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선문정로]
죽은 자리에서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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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13:29 / 조회7,761회 / 댓글0건본문
쉽게 읽는 『선문정로』 9 | 사중득활死中得活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인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9-1】은 제9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9-1】 ①여금如今의 수도인은 다수가 심신이 적멸寂滅하고 전후제前後際가 단절함을 체득하여 휴거休去하고 헐거歇去하여 일념이 만년거萬年去로 문득 구경을 삼는다. 그러나 도리어 이 승묘勝妙한 경계가 자심自心을 장폐障蔽함을 입어서 자기의 정지견正知見이 현전하지 못하며 신통광명神通光明이 발로發露하지 못한다. ①如今人은 多是得箇身心이 寂滅하고 前後際斷하야 休去歇去하야 一念萬年去로 便爲究竟이나 殊不知却被此勝妙境界가 障蔽自己하야 自己正知見이 不能現前하며 神通光明이 不能發露니라. (①眞淨文, 『古尊宿語錄』 44, 『卍續藏經』118, p.745a)
* ①요즈음 많은 수행자들은 몸과 마음이 고요하게 소멸되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고, 쉬고 또 쉬며 한 생각이 만 년이 되는 경지를 궁극의 경계로 여긴다. 그러나 이 ‘뛰어난 경계[勝妙境界]’가 오히려 자기 마음을 덮고, 자신의 올바른 견해를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신통한 광명 같은 경지를 나타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을 모른다.
【평석】 심신이 적멸하여 일념불생一念不生하고 전후제단前後際斷한 승묘경계勝妙境界도 정오正悟가 아니어늘, 염기염멸念起念滅하여 일념불생一念不生도 못된 자는 말할 것도 없다.
* 몸과 마음이 고요하게 소멸되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뛰어난 경계도 올바른 깨침이 아니거늘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등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계[一念不生]’도 체득하지 못한 자는 말할 것도 없다.
【강설】 신심身心이 적멸하고 일체망상이 다 끊어져 오매에 일여하고 영겁에 불매不昧한 대무심지, 이런 훌륭하고 오묘한 경계도 오히려 바로 깨친 것이 아닌데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망상이 여전하고도 지견과 아만만 치성해 깨쳤다고 자신하는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라.
【9-2】 ①휴거헐거休去歇去하며 일념이 만년萬年이며 전후제단前後際斷하니, 제방諸方에 기개幾箇나 이 심심深深한 전지田地에 도달하였는가. 진정眞淨이 이를 도리어 승묘경계勝妙境界라고 부르니, 구시舊時에 보봉寶峰의 광도자廣道者가 참으로 이러한 사람이다. 자기의 혼신渾身을 전연 망각하며 세간사世間事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세간의 진로塵勞가 그를 매각昧却하지 못한다. 비록 그러하나 도리어 이 승묘경계勝妙境界에 떨어져 도안道眼을 장각障却하니, 참으로 일념불생一念不生하고 전후제단前後際斷한 승묘경계勝妙境界에 도달하여 정正히 대존숙大尊宿을 참현參見하여야 함을 알아라. ①休去歇去하여 一念萬年이며 前後際斷하니 諸方에 有幾箇가 到這般田地오 他却喚作勝妙境界하니 舊時에 寶峰廣道者가 便是這般人이라 一箇渾身을 都不理解하며 不見有世間事하고 世間塵勞가 昧他不得이라 雖然恁麽나 却被勝妙境界하야 障却道眼하니 須知一念不生前後際斷處하야 正要見尊宿이니라. (①五祖演, 『大慧錄』 17, 『大正藏』47, p.882b)
* ①쉬고 또 쉬며 한 생각이 만년이 되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끊어진 사람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깊고 깊은 마음의 경계에 도달했겠는가? 진정이 오히려 이 뛰어난 경계를 말하니 옛날 가르침을 널리 펴던 그 분이 바로 이런 경계에 도달한 사람이다. 자신을 완전히 잊어 세상의 일들을 보지 않으니 세간의 번지 같은 번뇌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비록 그러해도 뛰어난 경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눈을 덮어 버린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경계에 도달했을 때 마땅히 선지식을 찾아야 됨을 알아라.
【평석】 일념불생一念不生 전후제단前後際斷을 규봉圭峰은 돈오돈수라 하여 찬탄불이讚歎不已하였다. 그러나 정전正傳의 존숙尊宿들은 이를 승묘경계勝妙境界라 하여 배제하였으니 그 심천과 우열을 가히 알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서는 난득難得의 승묘경계勝妙境界도 정안을 장폐障蔽하는 대병大病이니 정안지식正眼知識을 참현參見하여 확연철오廓然徹悟하여 심신이 적멸한 이 사지死地에서 대활大活하지 않으면 정오正悟가 아니다.
*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것’을 규봉은 돈오돈수라 하여 매우 찬탄했다. 그러나 선문禪門의 올바른 가르침을 이은 선지식들은 이를 ‘뛰어난 경계[勝妙境界]’라 하면서도 배제했으니 그 깊고 얕음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얻기 어려운 뛰어난 경계도 올바른 눈을 가리는 크나큰 병이니 올바른 눈을 가진 선지식들은 찾아 물어 확실하게 깨달아 몸과 마음이 소멸되듯이 고요한 이 죽음의 경지에서 크게 살아나지 않으면 올바른 깨침이 아니다.
【강설】 한 생각이 만 년을 가고 영겁에 어둡지 않은 대무심지라도 진여의 경계 즉 바른 깨달음은 아니다. 오매일여를 체득한 8지 이상 대자재 보살의 무심경계가 승묘한 경지이긴 하나 그곳에 주저앉으면 병이 된다. 반드시 적멸의 경계를 떨치고 일어나 크게 깨달아야 한다. 마조도일 선사 이후로 선지식을 가장 많이 배출한 분이 황룡혜남黃龍慧南 선사인데 진정극문眞淨克文 선사는 바로 황룡혜남 선사의 후손이다. 오조법연 선사는 그 많은 황룡의 후손 가운데 오직 회당晦堂과 진정眞淨 두 분만 긍정하였다 하니 진정극문 선사의 도와 덕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황룡혜남과 양기방회楊岐方會는 석상초원石霜楚圓 선사의 제자로 같은 법형제이며, 진정극문 선사는 황룡의 제자이고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는 양기의 법을 이은 백운수단白雲守端 선사의 제자이다. 그러나 황룡파 회당 스님은 누구든지 참답게 공부하려면 법연을 찾아가라고 천거했고, 양기파 오조 스님 역시 당대 제일가는 인천의 안목으로 진정과 회당 스님을 손꼽았다. 이처럼 바로 깨친 자라야 바로 깨친 이를 알아보는 법이며 여기에 집안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는 인정은 끼어들 틈이 없다.
