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선문정로]
오매일여寤寐一如 , 자나 깨나 한결같다
페이지 정보
활인검(조병활)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09:55 / 조회7,230회 / 댓글0건본문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인검
편집자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8-1】은 제8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8-1】 ①일반一般으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영대靈臺의 지성智性이 있어서, 능히 보며 능히 듣고 5온五蘊의 신전身田 속에서 주재主宰를 짓나니 이렇게 하여 선지식이라 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임이다. 만약에 소소영령을 인득認得해 진실한 너로 삼는다면, 갑수瞌睡할 시에는 어째서 소소영령이 없어지는가. 만약 갑수할 때에 없으면 이것은 도적을 오인하여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으니, 이는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緣起이다. ①有一般昭昭靈靈한 靈臺智性하야 能見能聞하야 向五蘊身田裏하야 作主宰하나니 恁麽爲善知識하면 大賺人이니라 我今問汝하노니 若認昭昭靈靈하야 爲汝眞實이면 爲甚麽하야 瞌睡時엔 又不成昭昭靈靈고 若瞌睡時에 不是면 箇는 認賊爲子니 是生死根本이며 妄想緣起니라. (①「玄沙備」, 『傳燈錄』18, 『大正藏』51, p.345a)
* ①어떤[有] 사람들은[一般] 밝고 신령한[昭昭靈靈] 몸속의 지혜로운 성품[智性]이 능히 보고 능히 들으며 오온인 몸을 주재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은 것[恁麽]을 선지식으로 여기면 사람을 크게 속이는 것이다. 내 지금 너에게 묻노니 “만약 밝고 신령스럽게 작용하는 그것을 참다운 너로 여기면 어째서 잠잘[瞌睡] 때엔 밝고 신령스럽게 작용하지 않는가?” 만약 잠잘 때 작용하지 않으면 도적을 아들로 여기는 것이며, 이는 삶과 죽음의 근본이자 망상이 일어난 것[緣起]일 뿐이다.
【평석】 여하如何히 대오大悟하고 지견知見이 고명高明한 것 같아도, 실지경계實地境界에 있어서 숙면시熟眠時에 여전히 암흑하면 이는 망식妄識의 변동變動이요 실오(實悟)는 아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반드시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실경(實境)을 투과(透過)하여야 정오(正悟)케 된다.
성철스님(앉은 분). 앞에서 두 번째줄 오른쪽 첫번째 전 동국대 김선근 교수.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 해인사 백련암.
* 아무리 크게 깨닫고 견해가 뛰어나도 깊이 잠들었을 때 여전히 어두우면(화두가 들리지 않으면) 이 깨달음과 견해는 ‘그릇된 마음[妄識]’이 변해 움직인 것[變動]이지 참다운 경지[實地境界]의 깨달음[實悟]이 아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자나 깨나 화두가 똑같이 들리는 진실한 경지를 통과해야[透過] 올바르게 깨닫게 된다.
【강설】 현사 스님은 설봉 스님의 제자로 스승을 능가하는 기봉을 펼쳤던 분이다. 당시 교와 선을 불문하고 의심이 있거나 분쟁이 생기면 현사 스님을 찾아가 판결을 받고 처분을 기다렸다 할 만큼 선과 교에 크게 통달 했던 대大법왕法王이시다. 그분의 말씀을 여기에 인용하였다. 공부를 해나가다 크게 깨쳐 조사와 부처가 자기 발밑에 있는 듯해도 잠이 들었을 때 캄캄하다면 그것은 망상이지 실제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다가 기특한 지견이나 경계가 나타나면 제불조사를 초월했노라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 만나보면 대부분 오매일여는 고사하고 동정일여動靜一如도 되지 않은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하고 흔하다. 그것이 병인 줄 알아차리면 다행이지만 대단한 보물인 양 끝끝내 지키고 자랑한다면 결국 ‘어리석은 죽음’에 이르는 일밖엔 없다. 그러니 아무리 대단한 지견을 얻고 휘황한 경계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경계가 꿈속에 일여한지 깊은 잠이 들었을 때도 일여한지 반드시 점검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망상의 인연으로 나타난 경계이지 바른 깨달음이 아님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8-2】 ①담당준湛堂準이 대혜大慧(주1)에게 말하였다. “고상좌杲上座여, 나의 선법禪法을 그대가 일시에 이해하여, 설법을 하라면 설법을 잘 하고 염고송고拈古頌古(주2)나 소참보설小參普說(주3) 할 것 없이 잘 한다. 그러나 일건一件 사실이 있어 실오實悟가 아니다. 그대가 성성惺惺히 사량思量할 때에는 문득 선禪이 있으나 겨우 잠들었을 때에는 문득 없어진다. 만약에 이러할진대 어찌 생사를 당적當敵하리오.” 고杲가 “참으로 이것이 저의 의심하는 바입니다.”라고 대답했다. ①湛堂準이 謂大慧杲曰 杲上座야 我這裏禪을 你一時理會得하야 敎你說也說得하며 敎你拈古頌古와 小參普說도 你也做得하나 祗是有一件事未在라 你惺惺思量時엔 便有禪하되 纔睡著時엔 便無了하니 若如此하면 如何敵生死리오 杲曰 正是 某의 疑處니이다. (①大慧, 『宗門武庫』, 『大正藏』47, p.953b)
* ①담당문준이 대혜종고에게 말했다. “대혜 수좌여! 나의 가르침을 그대가 전부 이해해 설법도 잘하고 염고, 송고, 소참, 보설 등도 잘 한다. 다만 한 가지 일이 없다(참다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깨어 뚜렷하게 생각할 때에는 문득 화두가 똑같이 들려도 잠들면 화두가 사라진다. 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적하겠는가?” 대혜가 “그것이 바로 제가 의심하는 부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평석】 설법이나 다른 일에 아무리 능해도 수면 시時에 캄캄하면 이는 제6 의식 중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인 지해사견知解邪見이요 실오實悟가 아니니, 수도인은 양심에 비추어 맹연猛然히 반성하여야 한다. 오매일여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돈오견성이라고 자부한다면 이는 자오오인自誤誤人의 대죄과大罪過이며 수도과정에 있어서 가공可恐할 병통病痛이요 장애이다.
