가셨습니다. 그런 날에는 술과 담배를 전혀 안 하시던 아버지는 스님들께 법문을 청하여 듣는 것을 즐겨하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등학교 1학년까지 우리집의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전생부터 인연이 많아서 그런지 절에만 가면 풍경소리, 염불하는 소리를 들으면 의미는 몰라도 마음이 편해지고 절밥이 항상 꿀맛이었습니다. 스님들 방에 들어가 보면 가사와 장삼이 걸려 있고 경전이나 염불 책을 올려두는 경상과 좌복, 이불만 덩그러니 있는 아무 장식이 없는 승방이 그렇게 좋아 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세계명작소설, 세계위인전을 즐겨 읽었고, 고등학교 때는 인생에 교훈이 되는 책을 읽고 싶어서 번역본으로 된 『사서삼경四書三經』,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의 난해한 책도 읽었는데, 그때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인도 브라흐만교의 베다성전과 불교철학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정신문명의 최고봉은 인도 고대의 종교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불교책은 번역본이 별로 없어서 읽지를 못했습니다.
우리집의 큰형님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직업군인이었기 때문에 같이 살지 않았고, 형님 부부는 기독교로 형수가 전도사였습니다. 시동생이 종교 성향이 많은 것을 알고 고등학교 다닐 때 신학대학교에 보내려고 형수가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형수의 성화에 못 이겨 심령부흥회에 두 번 참석했는데, 부흥회의 분위기가 고조되니 사람들이 울고불고 방언을 하고 뛰고 하는 등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5살 꼬마 때부터 사찰의 풍경소리, 목탁소리, 조용한 분위기에 물들은 소납에게는 거부 반응이 와서 형수한테 앞으로는 부흥회에 다시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것과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성경책을 구해주면 읽겠다고 하자 성경책을 선물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7년에 걸쳐 구약과 신약을 전부 읽었습니다. 큰형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형수는 살아계시는데, 시동생을 신부로 못 만든 것에 대하여 아직도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나 절은 좋아했지만 출가를 하려고 생각은 안 하고 재가불자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역의무를 마친 후 사회로 진출하자 뜻이 맞는 친구들과 생활력을 기른다고 공사판에 가서 막노동도 4개월간 해 보고, 5일장을 다니며 행상도 8개월간 해 보고, 그 이후는 주로 회사에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 건강과 정신수련을 위해 태권도 도장에 다녔는데 사회에 진출하여서는 합기도 도장에 몇 년간 다닐 때 동네에 있는 금강사 절에 사는 젊은 스님들이 두 분 나왔는데 아주 운동을 잘했고 비슷한 또래라 금방 친해져서 서로 왕래도 하고,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셨습니다. 이때 스님들로부터 좌선의 기본자세인 수식관을 배워서 시간이 날 땐 10~30분씩 수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서나 일의 삼매보단 다른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감동적인 도인스님들의 수행담과 출가 인연
금강사 스님들로부터 청담스님 법문집인 『자비무적慈悲無敵』, 『불교학개론』, 『아함경이야기』, 『불광』 잡지, 『선으로 가는 길』, 『불교성전』 등을 선물 받아서 읽어 봤는데, 그중에 『반야심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을 보니 물리와 화학을 공부할 때 배우는 질량불변의 법칙, 에너지보존의 법칙과 서양 철학자들이 존재와 인식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고차원적인 철학에 대해서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이미 법문을 해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스님들로부터 진묵대사, 경허, 용성, 효봉, 청담, 성철, 향곡, 경봉, 구산, 송담스님 등 도인스님들의 초인적인 수행담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시간이 날 때 서울의 도선사에 출가한 고향 선배스님을 만나러 가서 석불전에서 3천배도 해 보고, 도리사, 직지사, 파계사, 은해사, 범어사와 통도사도 참배하고 경봉스님 법문하시는 것도 듣고, 해인사도 참배하며 사찰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좋아하던 아버지와 이모님의 타계, 고등학교 때 나에게 운동을 해서 체력을 단련할 것과 어렵지만 차원을 높여 철학책을 읽을 것을 권유하여 독서의 패턴을 바꾸어 주었던 나의 멘토였던 충청도 홍성 출신의 절친했던 친구 최명세의 연탄가스 사고사, 이어서 고향친구 두 명이 사고사로 일찍 요절했던 사건들을 접하면서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납은 안타깝고 허무한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백년도 못 사는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그럴 때 그나마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것이 불경 책을 읽는 것과 도인스님들의 법문이었습니다.