진정극문 선사의 회하에 있던 어느 수좌가 오조법연 선사에게 찾아오자 법연 스님이 진정 스님의 법문을 물었다. 이에 “쉬고 또 쉬며 한 생각이 만 년이며 앞뒤 경계가 끊어진다.”는 진정 스님의 법문을 전하였다. 듣고 보니, 아무리 크게 깨치고 능숙한 법문으로 대선지식이라 불린다 해도 오매일여의 대무심지를 거치지 않았다면 견성이 아니라는 당신의 깨달음과 꼭 일치하였다. 거짓 선지식이 판치는 세상에 이런 바른 선지식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워 제자 원오를 급히 불렀고, 발을 씻고 있던 원오는 물기도 채 가시지 못한 채 달려왔다. 이에 오조 스님이 진정 스님의 말씀을 거론하며 오매일여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님을 위와 같이 밝혔던 것이다.
엘투디자인 이겸미 작.
이와 같이 선가에 5가7종의 분분함이 있었지만 오매일여의 대무심지를 거쳐 대각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동일하였다. 또한 이런 대무심지에도 머물러선 안 된다고 하셨다. 만일 승묘한 경계인 대무심지를 구경이라 여겨 주저앉아버린다면 그를 죽은 사람이라 한다. 반드시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야만 진여를 체득한 대자유인, 참 사람,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이를 사중득활死中得活이라 한다. 오매일여가 되기도 어려우니 그리 된 자가 있다면 참으로 장한 일이다. 그렇긴 하나 그런 자가 찾아온다면 우리 종문에선 곧바로 호통을 쳐 쫓아버리니 장하긴 하나 그 승묘경계가 도리어 병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완전히 깨친 구경각의 입장에서 보면 오매일여를 넘어 다시 크게 깨친 것이 제대로 눈을 뜬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10지·등각 보살이라 하더라도 봉사나 진배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학자들이야 초지 보살의 경계도 높이 바라보며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우리 종문에선 10지·등각 대보살의 경계라 하더라도 호통을 치고 부정하는 것이다.
【9-3】 ①달마達磨가 말했다. 외경外境의 제연諸緣을 돈식頓息하고, 내심內心이 적연무천寂然無喘하여 심경心境이 장벽墻壁과 같아야만 가히 대도大道에 정입正入하느니라. 일념도 불생하고 전후제前後際가 홀단忽斷하여 진로塵勞가 돈연頓然히 식멸息滅하고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단제斷除하여 종일토록 전혀 분별이 없어서 이소목조泥塑木彫와 흡사하니, 그러므로 장벽墻壁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이 경계가 현전하면 정오正悟의 도가소식到家消息이 결정코 불원不遠하다. ①達磨云하되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하야사 可以入道니라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야 塵勞頓息하고 昏散을 勦除하야 終日獃憃憃地하야 恰似箇泥塑木彫底하나니 故로 謂墻壁으로 無殊라 하니라 到這境界現前하면 卽到家消息이 決定去地不遠이니라. (①『高峰妙』, 『卍續藏經』122, p.706b)
* ①달마가 말했다. 밖으로 경계 등 모든 인연을 일시에 끊고, 안으로 마음이 고요해 아무런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의 경지가 마치 벽과 같아야만, 크나큰 가르침에 올바르게 들어갈 수 있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홀연 끊어져 번뇌가 몰록 소멸하고, 가라앉는 마음과 이리 저리 떠다니는 마음을 완전히 끊어 종일토록 분별이 없어 진흙으로 만든 소상塑像과 나무로 새긴 조각과 흡사하므로 장벽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 경계가 나타나면 멀지 않아 올바른 깨침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확실히 올 것이다.
【평석】 외경과 내심을 적연식멸寂然息滅하여 장벽이나 목석과 같은 무심경계가 되어야만 대도에 오입悟入한다.
* 바깥의 경계와 안의 마음이 소멸되어 장벽이나 돌·나무 같이 고요하고 분별없는 마음의 경계에 이르러야만 크나큰 가르침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강설】 목석과 같은 대무심 경계에 도달해야 대도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바깥으로 경계에 끌리고 안으로 망상과 혼침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런 이는 절대 대도에 깨달아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우리 선종의 생명선이다. 황벽 스님이 『전심법요』에서 자주 거론했듯 백장 스님도 늘 “목석같은 무심이 되어야지 무심이 되지 않으면 절대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무심도 미세한 망상이 남아 있는 제8 아뢰야식의 무기무심無記無心이 아닌 진여의 참 무심이 되어야 한다.
【9-4】 ①만약에 일념불생하면 전후제단前後際斷하여 조체照體가 독립하며 물아物我가 일여하여 곧 심원心源에 도달하여 무지무득無知無得하고 불취불사不取不捨하며 무대무수無對無修니라. ①若一念不生하면 則前後際斷하야 照體獨立하야 物我一如하야 直造心源하야 無知無得하고 不取不捨하며 無對無修니라. (①「澄觀心要」, 『傳燈錄』 30, 『大正藏』51, p.459b)
* ①만약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 본원을 관조함이 스스로 이뤄지고 주관과 객관이 하나 되면 마음의 근원에 곧바로 도달해 알음알이도 얻음도 없고, 취함도 버림도 없고, 경계도 닦음도 없게 된다.
【평석】 만념萬念이 구적俱寂하면 진여자성을 철증徹證케 되나니, 즉 견성이며 돈오이며 성불이다.
* 모든 생각이 소멸되면 참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증득하나니, 이것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며 깨달음이다.
【강설】 자나 깨나 한결같은 대大무심 경계라야 올바르게 진여의 자성을 본다고 했다. 조금의 망념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은 견성이라 할 수 없다.