* 설법 등을 아무리 잘해도 잠잘 때 화두가 들리지[擧] 않으면 이는 제6 의식 중의 ‘이리저리 그릇되게 헤아리는 알음알이나 삿된 견해[知解邪見]’지 ‘진실한 깨달음[實悟]’이 아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 양심에 비추어 치열하고 냉정하게 반성해야 한다. 자나 깨나 화두가 하나 같이 들리는 오매일여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몰록 깨쳐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고 스스로 자랑한다면 이는 자신을 그르치고 남도 그르치는 크나큰 죄를 범하는 것이며 수행 과정에 있어 매우 무서운 병이자 장애이다.
【강설】 대혜 스님은 스무 살 남짓에 스스로 대오했다 장담하고는 천하의 선지식을 두루 참례하였다. 당시 대혜 스님이 얼마나 영리하고 이해가 빨랐던지 도무지 말로는 당할 수가 없고 입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칭찬만 하고 그 잘못됨을 지적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영특함에 자신만만함까지 더하다가 드디어 담당 스님을 뵙게 되었다. 담당준湛堂準 선사는 황룡파 스님으로 혜남 선사의 법을 이은 진정극문 선사(주4)의 제자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선지식이 많았지만 그중 담당준 선사, 영원유청靈源惟淸 선사, 그리고 오조법연 선사(주5)의 세 제자이자 3불로 불렸던 불안청원佛眼淸遠, 불감혜근佛鑑慧懃(주6), 불과극근佛果克勤 등 다섯 선지식이 최고의 안목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래서 대혜 스님이 담당 스님을 찾아간 것이다. 담당 스님이 보니 대혜의 지혜가 여느 사람보다 뛰어나 작은 지견과 성취로도 남과 겨누면 결코 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6식의 망상경계에서 하는 말이지 참으로 깨닫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에 담당 스님이 “그대는 법을 묻고 설명함에 있어 부족함이 하나도 없구나.”하고 일단 대혜를 칭찬한 뒤 덧붙이신 말씀이 바로 이곳에 인용된 내용이다. 겉으론 천하의 누구와 겨뤄도 지지 않을 지혜와 재주를 겸비했다지만 실제 자신의 공부를 돌이켜 볼 때 잠이 들면 그 소소영령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대혜였다. 담당 스님이 대혜의 그런 실제 경계를 지적한 것이다. 공부는 생사해탈이 근본 목적인데 잠만 들어도 캄캄하고 자유롭지 못하다면 죽음의 경계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몽중에 일여가 되어야 병중病中에도 일여一如하고 숙면에 일여가 되어야 생사에도 일여할 수 있다.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도 되지 않았으니 그것을 무슨 공부라 하겠는가?”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혹 오기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허나 대혜 스님은 숙세에 선근을 많이 심은 분이라 귀에는 거슬리지만 스스로 돌이켜보아 자신의 과오를 깊이 인정했던 것이다.
또 병중에 일여가 되지 않고서 스스로 공부를 마쳤다고 오인했던 사람들도 많다. 그 대표적 예가 대혜 스님의 스승인 원오 스님이다. 원오 스님도 스스로 크게 깨쳤다고 자부하고선 천하를 횡행했었다. 원오 스님은 대혜 스님도 미치지 못할 대수재로 천하에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당대 인천의 안목으로 추앙받던 오조법연 선사를 찾아뵙게 되었다. 오조 스님은 첫눈에 그 잘못을 알아보고 틀렸다고 지적해주셨지만 원오 스님은 전혀 인정하질 않았다. 도리어 법연 스님을 바른 선지식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원오 스님에게 법연 스님이 마지막으로 “네가 큰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면 그때 내 말이 다시 생각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다 원오 스님이 훗날 정말 병이 들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제방을 횡행하며 큰소리로 자신의 견처를 자부했었는데 죽음을 앞두니 부처와 조사도 맘대로 죽이고 살리던 평생의 소득처所得處가 빙소와해氷消瓦解(주7)되어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때 법연 선사의 마지막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 병석에서 죽지 않고 다행히 살아난다면 모든 것을 청산하고 법연 스님을 찾아가리라.”고 서원을 세웠다. 다행히 병이 나은 원오는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법연을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과오를 참회했다. 그리고 오조 스님 회하에서 제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법연 선사의 법맥을 이었다.
