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불교의례 ]
묵언默言과 합송合誦의 조화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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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13:12 / 조회188회 / 댓글0건본문
출가자들이 함께 외우는 게송 소리는 듣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더없이 단순한 음률을 지녔지만, 우렁차고 검박한 합송合誦 소리에 성스러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우렁찬 게송 소리의 감동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한국에서 산사의 새벽예불에 참관한 뒤, ‘세계를 밝힐 찬란한 빛이 한국의 사찰에서 나올 것’이라며 감동한 일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게송의 뜻은 몰라도 그 자체로 숭고함을 지닌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갓 출가한 학인 스님들에게도 커다란 신심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학인시절, 게송 할 때가 젤 좋았어요. 사시 발우공양 때 햇살이 삭 들어오고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는데, 대중이 합송하는 그 소리가 너무너무 신심이 나요. 그 음률이 있거든요. 어른 스님 뒤로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다니고, 바깥에 신도분들 소리가 왁자지껄해도 여긴 엄청 고요하고, 합송 소리 하나로 모든 게 착착 돌아가요. 대중 속에 함께하는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애요. 엄~청 신심 납니다. 하하.”
어른 스님들과 마주한 하판 자리에 앉아, 사시巳時 발우공양을 하던 때의 기억을 들려주는 덕현스님의 표정이 맑고 행복해 보였다. 가지런히 자리한 수행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외우는 게송이 초심의 출가자에게 어떠한 감동으로 다가왔는지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게송은 엄격한 규범 속에 이루어지지만, 같은 뜻을 지닌 대중의 우렁찬 다짐의 소리이기에 평온한 출가자의 즐거움으로 신심을 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스님은 4년 내내 새벽예불과 사시 발우공양 때 합송하면서, 함께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때의 ‘살아 있음’을 ‘깨어 있음’으로 바꾸어 새길 수 있을 듯하다.
스님의 말을 들으며 오래전 십이월의 어느 겨울날, 산사의 새벽예불에 참관한 경험이 떠올랐다. 저녁예불까지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서, 염송 소리·타악기 소리와 함께 출가수행자들의 몸짓과 의식 하나하나가 성스러운 종교적 성정性情으로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다.
도량석 목탁이 잦아들 무렵, 새벽 산사에 울려 퍼진 종송鐘頌의 염송 소리는 깊은 여운을 남겼다. 학인 스님들은 기러기처럼 가지런히 법당을 향하고, 범종각 사물四物이 차례로 울리면서 모든 게 현실 같지 않게 여겨졌다. 북과 쇠가 내는 타악기 소리는 태초의 설렘처럼 아득했고, 법당에서 이어진 대중 스님의 검박한 새벽예불 소리는 범접할 수 없이 숭고했다.
그들은 묵묵하고 조용히, 온몸을 던져 치열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갓 출가한 학인 스님의 앳된 모습에서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많은 것들을 걷어내고, 삶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시간과 만난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성스러운 소리와 함께했기에 ‘종교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접점으로 각인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따뜻한 밥 식혀 먹는’ 공양
염송과 관련해 재가 공양주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참 공양주가 들어와서 ‘발우공양이 뭐냐’고 물으면, 구참 공양주들이 “따뜻한 밥 식혀 먹는 게 발우공양이지.”라고 답해 준다는 것이다.
갓 지어 따뜻한 밥을 올렸더니, 갖가지 게송을 하며 밥이 다 식을 때쯤 공양하는 큰방의 실상을 표현한 말이다. 게다가 “제일 먼저 푼 큰스님 밥부터 식지. 대여섯 명이면 덜 식고, 수십 명이면 더 식는 거지.”라고 덧붙인다. 따뜻한 밥을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드시길 바라건만, 큰스님은 가장 먼저 밥을 퍼서 맨 하판에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니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예리한 평’이다.
“발우하고 나면 우리끼리 ‘희한하지, 왜 발우 밥이 맛있지?’ 그래요. 반찬이 딱 세 가지잖아요. 근데 발우 밥이 맛있어. 그리고 발우 밥은 썰렁해. 왜냐하면 스무 명 가까이 돌릴 때까지 기다려요. 또 오관게도 외워야죠. 상공양床供養은 내가 따뜻할 때 떠서 먹잖아요. 죽비 쳐야 먹으니 썰렁한데도 발우 밥이 맛있다는 거죠.”
기다리느라, 게송을 외우느라 식은 데다 반찬 수도 적은 발우 밥이 왜 맛있는지 궁금하게 만든 뒤, 선우스님은 이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대방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밥맛이 달라지는 건 희한한 일인데, 그 이유는 “잘 살아보겠다, 수행을 열심히 하겠다는 발원이 함께하는 공양이기 때문이다. 대충 살겠다면 발우공양도 의미 없겠지만, 그 마음으로 출가했으니 죽으나 사나 발우 밥이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니 게송이 주는 힘은 더욱 크게 마련이다.
“법공양을 하면 대중이 함께 소리 내어 외우는 게송이 계속 나와요. 이 의식에서 이건 누구를 위한 거고, 이 의식을 할 땐 공양의 소중함을 느끼고…. 그래서 게송을 하나하나 외우고, 새기고, 집중하게 되죠. 그러한 단계를 거치며 스스로 짚어 주고 다짐하는 데서 ‘거룩한 식사법’이라는 게 많이 느껴지죠.”