【9-5】 ①노한老漢이 원오圜悟 노사老師의 훈풍자남래熏風自南來를 거량擧揚함을 보고 홀연 전후제前後際가 단절斷絶하니 일려一綟의 난사亂絲를 이도利刀로써 일절一截하여 단절함과 같아 비록 동상動相이 불생不生하나 도리어 정나라처淨裸裸處에 좌재坐在하니라. 노사老師가 말하되 “가석可惜하다. 사료死了하고 갱활更活치 못하는 도다. 언구言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대병이니 사절후死絶後에 갱소更甦하여야 군君을 기만치 못한다.”고 하였다. 매일 입실入室함에 다만 유구무구有句無句는 등藤 넝쿨이 수목樹木을 의지倚止함과 같다 함을 거량擧揚하고서, 내가 대답하려고 개구開口만 하면 문득 “불시不是”라 하였다. 내가 비유를 설하되 “저개這箇의 도리는 흡사히 구자狗子가 열유당熱油鐺을 봄과 같아 핥으려고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나 버릴 수도 없습니다.”고 하였다. 일일一日에 노사老師가 수도등고樹倒藤枯한 때에 상수래야相隨來也라고 거량擧揚하니 노한老漢이 문득 확철廓徹 하여 이회理會하였다. 그리하여 저가 이회理會하였다고 하니, 노사老師가 말하기를 “다만 네가 공안을 투과透過못할까 두려워한다.”고 하며, 드디어 일락삭一絡索의 난해한 효와공안誵訛公案을 연거連擧하였다. 내가 삼전양전三轉兩轉하여 절단截斷하되 태평무사시太平無事時에 대로大路를 얻어 문득 행진行進함과 같아서 다시 체애滯碍함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그대를 기만欺瞞 못한다 함을 알았다. ①老漢이 見圜悟老師의 擧薰風이 自南來하고 忽然前後際斷하니 如一綟亂絲를 將刀一截截斷相似하야 雖然動相이 不生이나 却坐在裸裸處라 老師云 可惜다 死了不能活이로다 不疑言句是爲大病이니 絶後更甦하야사 欺君不得이니라 每入室에 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하고 纔開口하면 便道不是라하다 我說箇譬喩曰這箇道理는 恰似狗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이니다 一日에 老師가 擧樹倒藤枯相隨來也어늘 老漢이 便理會得하고 乃曰某會也니다 老師曰 秪恐你透公不得이라하고 連擧一絡索誵訛公案하니 被我三轉兩轉截斷하되 如箇太平無事에 得路便行하야 更無帶碍하야 方知道我不瞞你하니라. (①『大慧錄』17, 『大正藏』47, p.883ab)
* ①나(대혜)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온다.’고 원오 노스님이 제기한 공안을 듣고 문득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고 어지럽게 얽힌 한 올의 실이 날카로운 칼에 단번에 잘린 것 같았다. 비록 움직이는 모습이 생기지는 않으나 오히려 모든 것을 벗어버린 것 같은 벌거벗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원오 스님이 “아깝다!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했구나.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뒤 다시 살아난다면 그대를 속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원오 스님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다만 “있다는 구절과 없다는 구절이 마치 등나무 넝쿨이 나무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원오 스님이 제기했는데, 내가 입을 열려 하면 곧바로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비유해 “이 이치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 솥을 본 것과 같아 혀로 핥으려하나 핥지 못하고,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어느 날 원오 스님이 “나무가 넘어지고 넝쿨은 메말라 서로 뒤따른다.”고 거양하시기에 내가 즉시 알아차리고 “제가 알겠습니다.”고 말했다. 원오 스님이 “다만 네가 (공안을) 철저하게 꿰뚫지 못했을까 두렵다.”며 연이어 몇몇 난해한 공안들로 문제를 내셨다. 내가 두 번 세 번 (공안을) 끊어 버리고 마치 태평한 시절에 곧장 길을 가는 것같이 전혀 막힘이 없었다. (원오 스님이) “내가 너를 속일 수 없음을 비로소 알겠다.”(고 말씀하셨다.)
엘투디자인 이경미 작
【평석】 오매일여에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의 심천深淺이 있음과 같이 승묘경계勝妙境界인 일념불생전후제단一念不生前後際斷도 7지七地 무상정無想定과 8지八地 멸진정滅盡定의 차별이 있다. 대혜는 몽중일여, 즉 7지의 사경死境에서 구경지까지 투과透過하니 과연 이근利根이다. 이는 멸진정滅盡定의 대사大死는 아니지마는 여기에서도 심오深悟하면 정각을 성취한다. 이와 같이 전후제단前後際斷의 승묘경계勝妙境界를 선문禪門에서는 사료불활死了不活이라 하여 극력 배제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철오徹悟하여 활연대활豁然大活하여야만 정안으로 인허印許하는 것이다. 오직 생명선生命線은 불의언구시위대병不疑言句是爲大病이어서 대사大死 후 대활大活하기 전에는 불조공안佛祖公案의 심현深玄한 묘지妙旨를 영회領會할 수 없다. 그러므로 7지 대보살 지위의 대혜에게도 언구를 극력 참구시켰으며, 상수래야相隨來也에서 확철하였어도 공이투공안부득恐你透公案不得이라 하였으니, 기외其外는 갱론更論할 필요도 없다. 설사 8지 이상에서도 공안의 낙처落處는 망연부지茫然不知하여 구경정각을 성취하여야 요지了知하는 것이니, 역시 불의언구不疑言句하면 시위대병是爲大病이니 참학고사參學高士는 만세萬世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 오매일여에 몽중일여와 숙면일여의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음과 같이,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단절된 뛰어난 경계[勝妙境界]에도 무상정(7지)과 멸진정(8지)의 차이가 있다. 대혜는 몽중일여, 즉 7지의 죽음 같은 경계에서 궁극의 경계를 뚫었으니 과연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 이는 멸진정의 큰 죽음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더 깊이 깨달으면 올바른 깨침을 증득한다. 이와 같이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뛰어난 경계를 선문에서는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한 것이라 하여 극력 배제한다. 여기서 철저하게 깨달아 확실히 살아나야만 올바른 눈을 증득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 때)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임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니 크게 죽은 후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제기한 깊고 알기 어려운 가르침을 체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7지 대보살 지위의 대혜에게도 언구를 극력 참구시켰으며, “서로 따른다.”는 공안에서 분명하게 깨달았어도 “그대가 공안을 철저하게 꿰뚫지 못했을까 두렵다.”고 원오가 말했으니, 나머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설사 8지 이상에서도 공안의 귀착점을 알지 못해 궁극의 올바른 깨침을 증득해야만 공안의 귀착점을 분명하게 안다. 