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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번뇌망상 - 두 가지 번뇌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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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3:39 / 조회7,749회 / 댓글0건첨부파일
본문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 인 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3-1】은 제3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3-1】 ①근본무명이 진여본성을 고동鼓動하여 삼종三種의 미세한 망상을 결성結成하니 아뢰야阿賴耶라 한다. 그리고 각종의 경계반연境界攀緣으로 망심업해妄心業海를 기동起動하여 육개六箇의 추중번뇌麤重煩惱를 첨기添起하니 이를 의식意識이라 한다. ①以根本無明이 動彼眞如하야 成於三細를 名爲梨耶요 又以境界緣故로 動彼心海하야 起於六麤를 名爲意識이니라. (賢首, 『起信論別記』, 『大正藏』44, p.290c)
* ‘근원적인 어리석음’[根本無明]이 ‘참다운 본성’[眞如本性]을 뒤흔들어 세 가지 미세한 그릇된 생각[煩惱]을 만드니 아뢰야라 한다. 또한 근원적인 어리석음이 대상에 작용을 일으켜 여러 종류의 그릇된 마음을 움직여서 여섯 가지 비교적 무거운 번뇌를 덧붙여 일으키니 이를 의식이라 한다.
【평석】 번뇌망상에 무분별無分別인 삼종미세三種微細와 유분별有分別인 육종추중六種麤重이 있어 팔만사천의 무량번뇌를 파생派生한다. 3세三細는 근본무명으로 아리야阿梨耶, 아타나阿陀那, 제8식第八識 등으로 부르고 6추六麤는 의식意識 혹은 제6식第六識이라 한다. 그리고 제7말나第七末那는 “계내위아(計內爲我)하야 속전삼세(屬前三細)하고 계외위아소(計外爲我所)하야 속후육추(屬後六麤)일새 약불론(略不論)”(賢首 『起信論義記』, 『大正藏』44, p.263a)이라 하였다. 제사諸師의 논소論疏에 3세三細를 아뢰야라 함은 일치하나, 6추六麤에 대하여서는 육식六識 혹은 육칠식六七識이라 하여 논설이 한결같지 않다. 그러나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3. 명말 4대 고승의 한 사람으로 『능엄통의楞嚴通議』, 『능가기楞伽記』 등의 저술이 있다.
도 “기칠其七은 내허가乃虛假니 고로 능가楞伽에 운云 7식七識은 불류전不流轉하나니 비생사인非生死因”(『百法論議』)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제7말나第七末那를 별론別論하지 않아도 수도상修道上에 관계없으므로 현수설을 취하였다.
원소 스님과 성철 스님
* 번뇌와 망상에는 작아서 구별하기 힘든 세 가지와 비교적 커 구별할 수 있는 여섯 가지가 있어 팔만 사천 가지나 되는 수많은 번뇌를 불러일으킨다. 세 가지 미세한 번뇌는 근원적인 어리석음으로 아리야, 아타나, 제8식 등으로 부르고,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는 의식 혹은 제6식이라 한다. 그리고 당나라의 현수법장은 제7말나에 대해 “제8식을 자기로 잘못 생각하므로 세 가지 미세한 번뇌에 속하고, 제1식부터 제6식까지를 나의 것으로 그릇되게 생각하므로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에 속하기에 생략하고 논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러 스님들이 저서에서 세 가지 미세한 번뇌를 아뢰야라 함은 일치하나,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를 육식 혹은 육칠식이라 말해 견해가 서로 같지 않다. 그러나 명나라 감산덕청은 “제7식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능가경』에도 제7식은 움직여 활동하지 않으니 삶과 죽음의 원인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7식을 따로 논의하지 않아도 수행하는 데는 관계가 없으므로 현수법장의 견해를 채택했다.
【강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번뇌 망상에 가려 불성을 보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제 그 번뇌 망상에 대해 알아볼 차례이다. 번뇌 망상의 종류와 속성을 일일이 거론하자면 팔만대장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선 그 골수를 추려 『기신론』에서 설한 3세와 6추로 요약하였다. 3세 6추를 8식에 배대하는 문제에 있어선 논사들 간에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기신론』을 주석한 여러 주석가 중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을 최고로 치는데, 3세를 아뢰야식에 배대한 점에서는 두 분의 견해가 일치한다. 하지만 6추에 대해 원효 스님은 6추의 지상智相 주관적 마음 작용이 경계의 실상을 알지 못해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고는 좋다・나쁘다・옳다・그르다 등으로 판단하고 망념에 사로잡히는 것.
