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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선악의 양변을 버리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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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3 년 11 월 [통권 제127호]  /     /  작성일23-11-04 22:06  /   조회3,18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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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안거증(1936년 범어사)

 


자성청정심이 곧 보시바라밀  

 

“이 돈오의 문은 어디로부터 들어갑니까?”

“단바라밀檀波羅蜜로부터 들어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행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까닭으로 단바라밀 하나만을 말씀하시며, 어떻게 구족하여야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미혹한 사람은 다섯 바라밀이 모두 단바라밀에서 말미암은 줄 알지 못함이니 오직 단바라밀을 수행하면 곧 육바라밀은 모두 구족한 것이니라.”

“어떤 인연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단檀이란 보시布施를 말하느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布施却二性]이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선善과 악惡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며, 있음[有]과 없음[無]의 성품, 사랑함[愛]과 미워함[憎]의 성품, 공空과 공 아님[不空]의 성품, 정定과 정 아님[不定]의 성품, 깨끗함[淨]과 깨끗하지 않음[不淨]의 성품을 버려서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느니라.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을 때에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생각을 짓지 않으며, 또 보시한다는 생각도 짓지 않음이 곧 진실로 보시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고 하느니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 함은 곧 일체법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니, 법의 성품이 공하다 함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니라.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한 모양[一相]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곧 진여의 실상이니, 진여의 실상이란 여래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금강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모든 부처님이라 한다[離一切諸相 則名諸佛]’고 하였느니라.” - 『돈오입도요문론』

 

사진 1. 해인총림 초대 방장에 추대되었던 196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백일법문을 설하고 계신 성철 종정예하.

 

일체를 모두 보시한다는 것은 일체의 변견을 버려서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안다는 것이니 곧 ‘중도를 정등각’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결국 자성청정이 보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시하니 일체가 다 떨어져서 만 가지 인연이 끊어지고 일체가 서려야 설 수 없어서 적나라赤裸裸 적쇄쇄赤灑灑(주1)한 자성청정심 진여뿐입니다. 여기에 일체 만법이 모두 건립되어서 항사묘용이 원만구족합니다. 그래서 진공眞空 편에서 볼 때는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짐이며 묘유妙有 편에서 볼 때는 묘용이 함께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 말씀에 일체의 모든 모양을 떠난다 함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모든 부처님이라 함은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법에 대해 희론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

 

“부처님은 육바라밀을 말씀하셨는데 지금 어떻게 하나를 말하여 능히 구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라건대 하나가 여섯 가지 법을 구족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사익경思益經』에 이르기를, ‘망명존이 범천에게 말하되 만약 보살이 일체의 번뇌를 버리면 단바라밀이라고 하니 곧 보시요, 모든 법에 대해서 일어나는 바가 없음이 시라바라밀이라고 하니 곧 지계요, 모든 법에 대하여 손상하는 바가 없음이 찬제바라밀이니 곧 인욕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모양을 떠남이 비리야바라밀이라고 하니 곧 정진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머무는 바가 없음이 선바라밀이니 곧 선정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희론戱論이 없음이 반야바라밀이니 곧 지혜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여섯 가지 법이라 한다’ 하였느니라.

지금 다시 여섯 가지 법에 이름을 붙이면 첫째는 버림과 둘째는 일어나지 않음과 셋째는 손상하지 않음과 넷째는 모양을 떠남과 다섯째는 머물지 않음과 여섯째는 희론이 없음과 다르

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법은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이름을 세움이요,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느니라. 다만 하나를 버릴 줄 알면 곧 일체를 버림이요, 하나가 일어나지 않으면 일체가 일어나지 않거늘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차이가 있다고 모두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여섯 가지 법의 숫자에 머물러서 오래도록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니라.

너희들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다만 보시의 법만을 닦으면 만법이 두루 원만해지거늘 하물며 다섯 가지 법이 어찌 구족하지 않겠는가’라고.” - 『돈오입도요문론』

 

사진 2. 성철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 강설』(장경각, 2015).

 

유有와 무無, 선善과 악惡, 고苦와 낙樂 등 일체 변견을 모두 버릴 것 같으면 일체 번뇌를 모두 버린 것이니 이것이 단바라밀 즉 보시입니다. 일체를 보시하면 일체 만법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일체처에 무심·무념이 되나니 이것을 계행이 청정하다고 합니다. ‘중도를 정등각’해서 자성청정심을 완전히 깨치기 전에는 참된 지계가 아니며 모두가 파계破戒입니다. 살생을 한다는 것도 짐승이나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8아뢰야식의 미세망념의 업장이 홀연히 일어날 때 벌써 일체 계행을 부수는 것이니 이것이 근본 파계입니다.

 

그러므로 지계라고 하는 것은 근본 무명 업상이 완전히 끊어져서 자성청정심을 증할 때, 즉 일체 번뇌를 모두 보시하여 ‘중도를 정등각’할 때 비로소 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체 만법에 손상이 있을 수가 없고 전체가 진여대용이 되어 모든 것에 증감이 없고 손익이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 합니다. 

 

사진 3. 성철 종정 예하의 다비식 장면을 그린 김호석 화백의 그림 ‘그 날의 화엄’.

 

 

일체를 보시하면 일체 만상을 떠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정진이라 하며, 일체를 보시하면 양변을 버려서 상대가 없으니 머물려야 머물 곳이 없음을 선정이라 하며, 일체를 보시하면 무명이 근원적으로 모두 끊어지고 모든 희론이 함께 떨어져서 구경각을 성취하는 때이니 지혜가 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가지 법인데 모두가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 하면 양변을 버려서 자성청정심을 깨친 것, 즉 ‘중도를 정등각’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도를 정등각’함을 내놓고는 육바라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법이 여섯 가지 법이요 여섯 가지 법이 한 가지 법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섯 가지 법 모두가 각각 중도에 서 있기 때문에 서로서로 융통무애하며, 여섯 가지 법 모두가 중도 정각을 내용으로 한 진여대용이어서 전체가 모두 통해 있고 각각 따로 법이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시라고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를 말함인데 양변을 여읜 중도라는 것은 일체 만법이 모두 원만구족하여 있으므로 다시 여섯 가지 법이니 몇 가지 법이니 하고 구별하여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참으로 이 돈오문을 성취하려면 일체를 보시하여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범부 중생은 모두 변견에 묶여 머물러 있으므로 이 중도행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방법으로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오매일여의 경지에서도 화두를 버리지 않고 확철히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확철히 깨치면 실제로 모든 것을 보시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일체 망념과 일체 사견을 모두 보시하여 양변을 여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중도를 깨쳐서 일체가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말로만 따라가지 말고 부지런히 화두공부를 해서 바로 깨쳐야 합니다. 

 

밥 얘기를 천날만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철스님의 책, 『돈오입도요문론 강설』(장경각, 2015)에서 발췌

 

<각주>

(주1) 『벽암록』 제95칙에는 ‘정나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라는 구절로 등장한다. 알맹이를 벗긴 열매처럼 정갈하고, 물로 씻어낸 듯 깨끗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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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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