함께 외는 게송마다 공양에 임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이 담겨 있어, 각 절차에서 새겨야 할 의미를 일깨우게 된다는 동우스님의 말이다. 일상의 공양에서 수행의 목적을 끊임없이 깨우쳐 주니, 출가수행자의 식사는 발우공양의 정신과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갓 출가하여 게송의 뜻을 알지 못할 때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게송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그러다가 뜻까지 하나하나 새기면 진짜 신심이 나는데, 뜻을 잘 모를 때도 똑같이 좋았던 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이 함께 외는 합송 자체가 지닌 감동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스님들은 많은 게송 가운데 발우공양의 핵심은 오관게五觀偈에 담겨 있다고 입을 모은다. “참회가 되고 청정한 마음이 되어야 다른 이를 향한 감사가 나올 수 있다. 오관게는 대단한 게송이다.”, “합장하고 ‘내 공덕을 생각했을 때 받기가 부끄럽다’고 하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이 음식을 약으로 먹는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구나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라는 첫 구절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며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만든 분 또는 제공해 준 분께 감사하면서 먹는 데 그친다. 그러나 음식과 나의 관계를 연기적 관점에서 상념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품지 못하는 이 질문의 본래 의미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을 거쳐 이 음식이 내게 왔는지 헤아려 본다[計功多少 量彼來處]’는 뜻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질문에 열린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발우공양의 정신을 체득하며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어서 오는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구나’라는 구절에 이르면, 왜 부끄러워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을까, 내가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 질문과 성찰에 미치기까지 많은 단계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발우공양을 해 온 스님들 또한 게송을 외울 때면, 한 구절 한 구절 자신을 살피게 되고 정신이 번쩍 든다고 하였다. 공양하는 이유와 출가의 목적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엄정히 일깨우는 게송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관게를 외면서 부족한 나를 보고 반성한다’는 스님들에게서,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출가 수행자의 모습이 역력히 느껴진다.
아울러 “그 힘은 죽비가 있고, 대중이 앉아 있고, 부처님이 계신 큰방에 앉아야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 앞에서 뜻을 같이하는 대중이 다 함께 목소리를 내어 새기는 여법한 자리이기에, 그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온다는 뜻일 터이다. 따라서 옛 스님들이 발우공양을 할 형편이 못 되어도 오관게는 외웠고, 대방을 ‘오관당五觀堂’이라 부른 것은 이러한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염불·염송의 종교적 역동성
경전을 읽는 독경에 비해 ‘염송念誦·염불念佛’은 읊조림의 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적으로는 종교 행위에 따르는 지극함이 반영되고, 규범적으로는 오랜 전통 속에서 전승과 집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정한 운율·가락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에서 전승해 온 스님들의 합송 소리는 평성平聲보다 높지만 묵직하고, 단순하지만 특유의 운율이 있어 삶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러한 염불·염송은 노래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의 음악적 특징을 지녔다. 마치 타악기가 심장의 고동 소리처럼 단음을 반복함으로써 비일상적 상황에 빠져들게 하듯, 단순한 가락과 장단의 반복으로 몰입에 빠지게 하는 종교·주술적 울림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성을 표출하는 데 있어 ‘노래’만큼 적합한 것이 없을 듯하다. 그것은 현대 기성종교의 성전보다, 자연 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경외하는 존재에게 읊조리는 태곳적 상상의 장면이 먼저 연상된다. 아마도 인간의 종교적 성정을 표출하는 가장 원초적 방식이 자신의 몸으로 드러낼 수 있는 노래요, 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제천의식에서 행한 노래와 춤은 신을 향한 종교적 기원이었고, 가무歌舞를 담당하는 집단과 향유집단의 구분 없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제천의식에 동참했으리라는 것이 통설이다.
노래로써 신적 존재에게 다가가고, 종교적 성정을 표출하며, 때로 주술적 결과를 기대하는 일…. 이는 자기 표현의 메시지를 가락과 운율에 실어 누군가를 향해 ‘부르는’ 것으로, 성스러운 몸짓인 동시에 신명이 함께 하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스스로 종교인이라는 생각 없이 지극한 종교적 믿음으로 살아온 민중에게는, 노래가 삶에 리듬을 주듯 신성神聖과 소통하는 일 또한 일상의 위안과 같은 몸짓이었을 듯하다.
염불·염송은 때와 장소와 무관하게, 겉으로 혹은 속으로 읊조리며 종교적 심성을 표출해 온 불자들의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수행법이자 신앙 행위이다. 절을 하고 불공을 드리려면 대상이 필요하고, 독경讀經이나 사경寫經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지만, 일상의 삶 속에서 스스로의 신앙심을 표출하기에 염불만큼 적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듯 ‘노는 입에 염불’하면서 삶의 희로애락을 담고, 염불에 몰입하여 삼매에 드는 깊은 수행의 촉매제로 삼는가 하면, 의례에서는 불법佛法의 희열을 풀어내는 종교적 역동성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가장 단순한 가락의 노래인 염불·염송 소리에 한국불교의 기층성과 역동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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