을 제7식에 배대하고 나머지 5상(상속상相續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기업상起業相·업계고상業繫苦相)을 의식에 배대한 반면, 현수 스님은 제7식을 따로 거론하지 않고 6추를 모두 의식에 배대하였다. 왜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의 견해가 다를까? 현수 스님이 혹 거론해야 할 제7식을 실수로 빠트린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종사로 추앙받는 이들은 한마디 말이라도 함부로 하는 법이 없다. 근본에서 바로 볼 때 제7식은 자체가 없는 것이므로 현수 스님이 제7식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식설을 다루는 학파가 법상종法相宗인데 법상종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을 근본정전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 『해심밀경』에는 제7식을 거론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역시 제7식에 대한 이론이 후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수 스님이 근거도 없이 제7식을 거론하지 않은 게 아니다. 원효 스님 또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근간으로 한 법상유식학의 영향을 받아 능변식能變識의 하나인 제7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어 지상을 제7식에 배대했던 것이다.
【3-2】 ①3세와 6추가 일체의 생멸하는 염법染法을 총섭總攝하나니 이는 다 진여본성을 배치背馳한 인유因由로 생기生起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알지어다. 3세 6추의 근본인 무명이 능히 일체의 생멸법을 파생派生한다고 하였느니라. ①三細六麤가 總攝一切染法하나니 皆不了眞如而起니라 故로 云當知하라 無明이 能生一切染法也라 하니라. (賢首, 『起信論義記』, 『大正藏』44, p.263c)
* 세 가지 미세한 번뇌와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가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번뇌를 총괄總括하는데, 이는 다 참다운 본성과 어긋나는 까닭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세 가지 미세한 번뇌와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의 근원인 어리석음이 번뇌에 물든 모든 존재를 생기게 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아라!’고 말한다.
【평석】 3세三細는 근본무명이요 6추六麤는 지말무명枝末無明이니, 7지 이하의 일체중생은 6추 중에 있고 8지 이후의 자재 보살은 3세 중에 있다. 이 본말의 양종무명兩種無明 즉 번뇌 망상이 진여불성을 엄폐하고 있으니, 본성을 철견徹見하려면 이 양종兩種을 제거하여야 한다. 만약에 6추만 제거하고 3세가 잔여殘餘하면 이는 자재 보살의 경계이니, 종문宗門에서 제8 마계第八魔界라 하여 구경각인 견성이 아니다. 견성은 제8 아리야식第八阿梨耶識인 3세三細를 영단永斷한 무여열반이라야 하나니 무여열반은 즉 무심이다. 그리하여 자재 이상의 대보살들도 미세무명을 미탈未脫하고 제8아리야第八阿梨耶에 주재住在하므로 견성이 못되나니, 제8의 극미세망상까지 단진斷盡하여야만 여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지傳持한다. 만약에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여전무수如前無殊하여 6추도 미제未除한 해오解悟를 견성이라고 한다면 이는 정법을 파멸하는 용서할 수 없는 대과오이며 불조佛祖에 대한 반역이다.
* 세 가지 미세한 번뇌는 나무의 뿌리에 해당되고,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는 나무의 가지에 해당된다. 보살 10지 가운데 제7지 이하의 모든 중생은 여섯 가지 번뇌에 물들어 있고, 제8지 이상의 자재 보살은 세 가지 미세한 번뇌에 물들어 있다. 뿌리와 가지에 해당되는 두 종류의 어리석음, 즉 번뇌와 그릇된 생각이 참다운 본성[진여불성]을 덮어 가리고 있으니, 참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체득하려면 이 두 가지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만약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만 제거하고 세 가지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으면 이는 자재 보살의 경지이니, 선문禪門에서는 제8 마계에 있다고 보기에 궁극의 깨달음이 아니다. 깨침은 제8 아뢰야식인 세 가지 미세한 번뇌를 영원히 끊은 무여열반이라야 하며, 무여열반이 ‘집착 없는 참다운 마음’[無心]이다. 그리하여 자재 이상의 대보살들도 미세한 번뇌를 끊어내지 못하고 제8 아뢰야식에 있으므로 참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체득한 것은 아니다. 제8 아뢰야식의 매우 미세한 번뇌와 그릇된 생각까지 끊어 없애야만 붓다의 ‘올바르고 진실한 깨달음’[正法眼藏]을 이어 받아 지닌다. 만약 손님처럼 다가온 번뇌가 여전히 있고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도 없애지 못한 ‘이해한 깨달음’[解悟]의 상태를 ‘참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파악한’ 견성으로 본다면 이는 정법을 파멸하는 용서할 수 없는 크나큰 잘못이며, 부처님과 조사들에 대한 반역이다.
