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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정진과 연구로 만들어가는 ‘성철 키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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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5 년 5 월 [통권 제2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73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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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대 불교학과 권탄준 교수 

 


 

 

경제위기가 몰려왔던 1990년대 말, 국민들의 가슴에 그나마 위안을 주었던 스포츠 선수들이 있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와 프로골프투어 LPGA에서 활약했던 박찬호 선수와 박세리 선수가 그들이다. 우연인지 두 선수는 모두 신심 있는 불자(佛子)이기도 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두 선수를 보고 꿈을 키워 온 ‘꼬마’들이 이제는 제2의 박찬호, 제2의 박세리가 되어 미국과 세계무대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을 ‘박찬호 키즈(Kids)’, ‘박세리 키즈(Kids)’라고 부르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온 세상이 꽃 천지인 4월, 차를 남쪽으로 달렸다. 또 다른 ‘키드(Kid)’를 만나기 위해서다.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금강대학교는 산과 나무와 꽃과 사람이 어우러져 하나의 화엄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나 캠퍼스를 누비고 있는 꽃다운 청춘들의 모습을 보니 무언가 모를 생동감이 느껴진다. 

 

학교에 도착하니 머리가 하얀 노(老) 교수님이 마중을 나왔다. 바로 금강대에서 불교학 연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권탄준 교수님이다. 교수님이 앞서 말한 그 키드다. 누구의 키드일까? 당연히 ‘성철 키드’다.  

 

소문만으로도 성철 키드일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지만 몇 시간 동안 직접 말씀을 들어보니 교수님은 정말 성철 스님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서만 살아온 ‘키드 중의 키드’였다. 

 

불교학의 사회적 회향

 

교수님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인터뷰 시간도 몇 번의 조정 끝에 잡을 수 있었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을 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현재 맡고 있는 소임만 해도 금강대 대학원장, 불교문화연구소장, 불교학과장 등이다.

 


중국 섬서사범대와의 국제학술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교수님 

 

“군대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니는데, 저는 아직도 이등병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하하.”

말씀에서의 고단함과 달리 교수님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금강대 불교학과의 좌장으로서 맡은 일들을 여법하게 마무리하겠다는 다짐이 묻어났다.  

 

교수님은 또 지난해부터 한국불교학회장도 맡고 있다. 한국불교학회는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최대 조직이다.  

 

“불교는 불교인들만의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학도 불교 학자들만의 학문이 아닙니다. 특히나 불교학은 관념적인 철학이 아닙니다. 불교가 철학화 되면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파불교 시대에 명확히 보았습니다. 그 시대 불교지도자와 연구자들은 대중들을 외면한 채 말장난만 해댔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불교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교학을 인간의 삶 속에서 깨달음을 열어가는 학문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권 교수님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과 참여를 강조했다. 한국불교학회 차원에서도 이를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교수님의 이러한 소신의 일환인지 한국불교학회에서는 오는 6월 5일 흥미로운 주제의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퇴옹 성철의 불교전통 계승과 현대 한국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울산대 박태원 교수님의 ‘진리담론으로서의 퇴옹의 돈오돈수론’, 동국대 황순일 교수님의 ‘중도와 한국불교의 근대성’ 등 모두 5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성철 큰스님에 대해서 왜곡된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큰스님의 가르침은 사회와 인간의 삶에 무관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가르침들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지만 정말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큰스님의 그런 가르침들이 과연 얼마나 우리 불교계에 다시 힘이 되고 기여를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정년퇴임을 앞둔 시점이기도 하고 또 학회장으로서도 그렇고 큰스님께 밥값을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큰스님의 면모를 다시 조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권 교수님은 그러면서 성철 스님과의 인연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성철 스님과의 만남은 운명 그 자체였다. 

 

촉망받던 축구 유망주가 불교 꿈나무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유교였지만 사실 어머니께서는 각화사 동암에서의 기도 끝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경상도 사나이’로 컸습니다. 그러다 축구를 시작해 중학교 때는 주장을 맡아 여러 차례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어요. 당시 축구명문 고등학교에서 저를 스카우트했는데 마지막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잘 안됐습니다. 결국 저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고등학교 입시를 치렀습니다. 사촌이 서울 경복고에 다니고 있어서 저도 그 학교에 지원했는데 ‘당연히’ 떨어졌습니다. 수업도 거의 안 듣고 운동만 했으니 붙을 리가 없죠. 하하. 대입도 아닌 고입 재수를 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석남사 법희 스님이 속가 고모할머니인데, 스님께서 성철 큰스님이 김룡사에 계시다며 거기서 할머니 49재를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김룡사에 재를 지내러 가서 큰스님을 친견하게 됐습니다.” 

