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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
큰스님을 아는 사람、 곧 자기를 바로 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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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  1997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9,96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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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 승가대학원 원장

 

지금(96년 10월)으로부터 3년 전, 그야말로 가야산을 온통 뒤덮었던 그 인산인해의 큰스님을 보내는 다비 법요식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다 참석하셨을 것이고 그 광경이 잊지 못할 모습으로 머리 속에 남아 있을 줄 믿습니다. 저는 큰스님을 떠올릴 때마다 그 광경이야말로 큰스님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바로 큰스님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이상 큰스님에 대한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훌륭한 인물은 우리가 아무리 추모를 하고 또 그 분의 사상과 생애를 수없이 더듬는다 하더라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큰스님을 추모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두고 마치 스님의 이름을 빌어 사업을 한다는 등등 쉽게 말들을 합니다만 사실은 큰스님의 덕화가 충분히 우리 뒷사람들이 추모할 만하고 또 스님의 사상과 생애를 조망함으로써 우리가 본받아야만 할 모범이 되기에 이러한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내 그림자를 보러 왔느냐

 

지나간 세월, 큰스님을 모시고 몇 철을 살았습니다. 큰스님의 장군죽비 밑에서 좌선도 하고 『육조단경』을 설법하실 때는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경청을 하면서 일일이 그 말씀을 기록하곤 했습니다. 또 큰스님께서 큰절에 내려오시면 시자 노릇을 자원해서 방 청소나 군불 때는 일까지 맡아서 한 인연이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많은 책을 쓰셨습니다마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스님의 그 어떤 책 보다도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스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을 ‘이 시대의 부처’라고 서슴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스님을 전혀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차원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고 하는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이야말로 바로 스님을 바로 보는 지름길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철 큰스님을 알고 성철 큰스님을 보는 사람은 자기를 바로 보는 사람이다. 자기를 바로 보는 사람은 바로 성철 큰스님을 볼 줄 아는 사람이고 성철 큰스님을 진정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고 하는 큰스님의 법문이야말로 ‘영원히 살아 있는 법문’이고, 이 순간 가장 필요한 법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나를 보는 것이다. 너희들 이 자리에 왜 왔느냐. 나를 보러 왔느냐, 내 그림자를 보러 왔느냐. 나를 보러 왔다면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길이 나를 바로 보는 길이다.”
어딘가에서 큰스님이 이렇게 우리를 꾸짖고 계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자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하고 아는 것을 힘써 실천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할 바를 잃지 않는 자는 오래 지속되고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장수하는 사람이다.”

 

성철 큰스님을 몇 마디 말로써 표현한다면 아마 노자가 말씀하신 이러한 말을 빌어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참으로 스님께서는 남을 알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아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스님의 그 피나는 고행은 남을 이기는 일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을 이기는 수행이었습니다.

 

참으로 스님께서는 진정 이기기 어려운 자기 자신을 이긴 분이셨습니다. 스님의 장좌불와, 그 검소하심, 우리 눈에도 생생한 칼날 같은 삶의 흔적들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결국 남을 이기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기는 일이었습니다.

 

큰스님은 평소에 워낙 검소하셨기에 사실 보여줄래야 보여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검정 고무신과 누더기 두루마기, 바닥이 해어지도록 깁고 기운 양말 등, 내놓고 보여줄 만한 소지품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 누더기와 검정 고무신,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요. 참으로 부유했던 스님의 정신세계, 만족할 줄 앎으로써 천하의 어떤 부유함보다도 스님의 가슴은 더 넉넉했고 훨씬 더 부유했던 그 마음, 우리는 그 누더기 한 벌에서 ‘자족’할 줄 아셨던 스님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한 번은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마하연에 계셨는데, 스님 금강산을 몇 번이나 구경하셨습니까?”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셨다고 하니 부러운 마음에 금강산을 몇 번이나 가보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가서 몇 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모친이 금강산 구경차 나를 찾아왔다고 하기에 모친 안내하기 위해서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고 감동했습니다. 과연 몇 사람이나 금강산에서 몇 년을 살면서 한 번도 구경하지 않고 모친이 오니까 마지못해서 안내하느라고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는 쓸데없이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고 외국도 더러 다닙니다만 그럴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큰스님께서는 ‘금강산을 뭐 할려고 봐’라고 말씀하시면서 “수행하는 동안은 문밖을 벗어나지 말라.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아는 분, 창문으로 엿보지 않고도 천도를 보는 분. “성인은 나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밝게 살핀다. 그리고 굳이 몸소 행하지 않고도 일을 성취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스님은 별로 다니신 적이 없습니다. 스님은 외국 한 번 가신 일이 없습니다. 어디 구경하느라고 다니신 일도 없으십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널리 알았습니다. 성전의 철조망 속에서 또는 백련암에서 산문을 벗어나지 않으시면서도 천하고금의 일을 꿰뚫어 아는 스님의 그 해박함, 그것은 성인의 일일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큰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느낀 점입니다. 어떤 세세한 이야기보다도 제 가슴 속에 와닿는 스님의 이미지를 바로 이러한 그 몇 마디로써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그동안 한국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정의, 그것은 난마와 같이 흩어져 있고 그야말로 중구난방으로 백인백색의 주장을 했습니다. 소위 견성이니 성불이니 수행의 구경의 경지가 어떤 것이니 하는 이야기가 정말 가지각색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경전이 있고 조사스님의 가르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별 주장이 횡행한 시점에서, 큰스님께서는 깨달음과 견성에 대한 확고부동한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선문정로』를 통해서 깨달음에 분분한 옳지 않은 이론들을 완전히 잠재우신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깨달음의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큰스님이 오셔서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해서 다시는 깨달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표현할 수 없도록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한글 세대의 감각에 맞게 번역한 최초의 선어록 총서인 <선림고경총서>의 하나인 벽암록

 

또한 큰스님께서는 순수선을 주장하시고 스님도 순수선을 실천함으로써 삶을 삼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능엄주라든지 백팔참회라든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대중교화의 방편도 많이 펼쳐서 많은 사람을 제접하셨습니다.