진실하게 일러주어도 긍정치 않은 예는 비단 원오 스님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수없이 많다. 지금은 더 하다. “밥 먹는 놈 따로 있고 법문하는 놈 따로 있고 잠자는 놈 따로 있는가? 제 정신일 때 바로 깨쳤으면 되지 오매일여고 뭐고, 뭐 그딴 소리 하고 있어.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미친놈들이나 모자라는 놈들이나 하는 말이야. 도대체 몇 사람이나 오매일여가 된다고 그런 소리인가? 잠들어 캄캄하면 어떻고 캄캄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이렇게 덤비듯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흔하디흔한 요즘이다. 허나 심하게 아프거나 생사에 오락가락할 지경을 한 번 겪어보라. 대단하게 여긴 자신의 견처見處가 과연 그때에도 여전히 자신을 자유롭게 하던가? 양심에 손을 얹고 돌아보라. 실제로 생사에 일여하고 자유자재한 그런 법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공연히 쓸데없는 객기와 망상을 부린다면 그것은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짓이다. 옛 조사 스님들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몽중일여 오매일여를 반드시 점검했다. 설사 오매일여의 깊은 경지에 들었다 해도 다시 공안을 들어 크게 깨치는 것이 우리 선문의 바른 공부이다. 그러니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부끄럼이 없이 공부를 해야지, 오매일여도 되지 않은 제6식의 사량분별로 함부로 지견을 휘두르지 말라.
【8-3】 ①대혜大慧가 원오圜悟에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니 차신此身이 아직 존재하여도 다만 수면할 때에는 캄캄하여 주재主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분산하는 사경死境에서 중고衆苦가 치연熾然히 일어날 때에는 어찌 회환전도回換顚倒되지 않겠습니까?” 원오圜悟는 다만 수지手指로 가리키며, “그만하고 그만하라. 그리고 망상을 쉬어라, 망상을 쉬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대가 지금 설법하는 허다許多한 망상이 단절될 때에 그대 스스로 오매항일처寤寐恒一處에 도달하리라.”고 하였다. 초문初聞하고는 또한 신종信從하지 않아서 매양每樣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회고하여 보건대, 오寤와 매寐가 분명히 양단兩段이어늘 어찌 감히 크게 개구開口하여 선禪을 설하리오. 다만 오매항일寤寐恒一이라 한 불어佛語가 망어妄語라면 나의 차병此病을 제거할 것 없지마는, 불어佛語가 과연 중생을 기만하지 않으면 이는 내가 아직 미달未達한 것이다.” 후일에 훈풍熏風이 남南으로부터 취래吹來한다는 설법을 듣고, 홀연히 심중心中에 애응碍膺된 물건을 거각去却하고서 바야흐로 몽시夢時가 곧 오시寤時와 같고 오시寤時가 곧 몽시夢時와 같음을 알게 되니, 오매항일寤寐恒一이라 한 불언佛言을 알았다. 이 도리는 타인에게 염출拈出할 수도 없고 정사呈似할 수도 없어서, 몽중경계夢中境界와 같이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①大慧問圜悟하되 自念하니 此身이 尙在하야도 只是睡著하면 已作主宰不得이어니 況地水火風이 分散하야 衆苦가 熾然하면 如何不被回換이릿고 悟가 但以手로 指曰 住住어다 休妄想休妄想하라 又曰待汝說底許多妄想이 絶時에 汝自到寤寐恒一處也리라 初聞코 亦未之信하야 每日我自顧하되 寤與寐가 分明作兩段이어늘 如何敢大開口하야 說禪고 佛說寤寐恒一이 是妄語則我此病을 不須除어니와 佛語果不欺人이면 乃是自我未了로다 後聞薰 風이 自南來하야 忽然去却碍膺之物하고 方知夢時便是寤時底요 寤時便是夢時底니 佛言寤寐恒一을 方始自知라 這般道理는 拈出人不得하며 呈似人不得하되 如夢中境界하여 取不得捨不得이니라. (①『大慧語錄』 29, 『大正藏』 47, p.936a)
* ①대혜가 원오에게 “스스로 생각하니 이 몸이 있어도 다만 잠잘 때에는 주재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수·화·풍이 흩어져[죽음에 이르러] 수많은 고통이 불길처럼 타오르면 어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바뀌지[윤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원오는 다만 손가락으로 “멈추고 멈추어라. 그릇된 생각을 쉬어라! 그릇된 생각을 쉬어라!”고만 말했다. 원오는 또 “그대가 말한 수많은 그릇된 생각이 끊어질 때 그대 스스로 자나 깨나 화두가 똑같이 들리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고 했다.
(대혜는) 처음 듣고는 믿지 않았다. 매일 나 자신(대혜)은 ‘깨어 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거늘 어떻게 감이 입을 열어 선禪을 말한다 말인가! 자나 깨나 똑같이 화두가 들린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그릇된 말이라면 이 병을 제거할 필요가 없지만, 만약 부처님 말씀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고 생각했다.
후일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온다.’는 말을 듣자 홀연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물건이 완전히 사라지고 비로소 꿈꾸는 시간이 깨어 있는 시간이고 깨어 있는 시간이 꿈꾸는 시간과 같음을 알았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매항일을 그제야 스스로 알았다. 이런 이치는 손으로 끄집어낼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다. 마치 꿈속의 경치를 잡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과 같다.