역시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니 참선 수행하는 수행자들은 (이를) ‘영원한 가르침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강설】 오매일여의 무심경계에 들어서는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니 참학參學하는 납자는 만세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무심경이 되었는데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때의 제일 큰 병이 공안 즉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7지·8지의 경지에 이르러도 공안을 모르고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심경이 되니 자유롭고 편안하다.” 하며 스스로 옳다 여기면 영원토록 외도가 되고 만다. 대혜 스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매일여의 쇄쇄낙락灑灑落落(주1)한 경지가 되었지만 원오 스님으로부터 죽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한다는 꾸중을 들었다. 그래서 다시 유구무구 화두를 참구하였는데 마치 개가 기름 솥을 대하듯 이렇게 할 수도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하루는 손님과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젓가락을 손에 쥐고 먹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를 본 원오스님이 웃으며 손님에게 “저놈은 황양목선黃楊木禪을 참구한다오.” 하고 핀잔을 주었다. 나무 중에 가장 더디 자라는 나무가 황양목이니 윤달이면 자라기는커녕 도리어 오그라든다는 얘기까지 있다. 스스로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는데 거기에 스승의 핀잔까지 들은 대혜는 분개하여 스승인 원오 스님께 따지듯 물었다. “예전에 스님께서도 노스님에게 유구무구 법문을 물은 일이 있다는데 노스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유구무구가 칡덩굴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을 때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오조 스님께선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또 ‘그럼 나무도 넘어지고 칡덩굴도 마를 때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니 ‘서로 따르느니라.’고 하셨다.”
그 소리를 듣고 대혜 스님이 확연히 깨달았다. 원오 스님은 그래도 혹 공안을 투과하지 못했을까 걱정이 되어 난해한 공안을 물었는데 대혜 스님은 일체에 막힘이 없을 뿐 아니라 맞서서 거량까지 하였다. 이에 원오 스님이 대혜 스님을 인정하였다. 그러니 완전한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다시 공안을 확철히 깨쳐야 병이 완전히 없어진 대조사라 할 수 있다. 조금 안 것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는 미래제가 다하도록 깨치지 못하고 만다.
대각을 얻게 한 인연을 어찌 육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혜에 비교하겠는가? 대혜 스님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원오 스님 사후에도 좋은 음식이나 새로 딴 과일이라도 있으면 먼저 원오 스님의 진영에 바쳤다고 한다.
교가에서는 오매일여 숙면일여가 된 자재위에 들어가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성불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많은 시일을 요할 뿐 아니라 10지 보살도 잘못하면 외도에 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종문에서는 이를 인정치 않고 10지·등각마저 봉사나 잠을 덜 깬 이로 취급해 눈을 뜨고 잠을 깨는 방법으로 공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혹자는 “7지 보살·10지 보살이 얼마나 높은 경지인데 그들이 다시 공안을 참구할 일이 뭐가 있겠냐?”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천부당만부당이다. 10지·등각이라도 아직 완전히 눈을 뜨지는 못했기 때문에 공안을 모르는 법이다. 오매에 일여한 10지·등각에게도 언구를 참구하지 않음이 병이 되는데, 황차 망상이 죽 끓듯 하는 지견을 두고 돈오다 견성이다 하며 점수한다느니 보임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가당키나 한가? 허황될 뿐만 아니라 온 천지를 마구니로 가득 채우는 요설이라 하겠다. 정식情識이 여전한 상태에서 공안을 알았다면 그것은 견성이 아니라 망상경계다. 대사지大死地에서 다시 공안을 참구해 크게 살아나야 한다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고불고조께서 누누이 강조하신 선문참구의 생명선과 같은 지침이다.
【9-6】 ①반월여半月餘에 동상動相이 불생不生하나 저리這裏에 좌주坐住하면 합당合當치 못하니, 견지불탈見地不脫이라 운위云謂하여 정지견正知見을 장애한다. 매양每樣에 숙면熟眠하여 몽상夢想과 견문이 없을 때에는 절단되어 양궐兩橛을 타작打作하여 경교經敎와 어록에서 차병此病을 해소할 수 없었다. 흉중胸中에 체애滯碍하여 있은 지 10년이러니, 일일一日에는 고백枯栢을 보고 촉목觸目하여 대성발오大省發悟하여 향전向前의 소득所得한 경계가 박연撲然히 산멸散滅하였다. 그때 암실闇室에서 백일하百日下에 나와 있음과 같아서, 비로소 경산 노인(徑山老人, 무준無準)(주2)의 입지처立地處를 득견得見하니 30방三十棒을 타여打與함이 대호大好하다. ①半月餘에 動相이 不生하나 不合這裏하야 坐住니 謂之見地不脫이니 碍正知見이니라 每於睡著하야 無夢想見聞地엔 打作兩橛하야 經敎語錄에 無可解此病이라 碍在胸中者十年이러니 一日에 見枯栢하고 觸目省發하야 向來所得境界가 撲然而散하고 如闇室中에 出在白日하야 始得徑山老人의 立地處하니 好與三十棒이로다. (①『雪岩錄』, 『卍續藏經』122, p.514b)
* ①보름 만에 (마음에) 움직이는 모습이 일어나지 않으나 여기에 머무르면 맞지 않은데 (이를) ‘움직이는 모습이 생기지 않는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것이) 오히려 올바른 깨달음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잠잘 때 꿈속에서 생각하고 보고 듣는 것이 없을 경우 이외에는 (화두와 내가) 서로 끊어진 두 막대기가 되었다. 경전과 어록엔 이 병을 해소할 방도가 없어 가슴 속에 걸려 있기가 10년이나 되었다. 어느 날 늙어 비틀어진 측백나무를 보고 문득 깨침이 있어 이전에 얻은 경계가 무너지듯 흩어져 어두운 방에서 햇빛 가득한 밖으로 나온 듯했다. 비로소 경산 노인의 경계를 체득했다. 방망이로 30방을 때려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평석】 숙면 시에는 망연茫然하여 일여치 못하니 이는 전체가 병이다. 이 대병大病을 정오正悟로 착인錯認하면, 청천백일하靑天白日下의 확철대오는 미래겁이 다하여도 있을 수 없다.
