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석 그늘 아래 ]
수행자로서 본분도리를 다하는 큰스님 상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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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스님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10:51 / 조회1,171회 / 댓글0건본문
원소스님 2
백련암에 올라가니 저녁때라 발우공양을 하고 있으니까 성철스님께서 염화실에서 나오셔서 상좌들이 있는 큰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원택스님이 큰절에서 올라온 신 행자라고 소개를 해서 삼배를 드리니, 성철스님께서 “뭐 행자라? 무슨 젊은 놈이 벌써 머리가 훌렁까졌노! 하메(벌써) 중이 되었네! 어허허허~~~” 하고 웃으시곤 바로 큰스님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입산하려고 마음을 먹으니 나의 모습도 점점 스님들 모습을 닮아가서 27세 때 앞머리가 듬성듬성해지던 때에 해인사에 입산하여 삭도기로 삭발을 하니 앞머리의 반이 빠졌을 때입니다. 그때 말로만 듣던 성철스님을 처음 친견했는데, 형형한 눈빛이 보통 사람들의 눈빛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도인스님의 눈빛을 처음 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백련암 행자의 하루 일과와 큰스님 교육방법
백련암의 일과는 큰절과 같이 새벽 3시에 기상해서 오분향례와 능엄주와 이산선사발원문,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아침예불을 드리고, 아침공양 후에는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보며 날씨가 괜찮으면 점심공양 후에는 지게를 지고 백련암 뒷산으로 올라가 말라 죽은 고목나무를 한 짐씩 하러 갔습니다. 그때는 취사와 난방을 나무로 하던 때입니다. 저녁공양 후 108참회로 예불을 드린 후 공부를 하다가 밤 9시에 취침을 했습니다.
백련암의 교육방법은 처음에 능엄주와 108참회문을 외운 다음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 대승경전과 선어록 등은 백련암 다락방에 비치되어 있는 국역본으로 자습을 하고, 1년간 의무적으로 일본어를 독학하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범어梵語로 된 경전들이 대부분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련암에서 2~3년간 살면서 일어판 경전과 선어록을 20~30권 정도를 본 후 비구계를 받으면 선원으로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해인사승가대학에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성철스님의 지시에 의해 백련암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는데, 시장에 가서 식품을 구입하는 원택스님 외에는 결제 해제 구분 없이 큰절에도 못 갔습니다. 외출이 허락될 때는 예비군과 민방위훈련이 있는 날, 결제 때 성철스님이 법문하시는 날, 아파서 병원에 가는 날 외에는 사실상 외출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신문과 경전과 선어록 외에는 일간신문과 잡지, 외전을 일절 보지 못하게 하고 라디오와 TV시청도 금지했는데, 백련암에서 살다가 도중에 하산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갑자기 출입이 통제되는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소납도 처음에는 힘들어서 소임을 보고 공부를 하는 시간 외에는 틈을 내어 백련암 뒷산으로 매일 1시간씩 등산을 하여 적적함을 달랬는데, 외부의 정보와 철저히 단절된 시간은 세속의 속물을 빼내고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소납은 행자 때 1년간 백련암에 살고, 사미계를 받은 후 해인사승가대학과 율원을 마친 후 1984년에 자청하여 백련암에 올라가 큰스님 시봉하기 1년을 더하여 도합 2년을 살았습니다. 백련암에선 채공 소임을 맡았는데, 원택스님으로부터 연근과 우엉과 콩을 졸이는 법, 김치 담그는 법, 국수 삶는 법 등을 배웠습니다. 큰절하고 암자(백련암)에서 배운 음식 솜씨로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음력 3월 대장경 정대불사 때 전국에서 신도들이 수천 명 오는데, 소납은 갱두 소임을 맡아 관음전 큰 가마솥 2대에 근대국, 아욱국, 미역국을 번갈아 가며 장작불로 끓여 하루에 120솥이 넘게 대중공양을 올렸는데, 국맛이 좋다고 사부대중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인사승가대학에 입학한 백련암 ‘최초의 상좌’
백련암에서 1년간 행자생활을 해도 해인사승가대학에 입학하려 하면 성철스님의 상좌가 될 수 없었고 산중의 다른 스님을 은사로 모셔야 했습니다. 사미계를 받기 두 달 전에 원택스님에게 해인사승가대학에 가겠다는 결심을 말씀드리고, 백련암에서 행자 신분으로 큰스님을 모시고 산 시간은 영광으로 생각하겠다는 것과 은사스님은 산중의 다른 스님을 찾아보겠다고 말씀드리니, “실컷 고생하고 백련암을 떠나려 하느냐?”라고 서운해하셨습니다.