【평석】 오매항일寤寐恒一은 수몽중睡夢中과 숙면시熟眠時의 양종兩種이 있는데, 몽중위夢中位는 제6의식의 영역이니 교가敎家의 7지七地에 해당하고, 숙면위熟眠位는 제8리야第八梨耶의 미세에 주착住著한 8지 이상의 자재보살들과 이야미세梨耶微細를 영리永離한 불지佛地의 진여항일眞如恒一이니, 지금 대혜大慧가 말한 바는 몽중일여夢中一如이다. 대개 오매일여를 불신하는 것은 대혜大慧만의 병통이 아니요 수도인의 고금통병古今通病이다. 일지반해一知半解의 사견邪見으로써 오매일여의 실경實境을 부정하고 감히 대개구설선大開口說禪하니 참으로 통탄할 바이다. 대혜가 만일 담당湛堂・원오圜悟 같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만나서 회심回心하지 않았다면, 후일의 대성大成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대혜가 오매일여를 실지로 체득하고는 “불언오매항일佛言寤寐恒一이 시진어是眞語며 불망어不妄語”라고 찬탄하며 그 은혜는 “분골쇄신미족수粉骨碎身未足酬”라고 감격하였다. 수도인은 각자의 사견私見을 고집하지 말고, 고불고조의 언교言敎를 표준삼아 구경무심지를 실증實證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생사대사生死大事도 해결하지 못하며 불조의 혜명은 영원히 단절될 것이다.
* 자나 깨나 똑같이 화두가 들리는 오매항일에는 꿈꿀 때의 한결같음과 깊이 잠든 때의 한결같음 등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꿈속의 오매항일은 제6 의식의 영역이니 교가의 제7지에 해당된다. 깊이 잠든 때의 오매항일에는 제8 아뢰야식을 끊어내지 못한 제8지 이상의 자재 보살들의 오매항일과 아뢰야식을 완전히 끊어낸 부처님의 오매항일 등 두 가지가 있다. 지금 대혜가 말한 것은 꿈속의 오매항일이다. 대개 오매일여를 믿지 않는 것은 대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옛날과 지금에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러했다. 조금 아는 삿된 견해로 오매일여의 경지가 있음을 부정하고 함부로 입을 크게 열어 선禪을 안다고 말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젊은 대혜’가 만일 담당문준이나 원오극근과 같은 ‘눈 밝은 뛰어난 스승[明眼宗師]’들을 만나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원숙한 경지에 이른 ‘뒷날의 대혜’는 없었을 것이다. 대혜가 오매일여를 실지로 체득한 뒤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매항일은 진실한 말이며 거짓말이 아니다.”고 찬탄하고 “몸을 나누고 뼈를 부수어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고 감격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견해를 고집하지 말고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표준삼아 ‘그릇된 생각이 없는 궁극의 경지[究竟無心地]’를 실지로 증득해야 한다. 증득하지 못하면 자기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부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의 명맥도 단절되고 만다.
【강설】 안하무인격으로 천하를 횡행하다가 “오매에 일여하지 못한 지견은 한낱 병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깊이 참회한 대혜 스님은 담당 스님 회하에 머물며 공부하였다. 허나 숙연이 깊지 못한 탓이었던지 담당 스님께서 병환이 깊어 돌아가실 지경이 되었다. 잘못된 선지식과 그릇된 지견에 속았다가 겨우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분마저 돌아가시게 생겼으니 이젠 의지할 곳이 없게 된 형국이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담당 스님께 “스님께서 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저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때 담당 스님께서 “원오 스님이 좋을 것이다.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대가 만일 그를 만난다면 반드시 생사대사를 깨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일러주셨다. 대혜가 스스로 생각하길 “만일 원오 스님이 나를 인정한다면 그 또한 내 병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릇된 선지식이니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다시는 선을 닦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허나 원오를 만난 대혜는 인정을 받기는커녕 절벽에 부딪친 듯 도저히 접근할 방법이 없고 무쇠소 위에 앉은 모기처럼 주둥이를 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원오 스님을 실험하고 무게를 달아보려던 마음을 접고 마음속 깊은 곳의 속내를 드러내 오매에 일여하지 못한 자신의 병통을 원오 스님께 여쭌 것이다. 허나 원오 스님은 손을 내저으며 언하言下에 부정하고 다시는 입도 떼지 못하게 막으셨다. 그리곤 망상을 곧장 쉬라고만 일러주셨다.
그러나 대혜는 그 말씀도 바로 믿질 못했다. 도리어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오매에 일여해야 올바른 깨달음이라 했는데 만일 그 오매일여가 사실이라면 나를 고쳐야겠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부처님 말씀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의심하였다. 이처럼 오매일여를 믿지 않고 들뜬 견해를 놓지 못하는 것은 대혜 스님만의 병통이 아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참선을 하다가 이런 병을 얻은 이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공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어 만나보면 그저 망상에 휩싸인 사람들일뿐이다. 그래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라고 일러주면 ‘네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덤벼든다. 하는 수 없이 오매寤寐에 일여一如하지 못하면 그것은 깨달음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병이 생긴 것이라고 차근차근 일러주지만 대개 한 번 부린 오기를 도무지 거두려 들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공부를 해보니 일여한 경계를 차츰차츰 맛보게 되는데 오매일여는 도저히 되질 않습니다. 그거 혹시 스님만의 주장은 아닙니까?” 아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깨치고 지견이 하늘을 찌른다 해도 오매일여가 되지 않으면 망상이란 것은 고불고조께서 말씀하신 종문의 철칙이다. 이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종문의 위인인 원오와 대혜 스님을 거울삼아 스스로의 병을 진단하고 반드시 고쳐야 한다.