* 깊이 잠들었을 때 화두가 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소멸된 것 같은 상태에 빠져있는 것은 병이다. 이 큰 병을 올바른 깨달음으로 착각하면 밝은 태양빛 같은 철저한 깨침은 있을 수 없다.
【강설】 몽중일여의 경계에 들었다 해도 그 경계에 주저앉으면 병이 된다. 그것을 병인 줄 알고 진실하게 언구를 참구하면 병을 고쳐 청청백일처럼 확연한 깨달음을 얻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확철대오는 영원히 남의 일이 될 것이다.
【9-7】 ①설암雪岩이 묻기를, “일간日間 호호浩浩히 분주할 때에 일여一如하느냐?” 답하되, “일여합니다.” “몽중夢中에도 일여하느냐?” “일여합니다.” 또 묻되, “정正히 숙면할 때에는 주인공은 하처何處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언어로써도 가히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가히 신설伸說할 수 없었다. 5년 후에 의단疑團을 타파하고 대오하니, 자차自此로 안방정국安邦定國하여서 일념무위一念無爲하여 천하가 태평하다. ①雪岩이 問曰 日間浩浩時에 作得主麽아 答하되 作得이니다 睡夢中에도 作得主麽아 作主니다 又問하되 正睡着하면 主在何處오 於此엔 無言可對며 無理可伸이라 後五年에 驀然打破疑團하니 自此로 安邦定國하야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하니라. (①『高峰語錄』, 『卍續藏經』122, p.722b)
* ①설암이 “평상시 분주할 때에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잘 들리느냐?”고 물었다. “잘 들립니다.”고 대답했다. “꿈속에서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들리느냐?” “들립니다.” 또 “깊은 잠이 들었을 때에는 주인공이 어디에 있느냐(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들리느냐)?” 여기서 말로 대답할 수도, 이치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5년 후 ‘의심덩어리[話頭]’를 타파하고 크게 깨치니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국체가 흔들림 없이 확정되어 의도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도, 잡스러운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아 천하가 평안했다.
【평석】 설암부자雪岩父子(주3)도 몽중일여의 가사假死에서 구경지에 돈입頓入 대활大活하여 임제 정인正印을 수수授受하였으니, 실로 천고千古의 방양榜樣이다.
* 설암 스님과 고봉 스님이 몽중일여의 죽음 같은 상태에서 궁극의 경지에 문득 들어가 크게 살아나 ‘임제의 올바른 도장’을 주고받았으니 항상 기억해야 될 ‘참다운 본보기’이다.
【강설】 천고에 귀감이 되는 이야기이다. 고봉 스님(주4)은 3년이란 기한을 정해 놓고 대각을 성취하지 못하면 죽으리라 결심하고 공부하신 분이다. 그렇게 큰 원력으로 용맹정진을 한 덕에 견처를 얻고는 점검받기 위해 설암 스님을 참방하였다. 설암 스님(주5)이 보니 자기는 깨쳤다 하지만 바로 안 것이 아니었다. 허나 그때 아니라고 말해주면 절망하거나 되레 스님이 틀렸다며 고집피울 것이 뻔했다. 그래서 아무 말씀 않고 가만히 두었다. 고봉 스님은 자기의 견해를 옳다 여기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설암은 그 객기가 어느 정도 삭을 시기가 되었음을 알고 그때 가서 일러 주었다.
“네가 꿈속에서도 일여한가?”
“예, 일여합니다.”
“깊이 잠들었을 때도 일여한가?”
고봉 스님이 스스로 돌아보니 깊은 잠에 들어선 일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5년을 참구하고서야 확철대오하고 설암 스님의 말씀을 깊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공부라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9-8】 ①대사大死한 사람은 불법도리佛法道理가 전연 없어서 현묘득실玄妙得失과 시비장단是非長短을 저리這裏에서는 다만 이렇게 휴헐休歇한다. 고인古人은 이를 평지상平地上의 사인死人이라 하니 반드시 나변那邊에 투과透過하여야 되며, 만약에 의의依倚와 해회解會가 있으면 절대로 불가하다. 철 화상喆和尙은 견지見地가 정결淨潔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오조 선사五祖先師는 명근命根이 단절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오직 대사일번大死一番하여 다시 대활大活하여야 한다. ①大死底人은 都無佛法道理하니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을 到這裏하야는 只恁麽休去니라 古人이 謂之平地上死人이니 須是透過那邊하야사 始得이요 或有依倚解會하면 沒交涉이니라 喆和尙이 云見不淨潔이라 하며 五祖先師謂之命根不斷이니 須是大死一番하야 却活하야사 始得다. (①『碧岩錄』5, 『大正藏』48, p.179a)
* ①크게 죽은 사람에게는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이치, 이해하기 어려운 얻음과 잃음, 옮음과 그름, 장점과 단점 등이 전혀 없으니 이런 경지에 이르면 다만 쉬어야 한다. 옛 사람은 이런 상태를 ‘평지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했다. 모름지기 거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혹 (그런 상태에) 의지거하나 이해하려고 알음알이를 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런 경지에 대해) 철 화상은 “경지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했고, 오조법연 선사는 “‘업으로 태어난 임시적인 목숨[命根]’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직 한 번 크게 죽어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
【평석】 추중망상麤重妄想인 제6 의식이 멸진한 제8 리야第八梨耶의 무기無記가 대사大死이니, 이는 숙면에서도 일여한 자재 이상의 대보살위大菩薩位이다. 미세망상인 제8 리야를 이탈하지 못하면 이는 명근부단命根不斷이다. 그리고 10지·등각의 대사심갱大死深坑에서 활연대활豁然大活하여야 리야梨耶의 무기無記까지 영멸한 진대사眞大死이니, 상사상활常死常活하고 상적상조常寂常照하여 바야흐로 선문의 본분종초本分種草가 된다.
