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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큰 도둑놈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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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5 년 10 월 [통권 제30호]  /     /  작성일20-08-19 10:32  /   조회7,16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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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대 불문과 장성욱(同光) 교수

 

 

 


 

조심스러웠다. 언젠가는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체적 계획을 잡으려고 할 때쯤 교수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49재가 끝나고 나서야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교수님은 담담했다.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우물쭈물한 질문과 달리 교수님은 흔쾌히 답했다. “하안거 해제 아비라기도에 당연히 참석합니다. 제가 뭐 드릴 말씀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터뷰도 좋습니다.” 

 

교수님의 시원한 답변에 백련암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반도가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었지만 400명이 넘는 대중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고심원(古心院)을 가득 메운 거사님들 사이에서 부산 동의대 불문과의 장성욱(동광・同光) 교수님 역시 흐트러짐 없이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교수님은 제일 먼저 원통전(圓通殿)으로 향했다. 원통전은 교수님이 어린 시절 백련암에 와서 처음으로 삼천배를 한 곳이었다.

 

‘도인’에 대한 기대와 실망

 

“제 고모님은 만오 노스님의 추천으로 큰스님을 뵈었습니다. 고모님이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다 부모님께도 큰스님께 공부할 것을 권하셨어요. 그래서 가족 전체가 큰스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원통전 앞에서 백련암에 처음 왔을 때의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제가 처음으로 큰스님을 친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1년 이었습니다. 그때 백련암은 건물도 2~3채에 불과한 정말 조그만 암자였습니다. 공양도 밥, 된장과 소금에 절인 김치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도인스님을 뵈러 가자고 하셔서 저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도인(道人)이시기 때문에 먼 미래를 내다보시고 제 인생 전체에 대해 술술 말씀해 주실 것이라 굳게 믿고 백련암에 왔습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삼천배 하고 오래이’라고만 하십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시고 절을 하라하시면 그나마 나을 텐데, ‘무작정’ 절만 하라고 하세요. 부모님께 ‘도인이 뭐 저래?’라고 말씀드리니, 부모님도 그냥 웃기만 하셨어요. 그래서 정말 울며 겨자먹기로 눈물, 콧물 흘려 가며 숨을 헐떡거리면서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생각하며 이곳 원통전에서 삼천배를 했습니다. 같이 갔던 제 사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것처럼 절만 하더라고요. 하하.” 

 

어린 교수님에게 백련암과 성철 스님은 “실망 그 자체”였다. 그래도 삼천배는 해냈다. 그 후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5년간 성철 스님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도 같았다.

“제가 아예 어렸으면 큰스님께 사탕이라도 받았을 텐데…. 중2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어정쩡한 나이인 것 같습니다. 하하.” 

 

교수님은 때가 되면 백련암에서 가서 삼천배를 하고 또 때가 되면 집으로 왔다. 절만 하고 놀 곳이 없어 백련암 곳곳을 훑고 다니다 한번은 성철 스님이 씻고 있던 목욕탕 문을 벌컥 연 적도 있었다고 한다. 혼이 날까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성철 스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원택 스님과 함께 백련암 경내를 둘러보고 있는 장성욱 교수님. 

 

시간이 흘러 대학에 갔다. 그것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니 교수님은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대학 입학 후 교수님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번에 백련암에 가면 큰스님께 무슨 말씀이라도 드려야겠다.” 좁은 산길을 거침없이 올라갔다. 성철 스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좌선실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교수님이 말씀을 드리려는 순간 스님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니가 공부하러 대학 갔나? 놀려면 그만 둬라 인마!” 교수님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자칭 ‘엘리트 대학생’은 성철 스님 앞에서 놀고먹기 좋아하는 청춘에 불과했다. 교수님은 늘 그랬던 것처럼 삼천배만 하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그 후 “조금 정신을 차릴 때 쯤”에는 원명 스님(前 연등국제선원 주지)이 교수님에게 출가를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수님은 콧방귀도 안 꿨다.

“원명 스님은 어릴 때부터 알아 좋아해서 자주 뵙고 저희 집에도 오시고 했는데 대학생이던 어느 날 ‘너도 머리 깎아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절에 가면 좋은 대학가고 성공한다고 해서 갔을 뿐 아무 신심도 없을 때여서인지 그렇게 와 닿지가 않았어요. 또 회색빛 옷에 별로 맛도 없는 반찬에 밥을 먹고 재미도 없는 절에 사시는 걸 보며 ‘스님 제가 왜 머리를 깎아요!’ 하고 말아버렸습니다. 하하.” 