속가집은 동네에선 부유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친구들도 많았으며 사귀던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불교를 접한 이후로는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30세가 되기 전에 출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습니다. 그때는 적령기라 가족들과 주위의 성화로 선도 두 번 봤는데 여자 쪽에선 좋다 했지만 거절하고 스물여덟이 되던 하반기에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범어사 청련암으로 출가를 하였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 부산으로 출장을 가면 시간을 내어 범어사를 참배했는데 금강암과 청련암에 자주 갔었습니다. 50년이 가까운 일이지만 금강암에는 지금 범어사 방장이신 정여스님이 계셨고, 청련암에는 양익스님이 계셨습니다. 두 분스님께선 인생 상담도 잘해 주시고 참 인자하셨으며, 밤이 늦어지면 꼭 쉬고 가도록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청련암에서 수련하다 해인사로 출가
양익스님께선 선禪과 무술武術이 결합된 금강령관金剛靈觀이라는 독특한 수행법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셨는데, 무술을 좋아하는 젊은 스님들과 청년들이 많이 왕래하였습니다. 양익스님께선 그때 아주 가난하게 사셨으며 상좌도 두지 않으시고 공양주도 없고 수련하러 온 스님들과 청년들이 교대로 공양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출가가 아닌 수련하려 온 젊은 청년들이 머리를 기른 채 몇 개월씩 행자생활을 하고 돌아가곤 했는데, 저도 양익스님께 완전한 발심을 하여 스님이 되고 싶을 때 삭발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승낙을 해주셔서 머리를 기른 채 몇 달간 행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 소납은 공양주와 채공, 갱두 3가지 임무를 맡아서 열심히 하였으며, 아침예불과 저녁예불에 참여하고, 주말에 청년들이 오면 청련암에 사는 스님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양익스님의 지도하에 금강령관 수련을 하였는데 일종의 선무도禪武道였습니다. 스님께서는 하심下心과 인내忍耐, 겸손謙遜과 극기克己를 강조하시고 수행을 하는 데 보조수단으로 생각하고 참선을 강조하셨습니다. 스님께서도 초저녁에 일찍 주무시고 새벽의 공부가 중요하시다며 새벽 정진을 빠지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 살 때 많은 스님들이 왕래하였는데 해인사 출신의 스님들이 오시면 품위가 있고 법도가 있어 아주 돋보였습니다. 이때 해인사 출신의 도봉스님이 오셨는데 토굴에서 고행정진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서 건강을 회복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법당에서 의식을 담당하는 노전盧殿을 맏으셨고 아주 심성이 착하신 좋은 스님이었습니다. 소납하고는 금방 친해졌는데, 출가를 위해 행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범어사도 좋지만 마을과 너무 가깝고 해인사에 가면 금생에 만나기 힘든 이판사판의 걸출한 스님들이 계시는데 성철, 자운, 혜암, 일타, 영암스님이라고 하며 그곳에 가서 경전을 배우는 승가대학을 마치고 선원에서 참선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며칠간 고심하다가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서 청련암의 행자생활을 정리하고 야반도주를 하여 해인사의 큰절로 갔습니다. 나중에 사미계를 받고 범어사에 가서 양익스님과 정여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아주 반가워하시고 중노릇 잘하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해인사 행자 신고식
그때 해인사 주지는 현경스님이었고 행자실로 안내하는데 행자들이 20명이 넘었습니다. 궁현당의 행자실에 행자들이 너무 많아서 원주실과 회계 재무스님이 사용하는 끝방에 빈방이 있어서 제2의 행자실로 쓰는데 ‘하심下心’이라고 쓰인 액자 앞으로 행자반장이 안내하면서 행자실 규칙이라며 하루종일 묵언默言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 12시간 꿇어앉아 있으라고 해서 그대로 하였습니다. 다음날 독성각獨聖閣에 가서 3000배를 하라고 해서 아침 8시에 가서 시작하니 밤 8시에 끝이 나서 12시간이 걸렸습니다. 선배 행자가 작은 주전자에 따뜻한 구기자차를 갖다 주어서 마셨습니다. 3000배는 속인 때 서울 도선사에서 해 본 이후로 두 번째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부터 공양간에 가서 공양주 갱두 찌게 간상 보조를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원주스님이 속복을 벗기고 삭발을 시키라고 명령을 내려서 해인사에 입산한 지 일주일 만에 머리를 깎고 행자복을 입었습니다. 다음날 행자실에서 새로 온 행자인 나를 포함해 2명이 입방식을 하는데 저녁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신고식을 했습니다. 신 행자, 김 행자 둘이서 해인사 행자실에 입방을 허락받기 위해 선배 행자님들께 신고식을 합니다라고 큰소리로 복창한 후 행자실 문을 여니 20명이 넘는 행자들이 좌우로 좌정해 앉았는데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입구에서 완전 90도로 합장하여 반절을 한 후 행자반장 앞까지 가서 삼배를 올리는데 군대에 가면 위장침투할 때 하는 정숙보행으로 걸어야 했습니다. 20명의 행자들이 “처음부터 다시!” 하면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신고식을 하는 2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한 후 신고식을 마치니 옷이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내 평생에 그렇게 혹독한 신고식은 처음 경험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국을 끓이는 갱두羹頭 소임을, 그 후 찌개를 끓이는 찌개장, 대중스님들이 발우공양을 할 수 있도록 상床을 차리는 간상看床 소임을 본 후 밥을 짓는 공양주 소임을 맡고 싶어 원력을 세웠는데 승가대학의 치문반에서 공부를 하는 스님들이 대중스님들을 위해 복을 지어 보겠다고 계속 자청을 했기 때문에 공양주 보조만 했지 직접 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10분 안에 잠들던 행자생활과 백련암과 인연
행자를 할 때 결제 때는 해인사승가대학과 선원스님이 150명 정도였고, 당시에는 나무로 난방과 취사를 했기 때문에 나무를 하는 부목 처사와 농장관리인, 산감, 매표소 관리인, 야경처사, 반찬을 만드는 채공보살과 종무소에서 소임을 보는 스님들을 합치면 항상 200명이 넘는 대중이 함께 살았습니다.