【8-4】 ①묘희(妙喜, 대혜大慧)는 일생동안 자긍自肯하지 않고, 만년晩年에 천근(川勤, 원오圜悟)의 조실祖室에 입참入參하여 곧 화엄7지華嚴七地에 승진昇進하였다. ①妙喜는 一生을 不自肯하고 晩登川勤之室하야 直階華嚴七地하니라. (①『大明高僧傳』6, 『大正藏』50, p.923b)
* ①대혜는 일생동안 인정하지 않다가 원오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곧바로 화엄 7지의 경지에 올라섰다.
【평석】 화엄7지 보살의 성위聖位가 고원난도高遠難到한 것 같지마는, 누구든지 몽중夢中에 일여一如하면 7지위七地位이다. 그러나 숙면일여熟眠一如인 멸진정滅盡定의 자재위自在位는 아니어서 여기에 아직 일대중관一大重關이 있으니 노력하여 기필코 투과透過하여야 한다.
* 화엄 7지 보살의 ‘성스러운 경지[聖地]’가 높고 멀어 도달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누구든지 꿈속에서도 화두가 평시와 똑같이 들리면 제7지의 지위地位이다. 그러나 깊은 잠속에서도 화두가 들리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의 마음작용이 모두 없어진 멸진정滅盡定의 자재위(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아직 또 하나의 어려운 관문이 있으니 노력하여 기필코 뚫고 지나가야 한다.
【강설】 몽중일여가 되면 화엄7지 보살이라 하는데 초지만 해도 그 경지가 굉장하니 7지라면 까마득히 높은 경지라 하겠다. 허나 몽중일여가 되는 7지에 이르렀다 하여도 거기가 끝이 아니다. 깊은 잠이 들어서는 다시 캄캄하니 그것을 궁극이라 할 수는 없다.
【8-5】 ①상음想陰이 멸진滅盡한 자는 시인是人이 평상시에 몽상夢想이 소멸하여 오매寤寐에 항일恒一하여, 각명覺明이 공허 하고 적정하여 허공과 같아서 다시는 추중麤重한 전진망상前塵妄想의 영사影事는 없다. ①想陰이 盡者는 是人이 平常에 夢想이 消滅하야 寤寐恒一하야 覺明이 虛靜하야 猶如虛空하야 無復麤重前塵影事니라. (①『楞嚴經』10, 『大正藏』19, p.151bc)
* ①옳음[是]과 그름[非], 바름[正]과 삿됨[邪] 등을 불필요할 정도로 분별하는 인식작용[想, perception]이 모두 사라진 사람은 평상시에 꿈에 대한 생각이 사라져 자나 깨나 똑같고, 밝은 지각작용은 텅 비고 고요해 마치 허공과 같아, 거칠고 무거운 망상을 대상으로 삼아 반추하는 일이 다시는 없다.
【평석】 제6 의식의 추중망상麤重妄想은 소멸해도 제8의 미세망상이 상존尙存하니 오매항일寤寐恒一은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에 다 통한다. 그리하여 몽중일여는 7지, 숙면일여는 8지 이상에 해당한다.
* 제6 의식에 연관되어 일어나는 ‘거칠고 무거운 그릇된 생각[麤重妄想]’은 소멸해도 제8 아뢰야식에 내포된 미세한 망상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꿈속에서 이뤄지는 자나 깨나 똑같은 경지[夢中一如]’와 ‘깊은 잠 속에서 진행되는 자나 깨나 똑같은 경지[熟眠一如]’에 다 통한다. 그리하여 몽중일여는 제7지, 숙면일여는 제8지 이상에 해당한다.
【8-6】 ①보살이 차제7지此第七地에 주住하면 방편혜方便慧와 수승도殊勝道를 수습修習하여 안주부동安住不動하여 일념도 휴식하여 폐사廢捨하지 않나니, 행주좌와行住坐臥와 내지 수몽중睡夢中에서도 잠시라도 개장(盖障)과 상응하지 않느니라. ①菩薩이 住此第七地하야 修習方便慧와 殊勝道하야 安住不動하야 無有一念도 休息廢捨하나니 行住坐臥와 乃至睡夢中에도 未曾與盖障으로 相應하느니라. (①『華嚴經』37 「十地品」, 『大正藏』10, p.196b)
* ①보살이 제7지에 머물러 방편의 지혜와 뛰어난 가르침을 닦고 익히면 대상이나 번뇌에 휘둘리지 않고 편안하게 머문다. 한 생각도 쉬거나 버림이 없고, 행동하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모든 행동과 심지어 잠자는 중에도 번뇌에 덮이거나 장애에 연결되지 않는다.
【평석】 제7지의 무상정無想定에서는 추중망상麤重妄想이 습복習伏되어, 몽중夢中에서도 여여如如하여 어떤 장애도 받지 않는다.
* 제7지에서 성취되는, 마음의 모든 활동작용이 쉬는 선정인 무상정에 들면 거칠고 무거운 그릇된 생각들이 제어되고[習伏], 꿈속에서도 평상시처럼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여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는다.