 

그러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대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 교수님은 가족들과 같이 백련암에 갔다. 그날따라 성철 스님은 가족들 근황과 안부를 물으며“친절하게” 대해줬다.

 

 


교수님은 대중들과 함께 아비라기도를 이어갔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방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큰스님께서 부르셨어요. 밖으로 나가니 어두컴컴한 밤에 벽 앞에 큰스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손가락을 사용하며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나를 위해 하는 말이 아니고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하루에 300배씩 하거라.’ 그 말씀이 전부였어요. 갑자기 불려 나가서, 컴컴한 어둠 속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큰스님의 행동에 놀라기도 하고 충격도 받아 멍한 상태에서 다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당시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지요. 몇 년을 다녀도 큰스님께서 한마디도 말씀을 안 하셨지만 훤하게 제 속을 다보고 계셨고, 제 미래를 예견하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만사가 형통할 줄 알고 꿈에 젖어있던 저에게 닥칠 고난들을 이겨내라고 300배를 하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큰스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일과도 제대로 안했어요. 한참 지나 생각해보니 정말로 큰스님께서 저를 위해서 일과를 하라고 하신 것인데, 지금도 큰스님께 너무 죄송할 뿐입니다.”

 

기도는 나의 힘

 

하루 뒤, 3박 4일의 아비라기도가 끝났다. 교수님은 도반들과 인사를 나누고 성철 스님 사리탑으로 갔다. 그리고 정성껏 3배를 올렸다. “다음 기도 때 다시 뵙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 다시 교수님을 찾았다. 이번에는 동의대의 연구실이었다. ‘좌식’ 연구실은 편안했다. 백련암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됐다.

교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해온 삼천배를 중심으로 지금도 계속 정진을 하고 있다.

 

 


연구와 강의 중에도 교수님은 시간이 날때마다 인근의 절을 찾아 참배한다. 

 

“큰스님은 도인이면서도 평소에는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평범함과 무미건조함으로 일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은 우주와 합일된 진리의 세계이면서,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고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비범함이었고, 평범한 사람이 따라 하기 힘든 너무나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 평범함이 성철 큰스님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한 달에 한 번 보약 먹는 셈치고 삼천배를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또 ‘무슨 일이든 올바른 해결은 부처님께 맡기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삼천배를 하라’고 하셨어요.” 

 

교수님은 백련암 토요참선회에서 참선을 시작한 후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에게 많은 설법을 들었다. 또 김천 직지사에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는 혜송 스님에게는 위빠사나를 배웠다. 이 인연으로 미얀마에서 각 2달 반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위빠사나를 공부하고 오기도 했다. 

 

“미얀마에서 정진할 때 많이 배웠습니다. 항상 깨어 있고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훈련을 할 수 있었어요. 참선과 위빠사나를 같이 하니까 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에게는 역시 아비라기도가 정진할 힘과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교수님은 2002년부터 아비라기도를 하고 있다. 시간이 될 때마다 백련암과 산청 길상선사에서 열리는 아비라기도에 꾸준하게 동참하고 있다. 교수님은 아비라기도에 대해 “오욕에 찌든 세속인들을 가장 최단기간에 정화시키고 수승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과학적이고 출중한 기도”라고 강조했다. 아비라기도는 108배의 동적인 부드러운 움직임과 장궤합장의 정적인 자세로 인간을 대장간의 쇠 달구듯이 담금질하고, 맑아진 심신에 마장이 끼지 않도록 능엄주로 감싸고, 회향계로 우주법계를 평온하게 만드는 우주의 기도라는 것이 교수님의 주장이다. 

 

교수님은 아비라기도의 ‘효과’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비라기도는 3박 4일 동안 육체의 한계를 넘나들며 하는 수행이라, 하고나면 몸과 마음이 그지없이 가볍고 순수해집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면 몸의 전 기관이 차츰차츰 정지되면서 끔찍하게 아프다고 하는데, 꼭 그때를 대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을 듯이 아파도 깨어있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기도랍니다.