 

우리는 큰스님을 ‘가야산의 호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어린아이들에게는 따뜻하고 온유함을 보이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스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어린아이들과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모습이실까, 아니면 서슬이 시퍼런 주장자로 수좌들을 후려치는 호랑이 같은 모습이 과연 스님이실까.

 

이제 큰스님의 법문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읽어보겠습니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본래 부처입니다’라고 스님은 거침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행을 통해서 또는 어떤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구원되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래로 구원되어 있고 본래로 부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바로 보자고 하는 말씀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다’고 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일 뿐이다. 우리는 본래 행복과 영광에 가득 차 있는 존재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큰스님께서 평소에 자주 말씀하셨던 중도정견이니 돈오돈수니 하는 말씀도 이 자기를 바로 보라고 하는 법문에 전부 집약되어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중도정견이니 돈오돈수니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하는 법문 속에서 단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자기는 원래로 구원되어 있다. 자기는 본래 부처다. 그리고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는 존재다. 다시 닦고 말고 할 필요가 없이 완전무결한 존재다. 어느 특수한 한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 사람이 다 똑같이 완전무결한 존재다. 알고 보면 염불하고 절하고 참선하고 해서 내가 갖추고 있는 본래의 모습에 더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신 중도정견이요 돈오돈수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불교용어로 돈오돈수를 설명하고 중도정견을 설명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본래로 완전무결한 존재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이다. 이러한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 불교의 목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돈오돈수요 중도정견이다”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바로 보자.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하다.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일이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한다. 왜냐하면 완전무결한 부처이기 때문에, 이미 다 해탈되어 있고 제도되어 있는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떤 상대도 모욕을 하거나 업신여기거나 겉만 보고서 불쌍히 여긴다든지 하는 그러한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부처님은 우리를 제도하러 온 게 아니고 이미 제도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닦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수행할 필요 없이 본래로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경지를 연 성철선사의 깨달음의 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는 선철스님 법어집.

 

큰스님의 많은 법문이 편편마다 뛰어나고 훌륭합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이 한 편의 법문 속에 스님의 현학적인 백일법문과 그 외의 많은 법문들이 한마디로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바카리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이 바카리 비구는 나이도 들고 몸도 쇠약해져 중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거두게 되는 찰나에 어느 신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 제 마지막 소원을 꼭 좀 전해 주시오. 내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눈을 감았으면 좋겠는데, 이 몸으로 도저히 갈 수가 없으니 정말 죄송스럽지만 부처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나의 예배를 받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부탁을 받은 신도가 부처님께 가서 마지막 소원을 전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가 목숨을 거둘 찰나에 있다고 하니까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짚어주기도 하고 손을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어떻게 물이라도 좀 마실 수 있느냐, 숨쉬기는 힘들지 않느냐, 좀 견딜만 하느냐 하며 아주 따뜻한 말씀으로 제자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카리 비구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눈을 감고 싶으니 부처님 제 예배를 받아 주십시오” 하며 기어이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따뜻하게 제자를 어루만지면서 위로하던 부처님은 그 말을 듣자 냉정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의 그 썩어 가는 몸뚱이를 가지고 지금 다 늙어서 썩어가고 있는 내 몸뚱이에 예배를 한들 너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너의 그 썩어가는 몸뚱이를 가지고 나에게 예배하고 또 썩어가는 이 몸뚱이가 앉아서 너의 예배를 받은들 나에겐 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부처님도 살아 있는 육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스님께서 열반하신 지 3년 되는 이 순간, 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전시회를 갖고자 모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진정 스님을 추모하는 의미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 전시실에 스님의 그림자는 많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실체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시실에 걸려 있는 그림은 전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영이라고 영정이라고 반드시 그림자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그림자만 보고 있을 게 아니잖습니까. 스님의 실체를 봐야 합니다. 만약에 스님의 실체가 이 순간 없다면은 우리는 또 무엇하러 여기에 모였습니까. 누가 감히 없다고 또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과연 스님의 실체인지 이런 화두를 우리가 이 순간 여기 와서 한 번쯤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림자는 저렇게 많이 걸려 있는데, 스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부처님의 살아 있는 육신도 썩어가는 육신도 아무 소용없는 것, 아무 이익 없는 것, 썩어가는 육신끼리 주고받는 예배가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아무런 이익도 없는 그런 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 부처님의 그 단호한 꾸짖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철스님을 참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은 자기를 바로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바로 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성철 큰스님을 바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큰스님을 바로 아는 길이고 또 큰스님을 진정 바로 추구하는 길이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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