【강설】 『수심결』에선 얼음이 본래 물인 줄 알듯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 알면 견성이라 하고, 두꺼운 얼음을 태양이 녹이듯 번뇌 망상을 지혜광명으로 하나하나 끊어나가는 것이 도인이라 했다. 허나 이는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말씀에 상반되는 견해이다. 부처님과 조사들은 위에서 살폈듯 추중망상뿐 아니라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끊어져야 견성이라고 한 결 같이 말씀하셨다. 번뇌 망상을 나무로 치자면 가지와 잎을 쳐낸 것 정도로는 견성이라 할 수 없다. 줄기를 자르고 근본인 뿌리까지 완전히 뽑아낸 것을 견성이라 한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번뇌 망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중생이지 부처가 아니다.
【3-3】 ①육도六途에서 생사윤회 할 때에 피등彼等의 유정중생有情衆生들이 생멸하는 유정들 중에 타락하여 있다. 그 중 최초에 일체의 생멸하는 종자種子인 심식心識이 전전展轉하며 화합하여 증장增長하고 광대廣大하나니, 이 근본식根本識을 혹은 아타나阿陀那 혹은 아뢰야阿賴耶 혹은 심心이라 명칭 한다. 이 아타나식阿陀那識이 의지依持가 되어 건립하는 고로 육전식신六轉識身이 전동轉動하나니 이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이다. ①於六趣生死에 彼彼有情이 墮彼有情中이라 於中最初에 一切種子心識이 展轉和合하야 增長廣大하나니 此識을 亦名阿陀那하며 亦名阿賴耶하며 亦名爲心이니라 阿陀那가 依持하야 建立故로 六轉識身이 轉하나니 謂眼耳鼻舌身意니라. (『解深密經』 1, 『大正藏』16, p.692b)
*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 등 여섯 가지 길에서 돌고 도는[輪回] 중생들은 갖가지 중생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 그 가운데 최초에 일체종자심식이 이리 저리 돌고 돌아 모여 커지고 길어지고 넓어진다. 이 식을 아타나 또는 아뢰야, 혹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아타나에 의지해 확립되기에 현재 작용하는 여섯 가지 식이 움직이는데, 육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다.
【평석】 『해심밀경』은 유식법상唯識法相 세친의 『유식삼십송』을 주석한 『성유식론』을 중심으로 발달한 중국의 종파. 마음의 본체를 다루는 여래장이나 선종 등에 대해 현상계의 모습을 주로 다룬다고 하여 법상종이라고 함.
의 근본 소의所依이다. 최초의 종자식種子識 즉 아타나阿陀那는 3세를 말한 것이요 6전식신(六轉識身)은 즉 6추이니 『해심밀경』에서는 제7식第七識을 설하지 않았다.
* 『해심밀경』은 법상종이 근본으로 여기는 경전이다.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최초의 씨앗에 해당되는 아타나는 세 가지 미세한 번뇌를 말하며, 현재 활동하는 여섯 가지 식은 비교적 큰 번뇌이다. 『해심밀경』은 제7식을 설하지 않았다.
【강설】 『해심밀경』에선 근본식인 아뢰야식에 의지해 6전식이 생긴다고 했다. 어디를 살펴보아도 제7식을 거쳐 6식이 전개된다는 얘기는 없다. 유식학의 근본이 되는 『해심밀경』에 설해지지 않았는데 왜 제7식이란 용어가 나온 것일까? 이는 설명을 용이하게 하고자 후대에 설정된 것이지 경에 근거한 근본학설이랄 수는 없다. 모든 불교의 논서와 학설은 부처님 말씀인 경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따라서 경의 종지에 근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학설이라 하겠다. 유식학의 근본 소의경인 『해심밀경』에 제7식이 거론되지 않았으니 굳이 제7식을 수립해 이론을 전개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3-4】 ①번뇌 망상인 제종식심諸種識心에 이종二種의 생生이 있으니 유주생流注生과 상생相生이다. ①諸識이 有二種生하니 謂流注生及相生이니라. (『楞伽經會譯』 一之上, 『卍續藏經』1, p.231a)
* 번뇌와 그릇된 생각으로 대표되는 여러 종류의 마음[識心]에 두 가지의 흐름[生]이 있다. 그릇된 생각에 이끌려 찰나마다 태어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며 존재하는 유주생流注生과 그릇된 마음이 대상의 모습[相]에 사로잡혀 태어남과 사라짐을 되풀이하는 상생相生이 그것이다.