 


오늘날의 김룡사 전경 

 

김룡사에서 시자스님의 안내로 성철 스님을 만났다. 시자스님이 권 교수님을 소개하자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떨어진 못난 놈이 무슨 49재고? 너는 제사에도 참석하지 말고 앞으로 일주일간 매일 삼천배부터 하라.”고 성철 스님은 불호령을 내렸다.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간의 동구불출(洞口不出)을 하고 오셔서 인지 큰스님께서는 꽤 마르신 몸이었습니다. 눈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 했어요. 큰스님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압도당했지요.” 

 

“큰스님의 말씀”이어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공양 전까지 1000배, 아침을 먹고 점심때까지 1000배, 오후에는 사찰 청소 등의 일을 하고 저녁 공양을 하고 다시 1000배를 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첫날 삼천배를 해보니 도저히 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룡사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교수님은 용기를 내 성철 스님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갔다. 희미한 불빛이 살아 움직였다.  

 


봉화 각화사 행자 시절 대중들과 함께 한 모습. 뒷줄 오른쪽 끝이 교수님이다 

 

“큰스님! ~~~ 큰스님! ~~~ 큰스님! ~~~”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을 뚫어 방안을 보았다. 성철 스님은 미동도 없이 참선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문을 열고 방으로 ‘진격’했다.  

 

“무슨 일이고?” “더 이상 절 못하겠습니다. 이대로 계속하면 저는 죽을 것 같습니다.” “안 죽는다 이놈아! 다 해라.” “못합니다.” “니 얼굴을 보아하니 이대로 집에 가면 얼마 못살고 죽는다. 삼천배 하고 살래? 그냥 가서 죽을래?”  

 

절을 시키기 위한 성철 스님의 방책이었다. 잔뜩 겁을 먹은 교수님은 마지못해 “하겠습니다.”하고 방을 나왔다. 삼천배 마지막 날에는 밤을 세워가며 1만 배의 절을 했다. 김룡사에서 성철 스님이 내준 마지막 숙제였다. 교수님의 머릿속에는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는 생각이 몇 번씩 스쳐갔다. 그래도 교수님은 “죽지 않고” 절을 마쳤다.  

 

그렇게 김룡사에서 일주일 기도를 마치고 나니 마음속에서 공부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솟구쳐 올랐다. 

“기본 지식이 전혀 없었는데도 공부를 시작하니까 책에 있는 내용들이 그냥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한 번 책상에 앉으면 며칠씩 공부를 할 정도의 힘도 생겼습니다. 삼천배를 하면서 엄청난 집중력이 생긴 것 같아요. 코피를 쏟으면서도 공부를 하니까 어머니는 제가 안하던 짓 한다면서도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공부해서 결국 경복고에 합격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김룡사에서 대중들과 함께 한 모습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수업은 재미가 없고 불교에만 관심이 갔다. “불교에 꽂힌” 것이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도 경전(經典)만 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 한문 교육을 받은 터라 수월하게 경전을 볼 수 있었다. 결국 출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학교에 다니다 백련암에 가서 큰스님께 출가하겠다고 말씀드리면 대학 졸업하고 군대 제대하고 오라고만 하셨어요. 결국 큰스님 뜻에 따라 학교를 다니기는 했습니다만 재미가 없었습니다.” 

 

머리도 스님들처럼 삭발을 했다. 결국 고3때는 의무출석일수만 채우고 절로 갔다. 처음에는 괴산에 있는 각연사에서 생활을 하다 집근처인 봉화 각화사로 옮겼다. 여기서 1년 6개월간 행자생활을 했다. 그리고 선방 수좌 휴암 스님을 만났다. 

 

“큰스님께서 정해 주신 학문의 길”

 

휴암 스님은 박학다식했다. 정진도 열심히 했다. 자연스럽게 휴암 스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스님은 교수님에게 한신대나 동국대에 가서 더 공부를 하라고 조언했다. 

 

“휴암 스님은 제가 어차피 평생 불교 공부를 할 것이니 대학에서는 기독교를 공부하는 것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때 한신대에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이 계시기도 했고요. 고민이 돼 성철 큰스님께 여쭈었더니 ‘우리에게는 평생을 공부해도 다 못 보는 팔만대장경이 있는데 무슨 기독교 공부냐? 동국대 불교학과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1972년도에 늦깎이로 동국대에 갔습니다.

 


교수님이 평생의 연구주제인 화엄경을 살펴보고 있다 

 

동국대에 입학해서는 큰스님께 무슨 공부를 하면 좋을지를 여쭈었어요. 큰스님께서는 ‘교(敎)를 하려면 화엄(華嚴)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평생의 연구 주제가 『화엄경』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화엄경』의 여래출현사상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후에도 ‘해동화엄의 실천적 전개’, ‘『화엄경』 「십회향품」의 삼종회향’, ‘『화엄경』 계율의 현대적 조명’, ‘『화엄경』의 수행도 체계 연구’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지금도 교수님은 『화엄경』 연구에 진력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인 것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를 설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읽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도 군대를 제대하고 한 달간 『화엄경』을 읽었는데 다 보고 나니 힘이 생겼습니다. ‘보현행원품’만 봐도 화엄사상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는 사이 성철 스님을 친견하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사모님을 만나면서 성철 스님과 약속했던 출가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보고 있는 교수님 

 

“결혼을 앞두고 큰스님을 찾아 뵙는데, 큰스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한참 뒤에 ‘니 장가가나? 장가가면 뭐가 좋을 줄 아나?’라고 하셨습니다. 제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계셨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저는 아무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집사람과 삼천배를 하고 큰스님을 친견하려 했지만 결국 또 못 만났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야속하게 흘러버렸습니다.