* 거친 번뇌인 제6 의식의 활동이 소멸되어 아뢰야식의 작용이 멈춘 때가 크게 죽은 시기이니, 이는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가 들리는 자재 보살 이상의 경지이다. 미세한 아뢰야식을 없애지 못하면 ‘업業으로 태어난 임시적인 목숨’을 끊을 수 없다. 그리고 10지 보살과 등각 단계에서 빠지는 죽음 같은 구덩이에서 탁 트이듯이 분명하게 살아나야 아리야식의 활동이 멈춘 때 나타나는 번뇌까지 영원히 없앨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참다운 죽음이다. 그래야만 항상 죽고 항상 살며, 항상 번뇌가 없고 항상 관조해 ‘참다운 눈을 가진 선문의 선지식[本分種草]’이 될 수 있다.
【강설】 ‘크게 죽은 사람’이라 했으나 제8 아뢰야식의 미세무명이 아직 남아 있으니 진정한 무심,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제8 아뢰야식의 근본무명마저 완전히 끊어버려야 참다운 무심, 참다운 진여경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그것은 가사假死이다. 거기서 한 번 더 죽어야 진정한 죽음이자 진정한 삶이다. 그런 자라야 진정한 대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오매일여의 대사大死 경계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을까? 언구를 의심하여, 즉 화두를 들어 크게 깨쳐야만 참으로 살아있는 자, 정안종사가 될 수 있다.
【9-9】 ①이러한 생철生鐵로 주취鑄就한 자는 혹 기특奇特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은 악경계惡境界를 만나도 그의 면전에 있어서는 전연 몽중夢中과 상사相似하다. 자기 6근이 있는 것도 모르며 단모旦暮가 있는 것도 모른다. 비록 이러한 경계에 도달하였어도, 한회寒灰와 사회死灰를 고수하여 암흑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못쓰며 오직 전신轉身하는 대활로가 있어야 한다. ①這般의 生鐵로 鑄就漢은 或遇奇特境界커나 或遇惡境界커나 到此面前하야는 悉皆如夢相似하야 不知有六根하며 不知有旦暮하니라 直饒到這般田地하야도 切忌守寒灰死灰하야 打入黑漫漫地去요 須有轉身一路하야사 始得다. (①『碧岩錄』3, 『大正藏』48, p.166c)
* ①이처럼 ‘생철을 녹여 만든 나쁜 주조물 같이 허술한 사람[生鐵鑄就漢]’이 특별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은 나쁜 경계를 만나도 꿈속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 몸이 있는 것도 모르고 아침저녁이 있는 것도 모른다. 비록 이런 경계에 도달해도 차갑게 식은 재처럼 활기 없는 어두운 곳에 들어가 머물러서는 안 되며, 모름지기 한 번 몸을 비틀어 바꿔야만 된다.
【평석】 가무심假無心의 한회寒灰와 사회死灰를 집착하여 전신轉身하는 활로活路를 못 얻으면 영영 사지死地에 매몰되고 만다.
* 차갑게 식은 재처럼 일시적인 무심에 집착하여 몸을 돌려 나오는 살 길을 얻지 못하면 영영 죽음의 땅에 매몰되고 만다.
【강설】 6근인 이 몸도 잊고 아침저녁으로 변천하는 6진의 세상마저 잊은 그런 깊은 경계에 들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 경지를 안락하다 여겨 주저앉으면 죽음의 땅인 제8 아뢰야식의 무기무심에 매몰되고 만다.
【9-10】 ①조주趙州가 투자投子에게 물었다. “대사大死한 사람이 각활却活한 때에는 어떠한고?” 투자投子가 대답하였다. “야행夜行을 불허不許하고, 천명天明에 반드시 도달할지니라.” 굉지宏智가 소참小參에 이 법문을 거량擧揚하고 말하였다. “만약 이 시절을 식득識得하면 문득 말하기를, 명중明中에 암暗이 있으니 암暗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암중暗中에 명明이 있으니 명明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 함을 알지니라. 일체 만법이 멸진한 이때에 요료명명了了明明하여 항상 있고, 일체 만법이 생기한 그때에 공공활활空空豁豁하여 항상 적적寂寂하니 참으로 사중활死中活이요 활중사活中死라 함을 알 것이다.” ①投子因趙州問하되 大死底人이 却活時에 如何오 子云 不許夜行이요 投明須到니라. 宏智가 小參에 擧此話云 若介時를 識得去하면 便知道하되 當明中에 有暗하니 勿以暗相遇하고 當暗中에 有明하니 勿以明相覩하라 一切法盡處에 介時에 了了常在하고 一切法生時에 介時에 空空常寂하야 便知道死中活活中死로다. (①『宏智錄』5, 『大正藏』48, p.63a)
* ①투자에게 조주가 “크게 죽은 사람이 살아올 때는 어떠합니까?”라고 물었다. 투자가 “어두운 밤에 움직여서는 안 되며 밝은 날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굉지가 소참 법문 할 때 이 법문을 들어 “만약 이 때를 알면 밝음에 어둠이 있음을 마주 대하게 되니 어둠으로 어둠을 만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음을 마주 대하게 되니 밝음으로 밝음을 보지 마라. 모든 존재가 소멸된 이 때에 분명하고 분명하여 항상 있고, 모든 존재가 태어날 이 때에 텅 비고 텅 비어 항상 고요하므로 ‘죽음 가운데의 삶’과 ‘삶 가운데의 죽음’을 즉시 알게 된다.”고 말했다.
【평석】 대사大死하여 대활大活하면 리야무기梨耶無記까지 멸진한 진대사경眞大死境이 현전하여, 상사상활常死常活하고 상활상사常活常死하여 명암明暗이 쌍적雙寂하고 명암明暗이 쌍조雙照하니 불조佛祖의 정안이다.
* 크게 죽고 크게 살아나면 아리야식까지 소멸된 참다운 큰 죽음의 경계가 나타난다. 항상 죽고 항상 살며 항상 살고 항상 죽어 밝음과 어둠이 서로 고요히 머무르고 밝음과 어둠이 서로 비추니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이은 상태이다.