절을 하면 업장이 소멸된다 하는데 삼천배를 마치고 났을 때 그 날아갈 듯이 가볍고 그윽한 기분은 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삼천배나 아비라기도 모두 업장을 소멸시키고 몸과 마음에 청정한 내공을 쌓아 무한하고 신비한 원력을 성취하게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절은 아픈 자에게 명약을 주는 것과 같고 아비라기도는 아픈 자를 수술대 위에 놓고 그 아픈 부위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어요. 아비라기도의 효험이 절보다 더 즉각적이고 강력하다는 뜻이죠. 또 큰스님께서는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 하지 말고 직접 ‘일체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맥락이 다른 문제”

 

교수님은 재가불자로서 수행 정진에도 힘을 쓰고 있지만, 학자의 시선으로 성철 스님 사상을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지금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부산지역의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창립을 주도한 사람도 교수님이었고 각종 학술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학자로 볼 때와 재가불자로 볼 때의 성철 스님은 어떤 수행자인지가 궁금해졌다. 

 

 


교수님이 기도 회향에 앞서 성철 스님 사리탑을 참배하고 있다. 

 

“학자로 볼 때 성철 큰스님의 말씀이나 글에는 학문적인 오류가 없는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원전을 인용 안한 부분도 있는데, 깨달으신 당신의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원전과 다르게 당신 방식으로 설명하신 부분도 있습니다.

재가불자로 볼 때 큰스님은 직접 깨우치신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라 설법을 해도 폭포수처럼 강력하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교수님은 오랫동안 성철 스님을 모신 불자로서 사람들이 성철 스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도 풀고 싶다고 했다. 

 

“큰스님께서 책을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큰스님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책을 읽고 책을 아꼈습니다. 초보단계에서 의문이 날 때는 많은 책을 읽고 나중에 참선을 할 단계에 이르면 알음알이 책에 의지하지 말고 마음공부에만 전념하라는 뜻으로 책을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을 친견하기 전에 삼천배를 하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내공을 기르고 업장을 소멸하라고 시킨 것이지, 결코 큰스님 자신을 우상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아직도 그것을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큰스님 열반송에서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는 부분을 타 종교에서는 불교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 유치한 짓입니다. 이것은 그간 큰스님께서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진리의 자리를 말로 설명하려고 한 당신의 ‘방편’에 대한 발언일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성철 스님께 예를 올리는 교수님. 

 

교수님은 성철 스님 법어집 중 대중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불교의 기본원리나 교리를 비교적 쉽게 정리한『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백일법문』을 꼽았고, 참선의 고차원적 단계를 설명한 책으로 『선문정로』를 추천하기도 했다.

 

장성욱 교수님은 성철 스님에 대해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내면은 안 들여다보고 외부로, 정신보다 물질로 치닫는 세상에서 올바른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깨달음을 이루신 분입니다. 일류대학, 사업성공, 출세 등의 명예를 바라는 작은 도둑놈이 되지 말고, 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와 같이 호흡하겠다는 큰 도둑놈이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교수님은 정년퇴임 이후에는 수행에만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속의 책임과 의무를 정리하고 절과 기도를 하면서 한국의 절, 미얀마의 수행처, 프랑스의 틱냑한 스님 수행센터 등에서 마음공부에 전념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한 것이었다.

“돈점(頓漸) 논쟁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서로 어느 것이 옳은지 논쟁할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에서 말하는 돈오(頓悟)가 완전한 깨달음이라 한다면 더 이상 점수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때의 돈오(頓悟)는 이론적으로만 아는 해오(解悟) 내지는 깨달음의 기본단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돈오점수(頓悟漸修)는 해오 내지 깨달음의 초보단계에서 차츰 점수해야 한다고 지칭하는 것이 됩니다.

 


웃음이 함께 하는 교수님의 수업 시간.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완전한 깨우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깨달았으면 더 닦을 게 없다는 뜻입니다. 단박에 깨칠 능력이 있는 최상근기에게는 돈오돈수이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 일반 중생은 이론적으로만 아는 해오를 하든 깨달음의 단계를 거치든 차츰차츰 점수(漸修)를 해야 합니다. 일반 중생은 돈오점수(頓悟漸修)인 셈입니다. 물론 일반 중생도 오랜 기간의 수행을 통해서 혹은 올바른 화두 참구를 통해 즉각 돈오하고 돈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는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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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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