원택스님도 소납이 사미계를 받기 2주 전에 성철스님께 신 행자가 사미계를 받으면 승가대학에 가려고 하는 듯하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는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면서, 큰스님의 묵언默言은 반대하는 뜻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원택스님은 그 말을 꺼내자마자 “다른 은사 정해 줘라.” 하실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시면서 큰절에 내려가면 생활을 잘하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철스님 상좌 중에서 해인사승가대학에 입학한 ‘최초의 상좌’가 되었습니다.
소납이 승가대학에 가려는 이유는 큰절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 승가대학에 다니는 스님들이 새벽 3시에 대적광전에서 아침예불을 드린 후 4시에 승가대학으로 내려와서 5시까지 100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경전을 합송하는 소리는 세상의 어떤 음악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힐링시키는 천상의 소리였습니다. 대학생들이 수련대회에 왔다가 해인사 아침예불과 경전 독송하는 소리에 감동을 받아 출가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었습니다.
백련암에서의 생활은 외출을 못 하게 해서 그것이 힘들지 큰절 행자실에서 하던 일의 강도에 비하면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 9시에 누우면 금방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상좌들이 생활하는 큰방 옆에 다락방이 있었는데, 승가대학에서 배우는 경전과 선어록, 한글 번역본이 30권 정도 쌓여 있었습니다. 전등이 있어서 불을 켜면 책을 볼 수 있어서 밤 9시 삼경이 되면 자지 않고 밤 11시까지 책을 보다가 잤습니다.
백련암 행자생활 두 달째 되는 밤에 동국역경원에서 출판한 『수능엄경』을 보고 있는데, 다락문이 갑자기 열렸습니다. 성철스님께서 화장실 가시다가 다락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니 다락문을 여신 겁니다. 소납이 보고 있던 책을 확 뺏어 살펴보시고는 “좋은 책을 보고 있구나.” 하시고는 책을 돌려주셨습니다. 아마도 이때 큰스님께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행자인 줄 알고 승가대학에 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 같고, 큰스님의 상좌가 된 것은 신심이 돈독했던 아버지께서 저세상에 가서도 출가한 아들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도록 음덕을 베풀어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큰스님을 모신 회고담에 대하여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오래 전에 월간 『해인』, 『가야산 호랑이를 만나다』, 『백련불교논집』 등의 책에 3~5회 정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인용하면서 성철스님을 모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낡디낡은 큰스님 내복을 태워 버린 아쉬움
큰스님의 일상생활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처럼 시계 초침과 같이 정확하고 규칙적이었다. 새벽 2시쯤 일어나서 3시에 108참회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무염식無鹽食으로 소량의 공양을 들었다. 물론 간식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루 두 번 산책하고 채소밭과 정원수를 돌보고 삼천배를 마친 신도와 공부 점검받으러 오는 스님들을 접견하는 시간 외에는 밤 10시까지 하루종일 참선과 독서로 소일하셨다.(주1)
승가에서 큰스님이라 평가받는 사람들은 하루 일과에서 보통 승려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성철스님은 평생을 통하여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잃지 않았으며 철두철미하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며 살았습니다. 시간 관리만 철저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근면·검소·절약하며 의식주 등 일상생활에 타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성철스님은 승려들은 신도들이 갖다 주는 시줏물로 살아가니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라고 강조하셨고, 큰스님 스스로도 평생 회색 광목옷만 입으셨고, 고희를 넘기고서도 옷이나 양말을 손수 기워서 착용하셨습니다.