【9-11】 ①기식氣息이 영절永絶한 때와 종적蹤跡이 단멸한 곳에 참으로 정안을 구비하여야 한다. 그때에는 역력歷歷하여 침적沈寂하지 않고 영령靈靈하여 상대가 끊어져 문득 능히 대방大方에 활보하며 주선보응周旋普應할 것이다. ①絶氣息時와 斷蹤跡處에 須具眼하야사 始得다 那時에 歷歷不沈하고 靈靈絶對하야 便能豁步大方하야 旋普應하리라. (①『宏智錄』5, 『大正藏』48, p.71a)
* ①숨이 영원히 끊어진 때와 흔적이 소멸된 곳에서 참으로 올바른 눈을 갖춰야 된다. 그 때에는 분명하여 가라앉지 않고 신령스러워 마주할 대상이 끊어져 문득 능히 천하를 활보하며 모든 곳에 다니며 두루 응대할 것이다.
【평석】 절후갱소絶後更甦하면 현기대용玄機大用이 현전하여 살활자재殺活自在하고 종횡무애縱橫無碍한 것이다.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현묘한 종지宗旨를 기량에 따라 활용할 수 있고 살리고 죽이는 것에 자재해 어느 방향으로 가던 걸림이 없다.
【9-12】 ①전지田地가 안온安穩하여 밀밀密密한 곳과 활계活計가 냉담冷淡하여 추추湫湫한 때에 문득 겁劫이 공空함을 보아서 호발毫髮만큼도 연루됨이 없고 사삼絲縿만큼도 장예障瞖됨이 없다. 공허함이 지극至極하여 광명이 있고 청정함이 원융圓融하여 조요照耀하니, 만고萬古에 뻗쳐 혼매昏昧하지 않은 일단一段의 사실이 있다. ①田地穩密密處와 活計冷湫湫時에 便見劫空하야 無毫髮許로 作緣累하고 無絲縿許도 作障瞖하야 虛極而光하고 淨圓而耀하야 有亘萬古不昏昧底一段事니라. (①『宏智錄』6, 『大正藏』48, p.76a)
* ①마음이 편안하여 빈틈없는 곳과 이것저것 따지고 구별하는 분별이 가라앉아 싸늘한 때에 문득 시간도 없음을 체득해 터럭만큼도 연루됨이 없고, 아주 가는 실만큼도 가리거나 막힘이 없다. 텅 빔이 지극해 오히려 밝고, 깨끗함이 원만해 오히려 빛이 나 옛날과 지금에 걸쳐 어둡지 않은 하나의 일이 있다.
【평석】 긍만고불혼매亘萬古不昏昧하여 미래겁이 다 하도록 여여불변하는 대적광大寂光은 오직 대사각활大死却活에서 오나니, 리야무기梨耶無記까지 영멸한 진대사경眞大死境의 대공적중大空寂中에서 발하는 대광명은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하고 긍만세이장금亘萬世而長今이다. 추중망상麤重妄想이 멸진하여 일념불생一念不生하고 전후제단前後際斷한 대사심처大死深處도 제8 마경第八魔境이어서 오도悟道가 아니며 견성이 아니다. 멸진의 사지死地에서 홀연 대활하여 상사상활常死常活하고 상적상조常寂常照하여, 적조동시寂照同時며 적조불립寂照不立한 명암쌍쌍明暗雙雙의 구경무심을 철증徹證하여야 비로소 파참벽안罷參碧眼이다.
* 옛날과 지금에 걸쳐 어둡지 않고 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없는, 고요하고 크나큰 빛은 오직 크게 죽었다 살아나는 것에서 온다. 아뢰야식까지 영원힌 소멸된 참다운 큰 죽음의 경계이자 크나큰 텅 빔 속에서 빛나는 밝은 빛은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옛날이 아니고 만세에 걸쳐도 항상 지금이다. 거칠고 무거운 번뇌가 모두 사라져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크게 죽은 곳도 아뢰야식이라는 번뇌가 머무는 곳이지, 깨침도 아니고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곳도 아니다. 남김없이 소멸된 죽음에서 홀연 크게 살아나 항상 죽고 항상 살며,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어, 고요함과 비춤이 같이 있으되 고요함과 비춤이 없는,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는 궁극의 분별없는 마음의 경지를 확실하게 깨달아야 비로소 눈 푸른 납자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스승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
【강설】 조동종의 가르침이 참 자세한데 그 가운데서도 굉지宏智 선사의 가르침은 더더욱 면밀하다.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 다시는 혼매하지 않으니, 크게 죽었다가 살아난다면 억천만겁이 지난다 하더라도 그 광명이 여여해 절대로 혼미한 법이 없다. 그런 크고 고요한 광명, 대적광大寂光이 바로 부처님의 경계이고 대조사들의 경계이다. 이를 성취해야만 비로소 공부를 성취한 사람이고, 공안을 바로 안 사람이고, 견성한 사람이고, 성불한 사람이다. 그러기 전에는 망상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제8 아뢰야식의 무기까지 완전히 벗어났을 때라야 참으로 적적한 대광명이 빛나니, 이를 두고 선문에서는 “활구에 바로 깨치면 영원토록 매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적막한 경계에 눌러앉는다면 죽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은 견성이 아니다. 그래서 종문에서는 8지 이상의 대자재 보살 경지라도 제8 마계라 하여 극력 배제했던 것이다.
