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석 그늘 아래 ]
일음一音으로 일군 바른 마음의 전법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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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스님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3:44 / 조회1,625회 / 댓글0건본문
원행스님(정인사 주지)
4월이 되면 반용산盤龍山 자락에 자리 잡은 정인사에서도 싱그러운 산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덕분에 도시와 산자락의 경계에 자리 잡은 도량에서도 상쾌한 아침을 맞이합니다. 넓은 창밖으로 펼쳐진 4월 초순의 산색山色은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도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날마다 신록이 더해가는 산빛만 바라보고 있어도 저절로 눈이 맑아지고, 감로수를 마신 듯 마음에는 청량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산빛만 보고도 이런 감흥에 젖어 드는 것을 보면 비록 몸은 도시에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행자 시절을 보낸 가야산 자락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인사와 함께 한 인연
소납은 1974년도 정월 17일 처음 해인사로 가서 성철 큰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때마침 하얀 눈이 내려서 온 산천을 덮고 있던 터라 가야산은 그야말로 설국이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는 동양화처럼 아름다웠지만 눈 내린 비탈길을 걸어서 백련암을 찾아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역이었습니다. 길은 미끄럽고 손발은 시리고, 더구나 초행길이라 백련암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천신만고 끝에 백련암에 당도하였습니다.
백련암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서 뒤를 돌아보니, 눈 덮인 가야산은 한 송이 백련白蓮과도 같았습니다. 고인古人이 말하길, 눈 덮인 길에 남긴 발자국은 훗날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기에 갈지자 행보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납도 하얀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올라간 이후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처님 곁에 머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혼탁한 세상과 단절하고 연꽃같이 맑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길은 그렇게 눈 오는 겨울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출가하여 계를 받으려면 짧게는 8개월 길게는 1년에 걸친 행자 생활을 거쳐야 했습니다. 비록 집을 나설 때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입산入山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하산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행자 생활은 불법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과도 같았습니다.
소납은 행자 시절에 채공과 공양주 소임 등을 보았습니다. 행자 생활을 마치고 수계를 받은 이후 1976년 여름에 해인사 퇴설당에 방부를 들이고 하안거 정진을 했습니다. 하안거를 마치고는 다시 백련암으로 돌아가 다음 해 하안거 결제 전까지는 백련암 공양주 소임을 살았습니다. 77년 여름 하안거에 해인사 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80년까지 살고, 이후 극락암, 수도암, 봉암사, 복천암 등을 다니며 정진하다가 1984년 청량사로 가서 감원을 맡아보고 있었습니다.
정인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8년입니다. 여름철은 별다른 일이 없을 것 같아서 해인사 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하안거를 지내고 해제 후에 청량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원택스님께서 마산 참회원이 비어 있는데 내려가서 운영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권유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조용한 도량에서 수행하며 머무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선뜻 마음을 내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 스님들의 의견도 분분했습니다. 가지 말라고 말리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가서 새로운 불사에 도전해 보라고 권하는 스님도 있었습니다.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변 스님들의 의견까지 분분하니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결제 때마다 상기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원택스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이참에 한번 내려가서 지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비록 성철 큰스님께서 참회원에서 주무시거나 머무신 적은 없지만 당시 참회원은 백련암의 유일한 포교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 소임을 맡아 잘 운영하는 것도 큰스님의 법을 펴는 데 있어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1988년 동안거 결제일인 음력 10월 15일 마산 참회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88서울올림픽이 막을 내린 직후였습니다. 함께 수행했던 도반 스님들은 동안거를 나기 위해 전국의 제방선원을 찾아 다시 산으로 들어가는데 소납은 걸망 하나 달랑 짊어지고 도반들과는 반대로 따뜻한 바닷가 마산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와서 보니 그 당시 참회원은 잘 지어진 큰 2층 양옥집이었습니다. 2층 큰방 두 개를 터서 법당으로 쓰고 있었고, 법당에는 큰스님이 그리신 큰 원상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은 원불교 간판이 크게 붙은 원불교 교당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원불교 교당 이름이 참회원인 줄 잘못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으로 “언젠가 때가 되면 한눈에 척 봐도 절인 줄 알아볼 수 있는 법당을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첫 만남의 순간 잠시 마음에 스치고 지나간 찰나의 발원發願이 30년이 넘는 긴 인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한목소리로 하는 염불
참회원에 와서 처음으로 불자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던 날이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그 당시 백련암 스님들이 하는 108참회의 예불의식과 참회원 보살님들이 하는 예불의식은 음률에서 좀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중이 다 함께하는 예불이나 기도는 음률이 잘 맞아야 신심도 생기고 환희심도 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백련암에서 소납이 익힌 대로 음률을 조율하거나 아니면 참회원 불자들의 관행에 맞추거나 하는 일이 제일 큰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불을 마치고 참석한 보살님들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참회원에서 하는 예불의 음률이 제가 백련암에서 익힌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음률과 속도를 맞춰서 한목소리로 예불하고 기도하면 불보살님께서 들으시기에도 좋고 저희도 신심이 나고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우선 보살님들의 소리와 속도에 맞추도록 노력해 볼 테니 좀 신경을 써서 소리를 맞추어 봅시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예불에 참석한 보살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닙니다, 스님은 하신 대로 그냥 하십시오. 저희들이 스님께서 하시는 방식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화답해 주셨습니다.