【강설】 유주생流注生은 제8아뢰야의 3세요 상생相生은 6추이다.
【3-5】 ①아타나식阿陀那識이 극심히 심세深細하여 일체생멸의 종자가 폭포같이 유동流動한다. 내가 우매한 범부에게 이 아타나식阿陀那識을 개연開演하여 설명하지 않는 것은, 피등彼等이 분별하여 진아眞我라고 오집誤執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①阿陀那識이 甚深細하야 一切種子如瀑流로다 我於凡愚에 不開演은 恐彼分別執爲我니라. (『解深密經』 1, 『大正藏』16, p.692c)
* 아타나식은 매우 심오하고 미세하여 모든 생멸의 종자가 폭포의 흐름과 같이 움직인다. 내가 범부들에게 설명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내가 말한) 아타나식을 ‘자기 자신의 본체’[自我]로 삼을까 두려워서이다.
【평석】 무공용행無功用行과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자재 보살이 구경을 성취 못하는 것은 아타나阿陀那에 주착住著하는 연고이니 항상 불타의 가책呵責을 면하지 못한다.
* ‘의도적으로 무엇을 하고자하는 마음이 없는 행동’[無功用行]을 하고 ‘옳음·그름·좋음·나쁨 등의 상대적 구별을 벗어난 지혜’[無分別智]를 가진 제8지 제9지 제10지의 자재 보살이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타나식에 잘못 집착하기 때문이니, 이런 까닭에 부처님의 질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강설】 제8지에서 제10지까지의 대자재 보살들도 혜안慧眼은 갖췄지만 아타나식을 벗어나진 못했다. 따라서 불안佛眼을 갖춘 부처님이 볼 때 아직 미세한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타나식을 구경으로 집착하고 있으므로 ‘꾸중을 면치 못한다’고 한 것이다. 제8지 보살이 되면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가는데 이를 구경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오매일여도 3세 중의 오매일여가 있고 진여 중의 오매일여가 있다. 제8지 이상 자재 보살들의 오매일여는 3세 가운데의 오매일여이고 여래의 오매일여는 진여 가운데의 오매일여이다. 오매일여라는 같은 표현으로 인해 흔히 혼동할 수 있는데 그 둘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외명철內外明徹이다. 이는 육조 스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부분인데 3세 가운데서는 아무리 오매에 일여하다고 해도 내외명철하진 못하다. 따라서 내외명철하지 못하다면 아직은 3세의 미세한 망상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한다.
【3-6】 ①6추의 종말인 지상智相은 7지에서 이 미혹이 진멸盡滅하고, 3세의 최후인 업상業相은 십지종심十地終心인 금강유정金剛喩定에서 영진永盡한다. ①六麤中智相은 於七地에 盡此惑也요 三細中業相은 十地終心金剛喩定에서 都盡하느니라. (賢首, 『起信義記』 下本, 『大正藏』44, pp.267c-268a)
* 여섯 가지 미세한 번뇌의 마지막인 지상智相은 보살 제7지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세 가지 미세한 번뇌의 마지막인 업상業相은 보살 제10지의 마지막 단계인 ‘다이아몬드 같이 흔들림 없는 선정’[金剛喩定]에서 영원히 없어진다.
【평석】 몽중일여夢中一如의 화엄 7지위七地位는 아직 6추의 영역이요 숙면일여熟眠一如인 자재위自在位에서 비로소 제8 리야第八梨耶인 3세이니, 8지에는 6추가 없고 불지佛地에는 3세가 없다. 선문禪門에서는 장식藏識을 제8마계第八魔界라 하여 극력 배척함은 미세장식微細藏識을 타파하지 않으면 견성할 수 없으므로 오직 정법正法을 위한 노파심老婆心의 발로發露이다. 자성을 엄폐하고 있는 번뇌 망상에 미세와 추중麤重의 양종兩種이 있음을 알았다. 추중은 유분별有分別이므로 용이容易하게 각지覺知되지마는 미세는 무분별無分別이어서 참으로 심심난해甚深難解하여 수도修道 상의 일대애로一大隘路가 된다. 동정일여動靜一如와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되어도 숙면일여熟眠一如가 되지 않으면 이는 6추의 영역이요, 숙면일여熟眠一如가 되어야 비로소 가무심假無心인 3세이다. 이 미세를 단진斷盡하지 않으면 견성이 아니어서 정안종사正眼宗師가 될 수 없으니, 이것을 극력 구명究明하여 기필코 이탈하여야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계승할 수 있다. 추중麤重을 영리永離한 뇌야무심賴耶無心도 견성이 아니거늘, 추중의 객진번뇌 속에서 견성이라 자처하게 되면 자오오인自誤誤人의 대 비극이 연출되나니 천만千萬 각성하여야 한다.