【8-7】 ①보살이 제7지에서는, 행주좌와와 내지 수몽중睡夢中에서도 모든 장개障盖를 원리遠離한다. ①菩薩이 第七地에 行住坐臥와 乃至睡夢에도 遠離障盖니라. (①『十地經』5, 『大正藏』10, p.556b)
* ①보살이 제7지에 이르면 행동하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모든 행동과 심지어 잠자는 중에도 번뇌에 덮이지 않고 장애에서 벗어난다.
【평석】 장개障盖는 번뇌·망상으로 발생하는 수도修道 상의 장애이다. 보살이 제7지에서 비로소 몽중夢中에 일여一如하니 수도인이 몽중일여만 되면 제7지와 동등하다.
【강설】 공부를 해 나아감에 있어 작은 지견만 생겨도 아만이 하늘을 찔러 구경에 이른 듯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럴 때 몽중에도 일여一如한지를 스스로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이것이 화엄 제7지에 들었는지 들지 못했는지를 재는 척도이니,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 할 수 없다. 이는 제불조사들께서 한 목소리로 주창하신 바이다. 인용문에서 밝혔듯 원오 스님과 대혜 스님을 비롯한 역대 대조사 스님들 역시 이 문을 통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공부하다가 지견이 좀 생기면 고불고조를 뒷간 휴지쯤으로 취급하며 아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허나 말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 있겠는가? “출중한 변재와 지혜를 갖췄던 원오나 대혜도 오매일여에 미치지 못함이 병이라 했는데 네가 안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일러주지만 대부분 내 말을 긍정치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중엔 돌아서며 욕을 퍼붓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날 욕하고 부정하더라도 심하게 아파보면 그땐 내 생각이 나리라. 설령 그 지견이 하늘을 가리고 대지를 덮을 만큼 대단하고, 그 말솜씨가 천하 선지식을 꼼짝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원오나 대혜 스님 같은 이들의 예를 거울삼아 스스로 돌이켜보아야 한다. 만일 몽중일여에 이르지 못했다면 깊이 참회하고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병인 줄 모르는 것이 큰일이지 병인 줄 알면 살아날 방도가 생기니 다행한 일이다.
몽중일여 숙면일여라 하면 까마득히 먼 경지로 생각할 수 있다. 허나 고불고조와 다름없는 장부의 몸을 타고 났으니 노력하지 않는 것이 장애일 뿐 지극한 마음으로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 성취 여부는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다. 잘 것 다 자고 놀 것 다 놀면서 공부가 되느니 안 되느니 그런 소리를 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공부해서는 억천만겁이 지난다 해도 가망이 없다. 옛 스님들도 늘 하신 말씀이다. “죄 중에 사람을 죽이는 죄가 가장 크지만 공부니 수도니 한답시고 허송세월하는 놈이 있으면 그런 놈은 하루에 만 명을 때려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할 일이다.
【8-8】 ①무상천無想天과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과 수면睡眠과 민절悶絶의 차此 오위五位 중에, 이생異生인 범부는 4위四位를 다 구유하니 멸진정을 제외함이요, 성위聖位에서는 후後의 3위三位만 있다. 그 중에 여래와 자재보살들은 오직 멸진정 1위一位만 있으니 수면과 민절이 없는 연고이다. ②무심의 5위중에 이생異生에 4위가 있다 함은 멸진정을 제외한 것이요, 성중聖衆은 오직 후後의 3위三位뿐이며, 불과 8지 이후의 자재보살은 유독 멸진정만 있어서 수면과 민절이 없나니, 이 2종二種은 악법이므로 현상現狀으로는 수면하는 것 같아도 실질로는 없는 연고요, 즉 2승二乘의 무학無學들도 또한 민절이 있느니라. ①無想天과 無想定과 滅盡定과 睡眠과 悶絶의 此五位中에 異生은 有四하니 除在滅定이요 聖唯後三이라 於中에 如來及自在菩薩은 唯得一이니 無睡悶故니라. ②無心五位中에 異生이 有四等者는 除滅盡定이요 聖唯後三이며 佛及八地已去菩薩은 唯得有一滅定하야 無睡眠悶絶이니 二以惡法故로 現似有睡나 實無有故요 卽二乘無學도 亦有悶絶也니라. (①『成唯識論』7, 大正藏31, p.38b. ②『宗鏡錄』55, 大正藏48, p.736a)
* ①무상천[무상정無想定을 닦으면 무상천에 태어난다], 무상정[제6식과 그 심소를 소멸시킨 선정], 멸진정[수受와 상想 및 그 심소의 활동을 소멸시킨 선정], 수면, 혼미[昏迷, 기절한 경우 등을 말함] 등 다섯 가지 상태 가운데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다른 곳에 태어나는[異生] 범부凡夫 단계에서는 멸진정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상태가 있다. 성자[제1지-제7지] 단계에서는 멸진정, 수면, 혼미 등 세 가지 상태만 있다. 부처님과 제8지 이상의 보살 단계에서는 오직 멸진정 상태만 있다. ②무심오위 가운데 이생異生인 범부 단계에서는 멸진정을 제외한 네 가지 상태가 있으며, 성자 단계에서는 멸진정, 수면, 혼미 등 세 가지 상태가 있다. 부처님과 제8지 이상의 보살 단계에서는 오직 멸진정만 있으며 수면과 혼미 상태는 없다. 수면과 혼미는 나쁜 것이기에 있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없기 때문이다. 성문과 연각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도 혼미 상태는 있다.