 

나중에 집사람이 해인사 보현암에서 7일간 매일 삼천배를 하고 혜춘 스님과 백련암에 가서 큰스님을 친견했습니다. 집사람이 큰스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잘 살겠습니다’고 말씀드리니까 큰스님께서는 ‘속가에 살더라도 중같이 살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인지 교수님과 사모님은 자녀를 낳지 않고 같이 정진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삶이 다소 느슨해지면 부부가 함께 삼천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한다. 

 

대아(大我)의 삶을 위하여

  

교수님은 성철 스님에 대해 “대장부”, “사나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솔직히 큰스님께서는 자애로웠던 것 같지는 않아요. 하하. 그래도 큰스님을 뵐 때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분이 계실까? 금생의 노력만으로 저렇게 대(大) 도인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큰스님께서는 과거 전생부터 엄청난 수행을 하셨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큰스님의 모든 것이 추상같았습니다. 경상도식으로 말하자면 사나이 중의 사나이고 또 당당한 모습이 마치 대장부 중의 대장부입니다. 산으로 치면 외외(嵬嵬)하다고 하겠습니다.” 

 

산이 높고 힘찬 것을 보통 ‘외외하다’고 한다. 교수님은 성철 스님에게 ‘외외’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학자로서 볼 때도 성철 스님은 여느 학자 못지않은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고 교수님은 말한다.

 


권탄준 교수님의 강의 모습 

 

“큰스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수행력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경전이나 학자들의 저서에 대해 말씀드려보면 내용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물론 좀 더 보완했으면 하는 내용들까지 줄줄 말씀하십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큰스님께서는 일본어 불교서적을 섭렵하셨습니다. 그 책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평을 해주셨던 기억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일본어 책 중에서는 『정법안장』을 꼭 보라고 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권 교수님은 성철 스님이 핵심적으로 강조했던 가르침을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소아(小我)가 아닌 대아(大我)의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삼천배의 의미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삼천배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삼천배를 하면 부처님께서 저에게 무엇인가를 막 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을 함으로써 자기를 낮추게 되고 정진하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대중들에게 이 부분을 기대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백련암에는 문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큰스님 욕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도인 값을 해라’,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네가 무슨 도인이냐?’ 이런 말들이 가끔 들렸어요. 하루는 큰스님께서 저에게 그러십니다. ‘나보고 절을 하라 하나. 부처님 보고 하라 하지. 사람은 정신이 근본이지만 자신의 육신을 이기는 것도 참 중요하다. 자기 몸을 이기지 못하면 수행을 못한다.’ 이 말씀을 듣고 몸을 조복시키는 수련의 차원에서 삼천배가 엄청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교수님은 대중들이 봤으면 하는 성철 스님의 법어집으로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추천하기도 했다. 쉽게 정리돼 대중들이 어렵지 않게 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선지식(善知識)이 부재한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큰스님이 계실 때는 그래도 우리 한국불교가 안정이 되었고 수행중심의 가풍을 정말로 귀하고 값지게 생각했습니다. 스님들 대부분이 청정한 승풍을 유지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어요. 일반인들 역시 불교는 수행을 최우선으로 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했었죠. 제가 자주 찾았던 각화사만 해도 스님들이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을 비롯해 여러 선지식들이 열반에 드신 이후로는 이런 불교계 안팎의 기대들이 차츰 무너졌고 지금에 와서는 승풍실추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가슴이 아픕니다.” 

 

권 교수님은 “성철 큰스님이 우리 세상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 그저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평생의 스승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나타냈다.  

 

“결혼 직후에 큰스님을 친견한 후 뵙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열반 전날 큰스님께서 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늘에 엄청 커다란 모습으로 나타난 큰스님께서 제게 미소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이 말입니다.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다음 날 오후에 큰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너무 죄송했습니다.” 

 

교수님은 열반 소식을 듣고 해인사로 달려가 성철 스님의 법구가 모셔진 퇴설당까지 올라가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교수님을 알아 본 문도스님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권 교수님은 “큰스님과 했던 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직도 죄송한 마음 뿐”이라면서도 학자로서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화엄경』을 더 깊이 연구해서 일반인들이 『화엄경』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결국 큰스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 아닐까 싶네요.”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인터뷰를 마치면서 교수님은 대학원 수업을 위해 “이등병처럼”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강의실로 달렸다. 급하게 왔지만 학생들에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자한 미소를 보여준다. 교수님에게 정년퇴임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임을 예감하면서 캠퍼스를 다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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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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