성철스님이 방장으로 계실 때에 경전과 선어록을 배우는 해인사승가대학은 속가로 말하면 서울대학과 같았습니다. 입방하기가 힘들어서 산내 암자에서 3개월 살고 큰절로 옮겨 총무, 교무, 재무, 종무소, 원주실, 주지실 시자侍者 소임을 거치면 보통 6개월이 걸리는데, 이런 과정을 그쳐도 지객知客 스님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합격해야만 해인사승가대학에 입방할 수 있었습니다. 선원은 선열당과 퇴설당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열당에선 젊은 스님들이 하루에 10시간씩 정진하고 퇴설당에선 구참스님들이 하루에 12시간씩 가행정진을 하였습니다. 선원 역시 수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나 방부를 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제방의 스님들은 해인사에서 한 번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때 행자실의 임무는 20~30명의 행자들이 아침예불 후 하루 3끼 200명이 넘는 사부대중들을 위하여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이고, 봄·여름·가을철엔 채소밭에 가서 국과 찌개를 끓일 채소를 채취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경내에 있는 방앗간에 가서 두부를 만들고, 사시불공 때는 대적광전과 각 단에 공양미를 올렸습니다. 승가대학 스님들과 선원 스님들이 울력을 할 때는 간식으로 국수를 삶아 드렸습니다.
해인사에 살면 일주일에 한 번씩 스님, 행자를 가릴 것 없이 경내에 있는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해야 했는데, 이유는 가야산에 불이 나면 해인사 스님들이 달려가서 불을 꺼야 하는데 주력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영암스님이 주지를 하실 때 축구장을 만드신 겁니다. 행자실에선 일주일에 한 번씩 승가대학에서 스님들이 오셔서 염불과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침 3시에 기상하면 밤 9시에 취침할 때까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울력과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밤 9시에 삼경이 되어 자리에 누우면 10분 안에 금방 잠이 들었습니다. 속가에 있을 때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해보고 병역의무를 마친다고 군대 훈련소에서 훈련도 받아 봤지만 해인사 행자실 같이 불알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일을 많이 한 것은 평생 처음이었습니다.
소납이 행자생활을 할 때는 입산하러 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6개월째 접어들 때까지 며칠에서 몇달 간 행자생활을 하다가 못 견디고 하산下山하는 사람들을 세어보니 68명이나 되었습니다. 6개월째 고참행자로서 행자반장이 되는데 해인사 주지와 합천군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행자반장이 되면 행자들을 통솔하여 소임별로 지시만 하면 실제적인 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행자반장을 하면서 7개월째 접어들었을 때 백련암 출신인 원명스님이 선원을 다니다가 병역의무를 받아야 할 연령이 되어 해인사 큰절에 내려와서 낮에는 회계 소임을 보고 밤으로는 이틀에 한 번씩 해인사 초소에 가서 보초를 서는 방위병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소납을 불러서 찾아뵈니 “신 행자, 성철스님이 계시는 백련암에 올라가서 행자생활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백련암에는 올라가고 싶다고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인데 마침 군대 가는 스님이 있어서 자리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행자반장이 되니 별로 내키지 않아서 답변을 하지 않고 3일째가 되니 원명스님이 재차 물으셨습니다. 그때 큰절에 살면서 백련암에는 호랑이 스님이 계셔서 보통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는 소리를 익히 들었던 터라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가 원명스님의 거듭되는 권유에 미안해서 결국 백련암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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