【평석】 여기에서 무심이라 함은 여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가무심假無心을 말한 것이다. 자재 보살(주8)과 여래를 멸진정滅盡定이라 하였는데, 자재 보살의 멸정滅定은 제6의식, 즉 6추만 소멸된 가무심假無心이요 여래의 멸정滅定은 제8식, 즉 3세까지 소멸한 진무심眞無心이다. 수면睡眠과 민절悶絶이 없음은 오매가 일여함을 말함이니, 자재 보살은 제8의 무기무심無記無心에서 일여하고, 여래는 진여의 구경무심에서 일여一如한 바 진정한 일여는 불지佛地의 구경무심뿐이다.
【8-9】 ①점점漸漸하여 공부가 오매가 일여한 시時에 도달하거든, 다만 심중心中에 화두를 이각망실離却忘失하여서는 안 된다. 참구하여 정망情忘하고 심절心絶한 심처深處에 도달하면, 금오金烏가 야반夜半에 철천徹天하여 고비高飛하리니, 그때에 비희심悲喜心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본색정안本色正眼을 왕참往參하여 영영永永히 의심을 결단하라. ①漸到寤寐一如時에 只要話頭心不離라 疑到情忘心絶處하면 金烏夜半에 徹天飛리니 於時에 莫生悲喜心하고 須參本色永決疑어다. (①『太古集』, 『韓國佛敎全書』6, p.681c)
* ①조금씩 자나 깨나 똑같은 상태에 도달하거든 다만 마음에 화두를 잊어서는 안 된다. 참구하여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마음을 잊고 마음 작용이 사라진 경계에 도달하면 금 까마귀가 한 밤중에 하늘을 뚫고 높이 날 것이니 그 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모름지기 ‘밝은 눈을 가진 참다운 스승[本色正眼]’을 찾아 영원히 의심을 끊어라.
【평석】 이 오매일여는 여래의 진여일여眞如一如를 제외한 것이다. 오매가 일여한 후에 요철了徹하여 무여無餘하면 자성을 통견洞見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기에 따라서 혹 미철未徹함이 있을 수 있으니, 정안종사를 기필코 왕참往參하여 인증印證을 받아야 참으로 의심을 놓는 것이다. 태고 화상太古和尙(주9)은 20년간 각고참구刻苦參究하여 37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38세에 대오하여, 중국의 석옥 선사石屋禪師를 참알參謁하여 인가印可를 받고 임제정맥臨濟正脈을 계승하였다.
* 이 오매일여는 여래의 진여일여를 제외한 것이다. 오매가 일여한 후에 철저하게 깨달아[了徹] 남은 것이 없으면[無餘]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한 것이다. 그러나 근기에 따라 철저하지 못함이 있을 수 있으니, 눈 밝은 참다운 스승을 찾아가 점검과 확인을 받아야 참으로 의심을 놓는 것이다. 태고 스님은 20년간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몸과 마음을 다해 화두를 참구해[刻苦參究] 37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38세에 크게 깨달았다. 중국의 석옥 선사를 찾아 가[參謁] 인가를 받고 임제종의 올바른 맥을 이었다.
【강설】 태고 스님은 발심한 후 20여 년을 한 결 같이 공부에 매진해 37세에 오매일여의 경지에 이르고 다음 해에 크게 깨쳤다. 그래서 태고라는 이름도 스스로 지었다. 스스로는 의심이 없었지만 명안조사를 찾아 인증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청공石屋淸珙 선사를 찾아갔다. 석옥 스님은 설암조흠雪巖祖欽 선사의 법을 이은 급암종신及庵宗信 선사의 제자로 당시 인천의 안목으로 추앙받던 분이었다. 그분으로부터 의심의 여지없이 확철대오하였음을 인정받았다. 그러니 태고 스님도 오매일여를 거쳐 대오하고 인가받았던 것이다. 철저히 깨쳤더라도 오매일여가 되는지 점검해야 하며, 또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정안종사를 찾아가 점검받는 것이 우리 종문의 철칙이다.
【8-10】 ①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간단間斷 없으며 오매에 항상 일여함에 이르러 저촉抵觸하여도 산거散去하지 않고 탕탕蕩蕩히 망실亡失되지도 않는다. 구자狗子가 극열極熱한 유당油鐺을 봄과 같아서 핥으려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당한고? ①工夫가 旣到動靜無間하며 寤寐恒一하야 觸不散蕩不失하야 如狗子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時에 作麽生合殺오. (①『懶翁集』, 『韓國佛敎全書』6, p.722c)
* ①공부가 이미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끊어지지 않고 점점 무르익어 자나 깨나 똑같이 화두가 들리는 경지에 이르면 대상에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고 물결이 걸림 없이 흘러가듯 없어지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개가 매우 뜨거운 기름 솥을 보는 것처럼 핥으려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적절한가?