어느 날 큰스님께서 “키달아(키다리), 이거 입으라.” 하며 큰스님께서 손수 내복을 건네주셨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엉덩이 부분 전체를 헝겊으로 기운 낡디 낡은 겨울 내복이었습니다. 이것을 입고 매일 백팔참회를 하고, 오후에는 암자 뒷산으로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니니 내구연한耐久年限이 지나도 한참 지난 내복이 도저히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무릎 부분을 기워 놓으면 다음 날은 엉덩이 부분의 솔기가 터지고, 보름 동안을 계속 기워 입다 보니 공부할 시간도 없고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아궁이에 던져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상좌들한테 들으니, 큰스님이 입던 낡은 옷을 물려받아서 입으면 공부가 잘된다고 상좌들 간에 누더기 헌옷을 서로 받으려고 경쟁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낡은 내복을 없애지 않고 잘 보존했더라면 큰스님께서 50년 이상을 손수 기워 입으신 누더기 두루마기 겉옷 두 벌과 더불어 귀한 보물이 되었을 터인데, 그때는 정말 안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으로 깊은 영향을 받은 소납은 물자가 풍부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양말은 신을 수 없을 때까지 기워 신고, 겉에 입는 승복도 계절이 바뀌면 깨끗이 세탁한 후 단골 승복 집에 수선을 맡겨 오래오래 입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경계를 뛰어넘으신 큰스님
성철스님은 출가 후 선방과 토굴에서 수행할 때 20년 정도 생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청담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할 때, 부처님을 본받아 곡식 몇 알로 허기만 때우는 벽곡辟穀을 하자 극심한 영양 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지니 청담스님도 걱정하시고, 소식을 들은 향곡스님이 참깨를 한 말 가져오셔서 생식 때 갈아 먹으라 권유하셔도 “니나 먹으라!” 하시며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식사다운 식사는 해인사 백련암에 오시고부터입니다.
소식小食은 평생 지키셨다. 아침은 현미죽을 들고 점심과 저녁은 현미밥을 드셨다. 버섯을 물에 담가 우려낸 국물에 감자와 당근을 약간 썰어 넣은 것이 국 겸 찌개였다. 반찬은 가늘게 썬 솔잎 한 숟가락, 알이 작은 삶은 검은콩 한 숟가락, 곰취나물 조금, 마와 더덕을 소량 섭취했고, 계절별 반찬으론 쑥갓이 날 땐 쑥갓 세 줄기, 복숭아가 나올 땐 복숭아 반쪽, 가을과 겨울엔 사과 반쪽이 반찬으로 올랐다. 아주 더운 여름엔 수박을 조금 드셨고, 평소에 몸이 냉하여 가끔씩 설사를 했기 때문에 식후에 곶감을 하루 한 개씩 드셨다. 차는 인동과 대나무 잎, 녹차를 넣어 삶은 물을 갈증이 나면 한 잔씩 마셨고, 피곤할 때는 차에 꿀을 조금 넣어 마시기도 하셨으며, 간식은 전혀 하지 않았다. 반찬엔 소금과 간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무염식無鹽食을 하셨으며, 출가 이후 술이나 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았다.(주2)
큰스님의 식생활만 떼어놓고 보아도 수행자다웠습니다. 다음은 주거생활과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스님께서 거처하는 방도 아주 검소해서 3평 정도의 옹색한 방에 석굴암 부처님 사진 한 장과 경상經床과 좌복 외에는 화분이나 그림 하나 없었다. 스님이 백련암에 주석하실 때는 암자 전체에 단청을 못하게 하였다. 스님은 상좌를 둔 이후에는 돈을 전혀 만지지 않았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백련암에는 불전함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일년에 한 번 돈 만지는 날이 있었다. 바로 설날이다. 스님은 아랫마을의 꼬마들이 세배를 오면 세뱃돈을 주셨다. 이것이 굳이 말해 스님께서 하시는 경제 활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님은 신도의 집에 특별한 일 없이 방문하지 말며 신도들이 주는 돈을 무서워하라고, 그 돈은 꿀이 아니고 독약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주3)
<각주>
(주1) 원소, 「다시없을 스승을 그리며」, 『가야산 호랑이를 만나다』(아름다운 인연, 2006, p.136).
(주2) 원소, 「곁에서 본 성철스님」,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 오르네』(장경각, 2015, pp.282~283).
(주3) 원소, 「다시 없을 스승을 그리며」, 『가야산호랑이를 만나다』(아름다운 인연, 2006,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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