「초발심자경문」에 보면 염불할 때 “마땅히 글을 외우면서 뜻을 생각할지언정 부질없이 소리만 내지 말며, 또 곡조를 틀리게 하지도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고 염불할 때 동참자의 마음이 일심一心이 되어 운율과 곡조가 딱딱 맞아야 신심이 나고 마음에도 환희심이 생기는 법입니다. 소납이 먼저 참회원을 지켜 온 불자들의 뜻을 존중하여 운율, 곡조, 속도를 따라 맞추겠다고 하니 오히려 그분들이 저를 따라 주어 자연스럽게 차차 일음一音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목소리로 염불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사이, 정인사의 모든 불자님들의 마음도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첫 단추를 마찰 없이 잘 꿰어서인지 지금까지 정인사의 모든 불자님들은 서로 존중하며 신뢰하는 관계로 지내고 있습니다. 먼저 나 자신을 낮추며 하심下心할 때 서로 다른 마음은 하나로 모이고, 그렇게 마음이 모이면 자연히 힘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정인사를 있게 한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정인사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알게 된 것은 마산 진각행 보살님께서 성철 큰스님께 “원행스님을 마산에 좀 보내주십시오.”라고 먼저 요청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소납은 참회원의 운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살님들은 이미 마음을 결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올해로 어느덧 36년이 되었습니다. 그 세월은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108 참회와 능엄주를 하는 수행도량을 일구는 기간이었습니다. 마산의 보살님들은 멀리 백련암까지 가지 않고 생활 터전 가까이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수행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원력이 하나둘 모여 참회원 옆에 있던 원불교 교당을 매입하여 부지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5. 정인사를 일군 불자들과 함께.
참회원 운영을 맡고 만 5년이 되던 1993년 3월 하순경에 참회원 법당으로 쓰던 2층 주택과 옆 원불교 교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담한 규모로 3층 콘크리트 한식 법당을 11월 초순에 신축 완공하였습니다. 5년여 동안 여러 불자님들의 발원과 동참으로 한눈에 봐도 사찰임을 알아볼 수 있는 도량을 일구게 된 것입니다. 첫 만남의 순간 마음에 담았던 발원이 성취되는 순간이었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요. 공교롭게도 그해 11월 은사이신 큰스님께서 원적圓寂에 드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함께 수행하고 공부하기 위해 불자님들의 원력을 모아 전법도량을 일구었는데, 도량이 완공되던 그해에 큰스님께서 원적에 드셨으니 황량한 들판에서 길을 잃은 것같이 막막한 기분이었습니다.
소납과 불자님들의 황망함과는 달리 일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열반에 드셨지만 큰스님의 법력은 정인사 불사에 오히려 가피를 내려주셨습니다. 당시 정인사의 확장 불사를 하고 난 뒤 바로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고, 큰스님의 열반 소식은 대중매체를 통해 연일 대서특필되었습니다.
큰스님의 치열한 수행과 종횡무진으로 막힘 없는 설법과 법력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련암 원택스님께서 “불사를 하려면 생각보다 큰돈이 든다.”라고 하면서 격려차 주신 큰 금액의 불사금을 고마운 마음만 받고 새해가 오기 전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정인사가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찰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불사에 큰 힘이 된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열반에 드신 뒤에도 전법도량을 일구게 해 주셨고, 그런 큰스님의 덕화로 지금까지 정인사는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며[無所從來],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亦無所去].”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의 가르침 또한 가고 옴이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새로 마련한 법당에서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기도하고 수행한다면 큰스님의 법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는 것임을 깨닫고 마음을 다시 다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큰스님께서는 입적하시기 전에 이미 정인사正印寺라는 사명寺名을 내려주신 터였습니다. 큰스님께서 내려주신 절 이름들에는 모두 ‘바를 정正 자’가 들어 있습니다. 한결같이 정법만으로 불자들을 인도하라는 큰스님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정인正印’이란 ‘해인삼매海印三昧’와 같은 맥락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수행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이 순일하게 하나로 모이면 마음은 마치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아지게 됩니다. 그때 모든 중생들의 내면에 본래 구족되어 있던 저마다의 ‘옛 거울[古鏡]’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거울 속에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이치가 다 드러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정인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바른 마음의 도장’이라는 뜻도 됩니다. 불자들과 함께 일군 이 도량에 오로지 정법을 전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정법을 새기라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인사라는 이름에는 누구나 기도와 수행으로 마음공부를 잘해서 자신의 본성을 밝히라는 큰스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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