【평석】 나옹懶翁이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을 작성하여 수도의 지침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그 제6절목第六節目이다. 그리하여 참선오도參禪悟道에는 오매일여의 통과를 필수조건으로 삼는다. 만일에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오도가 아니다. 10지·등각을 초과超過한 구경각인 무심을 철증徹證하여 진정한 오매일여에서 영겁불매永劫不昧하여야 견성이며, 이 대무심지大無心地를 보임하는 것이 오후이천悟後履踐임은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철칙이다. 그러면 구경무심을 실증實證한 종사가 그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몽중일여가 되면 벌써 화엄7지며 숙면일여가 되면 8지 이상이다. 선문의 정안종사치고 이 오매일여의 현관玄關을 투과透過하지 않고 견성이라고 한 바는 없으며,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개오開悟하였으니 구경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여전무수如前無殊하여 추중망식麤重妄識도 미탈未脫한 해오解悟는 견성이 아니며 돈오가 아니므로 이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 나옹 스님이 『공부실절목』을 작성하여 수도의 지침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그 제6절목이다. 그리하여 선정을 닦아 깨달음을 증득하는 데에는 오매일여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만일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아니며 깨달음도 아니다. 제10지 보살과 등각 보살의 경지를 뛰어넘어, 궁극의 깨달음인 그릇된 생각이 생기지 않는 무심의 경지를 철저하게 증득한 오매일여에서 ‘영원히 다시 어두워지지 않아야[永劫不昧]’ 비로소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見性]’이다. 그릇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크나큰 무심의 경지를 보임하는 것이 깨달음 이후의 실행임은 부처님과 조사들이 올바르게 전한 변함없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궁극의 깨달음인 그릇된 생각이 생기지 않는 무심의 경지를 참으로 증득한 수행자가 얼마나 있을까?’하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몽중일여가 되면 벌써 화엄7지며 숙면일여가 되면 제8지 이상이다. 밝은 눈을 가진 선문의 올바른 스승들치고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고 한 사람은 없으며, 제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깨달았으니 궁극의 깨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밖에서 들어온 먼지 같은 번뇌[客塵煩惱]’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거칠고 무거운 그릇된 생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未脫] 알음알이[解悟]는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아니며 몰록 깨침이 아니므로 이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강설】 나옹 스님은 태고 스님과 동시대의 인물로 태고 스님보다는 연배가 낮다. 나옹 스님은 『십절목』에서 열 번째도 아닌 여섯 번째에 오매일여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으니 공부에 있어 오매일여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은 고금의 통견이다. 그러니 객진번뇌가 전과 다름없고 거친 망식도 벗어나지 못한 해오는 견성도 아니고 돈오도 아니다. 견성은 오매일여라는 대무심지에서 크게 깨치는 것이니 오매일여가 되지 않고 견성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매일여를 넘어선 구경각이라야 견성이라고 일러주면 많은 이들이 “스님이 말씀하시는 견성은 하늘의 별처럼 아득해 감히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허나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천하 선지식들이 증명하였듯 오매일여를 거쳐 성취한 대각이 아니면 견성이 아님이 명백한데 그것을 어떻게 달콤한 거짓말로 가릴 수 있겠는가? 양심을 속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반드시 오매일여가 된 뒤에 크게 깨쳐야 한다.
주)_
1) 법명은 종고(宗杲, 1088-1163), 자는 대혜大慧, 법호는 불일佛日·묘희妙喜, 시호는 보각 선사普覺禪師. 담당준湛堂準을 참례하고 시자가 되었으며 후에 원오圜悟의 법을 잇고 분좌설법分座說法함.
2) ‘염고’는 옛 사람의 말을 가져다 자기의 소견을 덧붙여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 ‘송고’는 불조佛祖들이 문답 상량商量한 고칙古則을 게송으로 해석한 것.
3) ‘소참’에서 ‘참參’은 대중에게 설법하는 것. 정식으로 하는 설법을 대참大參,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하는 설법을 소참小參이라고 함. ‘보설’은 널리 정법을 설시說示한다는 뜻으로 수행자에게 널리 가르침을 설하는 것. 상당上堂과는 달리 필요에 따라 수시로 행하는 약식 설법으로 법의法衣를 착용하지 않음.
4) 법명은 극문(克文, 1025-1102), 호는 늑담泐潭·진정眞淨·보봉寶峰. 황룡혜남黃龍慧南 선사의 법을 잇고 동산洞山에서 종풍을 선양.
5) 법명은 법연(法演, ?-1104). 35세에 출가해 성도成都에서 유식·백법百法 등 여러 논論을 배움. 교문敎門에 의혹을 일으켜 원조圓照와 부산법원浮山法遠을 참례하고 후에 백운수단白雲守端을 스승으로 섬겨 대오하고 법을 이음. 사면산과 오조산五祖山에서 교화를 폄. 문하에 삼불三佛, 즉 극근克勤·혜근慧懃·청원淸遠 등이 있음.
6) 법명은 혜근(慧懃, ?-1117), 자는 불감佛鑑. 오조법연五祖法演 회하에서 오랫동안 참선하다가 인가받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제일좌第一座가 되고 법을 이었다.
7) 얼음이 녹고 기와가 부서져 흩어짐. 의문이나 식견 등이 일시에 무너짐을 비유함.
8) 물러섬과 나아감에 걸림이 없으며, 번뇌의 계박에서 벗어나 무애를 통달한 보살. 제8지 이상의 보살을 말한다.
9) 법명은 보우(普愚, 1301-1382), 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 국사圓證國師,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 1337년(충숙왕 6)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다가 다음 해 정월에 크게 깨달았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으로 가 호주 하무산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동국東國 임제종의 초조初祖가 됐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