【9-13】 ①이 대사각활大死却活한 심처深處는 고불古佛도 도달치 못하였으며 천하 노화상老和尙도 또한 도달치 못하였으니, 설사 석가와 달마라도 반드시 재삼再參하여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노호老胡가 요지了知함을 허락하고 노호老胡가 영회領會함은 불허한다고 하였다. ②제인諸人은 말후구末後句를 알고자 하는가. 지허노호지只許老胡知요 불허노호회不許老胡會니라. ③말후구를 그대를 위하여 설하노니 명암이 쌍쌍雙雙한 시절이니라. ④초경招慶(주6)이 나산羅山에 문問하되, “암두岩頭가 말하기를, 임마恁麽 임마恁麽 불임마不恁麽 불임마不恁麽라 하니 그 의지意旨가 여하如何오.” 산운山云, “쌍명雙明하며 또한 쌍암雙暗하니라.” 경운慶云, “여하시如何是 쌍명역쌍암雙明亦雙暗고.” 산운山云, “동생同生하며 역동사亦同死니라.” ⑤쌍조쌍차雙照雙遮하며 동생동사同生同死하고 전명전암全明全暗하며 전살전활全殺全活이로다. ①只這大死却活處는 古佛도 亦不會到며 天下老和尙도 亦不會到니 任是釋迦老子와 碧眼胡僧도 也須再參하야사 始得다 所以道하되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라하니라. ②諸人은 要會末後句麽아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니라. ③末後句를 爲君說하노니 明暗雙雙底時節이로다. ④招慶이 問羅山云 岩頭道하되 恁麽恁麽不恁麽不恁麽라 하니 意旨가 如何오 山云 雙明亦雙暗이니라 慶云 如何是雙明亦雙暗고 山云 同生亦同死니라. ⑤雙照雙遮하며 同生同死하고 全明全暗하며 全殺全活이로다. (①圜悟, 『碧岩錄』41則, 『大正藏』48, p.179b. ②雪竇, 『碧岩錄』51則, 『大正藏』48, p.186c. ③雪竇, 『碧岩錄』51則, 『大正藏』48, p.186c. ④雪竇, 『碧岩錄』51則, 『大正藏』48, p.187a. ⑤『圜悟錄』7, 『大正藏』47, p.744c)
* ①다만 이 크게 죽었다 살아난 깊은 곳은 옛날의 부처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천하의 선지식들도 도달하지 못한 곳이다. 설사 석가나 달마라도 다시 참문 해야만 된다. 그래서 “달마가 알았음은 인정하나 깨달았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②여러 분들은 ‘궁극의 경지를 지난 한 마디[末後句]’를 알고 싶은가? 달마가 알았음은 인정하나 깨달았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③‘궁극의 경지를 지난 한 마디[末後句]’를 그대를 위해 말한다.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는 시절이다.” ④초경이 나산에게 “암두가 ‘그렇고, 그렇고,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고’라고 말한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나산이 “두 배로(동시에) 밝고 두 배로(동시에) 어둡다.”고 말했다. 초경이 “무엇이 두 배로(동시에) 밝고 두 배로(동시에) 어두운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나산이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고 대답했다. ⑤(양변을) 쌍으로(동시에) 비추고 쌍으로(동시에) 막으며, 같이 살고 같이 죽고, 온전히 밝고 온전히 어두우며, 온전히 죽이고 온전히 살린다.
【평석】 대사대활하여 상적상조하는 명암쌍쌍明暗雙雙의 말후구는 쌍차쌍조 동생동사 전명전암 전살전활 등으로 표현하나, 이는 고불古佛도 미증도未曾到인 최후 극심심처極深深處이니 오직 실참실오實參實悟에 있을 뿐이다.
* 크게 죽고 크게 살며, 어둠과 밝음이 함께 하는 ‘궁극의 경지를 지난 한 마디’는 (양변을) 쌍으로(동시에) 비추고 쌍으로(동시에) 막으며, 같이 살고 같이 죽으며, 온전히 밝고 온전히 어두우며, 온전히 죽이고 온전히 살리는 것 등으로 표현되나 이는 옛 부처님도 결코 도달한 적 없는 궁극의 깊고 깊은 곳이며, 오직 실지로 수행해 깨달을 때 알 수 있다.
【강설】 ‘이것’을 알아야 제불조사들의 법문을 알 수 있고 말후구를 알 수 있으며, 사중득활을 알 수 있고 천하 노화상과 고불도 이르지 못한 깊은 경계를 바로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깨쳐야 하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따질 것이 아니다. 오매가 일여한 곳에서 다시 살아나야만 비로소 아는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하겠다.
그러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엔 어떠한가?
초初는 31이요, 중中은 9요, 하下는 7이다.
억!!!
이것을 분명히 안다면 지금까지의 법문을 빠짐없이 알겠지만 이것을 모른다면 천 년 만 년 아무리 지껄여보았자 입만 아프지 아무 소용이 없다. 모름지기 부지런히 정진하기 바란다.
주)__
1) 마음이나 몸이 매우 시원하고 개운함.
2) 법명은 사범(師範, 1178-1249). 임제종 승려. 9세에 음평산陰平山의 도흠道欽을 따라 출가, 소희紹熙 5년(1194)에 구족계를 받음. 성도成都의 명요노숙名堯老宿 문하에서 선을 수행. 또 육왕育王의 덕광德光에게 참구하고, 영은靈恩에 이르러 파암조선破庵祖先과 함께 석순암石蚓庵으로 감. 한 도인을 만나 호손자胡孫子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조선의 법을 이음. 절강성 명주明州 청량淸涼에서 설법하고, 자명전慈明殿에서 승좌설법陞座說法, 불감佛鑑 선사라는 호를 받음. 순우淳祐 9년 3월 18일 입적. 세수 72. 설암조흠雪巖祖欽, 무학조원無學祖元, 올암보녕兀庵普寧, 환계유일環溪惟一 등의 제자가 있음. 저서로는 『불감선사어록佛鑑禪師語錄』 5권이 있고, 무문도찬無文道瓚이 『경산무준선사행장徑山無準禪師行狀』을 씀.
3) 설암 스님과 고봉 스님.
4) 법명은 원묘(原妙, 1238-1295). 임제종 설암조흠雪巖祖欽의 법을 이음. 1279년 천목산天目山 서봉西峰으로 들어가 사관死關을 짓고 은거함. 저서로 『선요禪要』와 『고봉록高峰錄』이 있음.
5) 법명은 조흠(祖欽, 1215-1287), 법호는 설암雪巖. 처음에는 정자사淨慈寺 멸옹문례滅翁文禮에게 참학하였으나 계합하지 못하고, 철궐鐵橛 문하에서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의 화두를 참구한 다음, 무준사범無準師範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용흥사龍興寺, 도림사道林寺 등에 두루 머물다가 함순咸淳 5년(1269) 앙산仰山에 정착함. 저서로는 『설암화상어록雪巖和尙語錄』 4권.
6) 법명은 혜릉慧稜, 법호는 장경長慶·초경招慶. 설봉의존 선사의 법을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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