* 몽중일여의 경지는 보살 제7지 단계로 여섯 가지 미세한 번뇌에 걸려있는 영역이다. 숙면일여인 제8지·제9지·제10지 단계는 미세한 번뇌인 아뢰야식이 남아 있는 경지이다. 보살 제8지에는 여섯 가지 미세한 번뇌가 없고, 붓다의 경지에는 세 가지 미세한 번뇌도 없다. 선문禪門에서는 아뢰야식에 얽혀있는 단계인 제8지·제9지·제10지를 제8 마계라 하여 완전히 배척한다. 이는 미세한 번뇌인 아뢰야식을 타파하지 않으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할 수 없으므로, 오직 올바른 진리[正法]를 위해 ‘할머니가 손자에게 타이르듯이 간절한 마음’[老婆心]에서 우러나온 소리이다. 참다운 본성[自性]을 가리고 숨기고 있는 번뇌와 그릇된 마음에 ‘미세한 것’과 ‘비교적 큰 것’이 있음을 알았다. 비교적 큰 것은 쉽게 구별하지마는 미세한 번뇌를 구별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어려워 수행하는 데 하나의 큰 장애가 된다. 동정일여 몽중일여가 되어도 숙면일여가 되지 않으면 이는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숙면일여가 되어야 비로소 ‘무심 상태인 것 같은’[假無心] 세 가지 미세한 번뇌의 영역에 들어간다. 이 미세한 번뇌를 끊어 없애지 않으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하며 ‘바른 눈을 가진 올바른 스승’[正眼宗師]이 될 수도 없다. 매우 노력해 이 점을 분명하게 알고 기필코 미세한 번뇌에서 벗어나야 붓다의 ‘지혜로운 명맥’[慧命]을 이을 수 있다. 비교적 큰 번뇌를 영원히 없애 ‘아뢰야식만 남아 있는 단계’[賴耶無心]에서도 아직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하물며 ‘손님처럼 다가온 비교적 큰 번뇌’[客塵煩惱]와 함께 있으면서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고 자처하는 것은, ‘자기와 남을 착각하게 만드는’[自誤誤人] 큰 비극을 연출하는 행위와 같다는 점을, 참으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강설】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란 말을 자주 거론하는데 이는 공부를 하다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경계이다. 동정일여란 가거나 오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늘 여여해서 잠시도 끊어짐이 없는 것을 말한다. 쭉 이어지다가 잠깐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그런 것은 일여라 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드는 순간까지 한 생각이 잠시도 끊어지지 않는 걸 동정일여라 한다. 몽중일여란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꿈에서도 불경계佛境界가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경계가 나타나는 듯하고 화두가 조금 들리는 듯싶으면 그걸 몽중일여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몽중일여가 아니다. 잠이 들어 깊은 꿈속에서조차 변동 없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것을 몽중일여라 한다. 그런 몽중일여의 경계가 되면 화엄7지 보살이다. 숙면일여란 꿈 없는 깊은 잠에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이다. 숙면일여의 경계가 나타나면 8지 이상의 자재보살인데 이것조차도 제불 조사들께선 제8 마계라 하여 머물고 집착하는 것을 극력 배척하셨다. 그러니 동정일여 몽중일여도 안된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고도 견성이니 깨달음이니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외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객진번뇌도 떨치지 못했으면서 약간의 지혜가 생겼다 하여 그걸 궁극의 견성인 줄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혼자만의 착각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근거도 없는 망설과 삿된 견해로 다른 이의 본성까지 오염시키니 참으로 큰일이다. 그러니 보잘 것 없는 견해로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6추뿐 아니라 3세의 미세망상 까지 완전히 떨치고 오매일여 숙면일여의 경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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