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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바른 길]
우리가 중생으로 사는 이유 煩惱妄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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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7 년 6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9,60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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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정로> 1장의 요지는 자성(自性), 즉 자기의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자성을 본다는 것이 불성(佛性), 즉 워낙 부처님인 자기의 정체를 발견함에 다름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울러, 원래 갖추고 있는 그 불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무명(無明)으로 덮어 놓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여기 3장에서는 그 무명, 즉 번뇌망상의 정체가 적시되고 있다.

 

 


 

번뇌망상에 삼세(三細)와 육추(六麤), 즉 세 가지 미세한 것과 여섯 가지 거칠고 무거운 것이 있다는 점은 1장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그 삼세와 육추가 무엇인지는 본 연재 셋째 글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古鏡> 1996 겨울호).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삼세란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이며 육추란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을 말한다.

 

그러면 도대체 그런 망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성철스님은 현수 법장(賢首 法藏)이 <대승기신론>에 대해 해설한 글을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근본무명으로써 진여자성을 움직이면 삼세가 일어나며, 경계(境界)에 끄달려서 제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육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성은 본래 움직임 없이 고요한 진여 그 자체인데, 무명을 휘둘러서 그것을 작동시킴으로써 업을 짓는 일이 비롯되고[無明業相] ‘나’라는 것이 있게 되며[能見相] 아울러 대상이 있다고 보게 된다[境界相].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어낸 주관과 객관이 만나서 여섯 가지 거칠고 무거운 망상이 줄줄이 일어나게 된다.

 

이 설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좀 이상한 점을 볼 수 있다. 삼세와 육추를 다 아울러 간단하게 무명이라고 하되 굳이 나누자면 삼세를 근본무명이라 하고 육추를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 하는데, 지말무명은 물론 근본무명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날 터이다. 그런데 근본무명의 발단은 진여자성을 근본무명으로써 작동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무명으로써 무명이 발생한다고 하는 셈이다. 말만 가지고 따지자면 분명히 논법에 어긋나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우리가 무명을 일으키는 것은 무명 때문이라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떠올려 볼 만한 것은 우선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시이래(無始以來)’, 또는 ‘종무시래(從無始來)’라는 말이다. 중생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내내’ 깜깜하게 긴 잠에 빠져 있는데, 그 시원(始原)은 딱히 언제다 하고 잡을 것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이 워낙 그렇다는 것이다. 무명을 놓고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어디에서부터, 등등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왜 그런가? 무명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하는 물음을 일단 내걸어 놓으면, 무명의 어머니를 찾는 족보 따지기로 답이 나오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무명이니 뭐니 하는 것이 다 짐짓 하는 말[假]이요 무명이든 무엇이든 생기고 없어진다는 것이 다 허깨비[幻]라는 가르침을 다음으로 상기해 볼 만하다.

 

허깨비의 비유로는 허공의 꽃 이야기가 많이 쓰인다. 눈병 난 사람이 허공에서 꽃의 허깨비를 본다. 야! 거 참 신기하다! 저게 어디서 나타났는고? 궁금하기 짝이 없다. 자기의 눈이 고장났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다. 그런데 눈병이 나으니까 허공에 꽃이 안 보인다. 어! 거 참 이상하네! 그 꽃이 어디로 갔을까? 눈병 없이 내내 밝은 눈을 갖고 있던 사람은 그따위 궁금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눈병 때문에 잘못 본 꽃의 허깨비를 가지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 따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궁금증 자체가 눈병 때문에 생긴 망상이다.

 

허깨비에의 망상, 잘못 본 것을 철석같이 실재(實在)로 생각하는 망상의 연장일 뿐이다. 그 사람에게 해 줄 이야기는 자네 눈이 고장났었네,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일러주어도 스스로 확인하지 못하면 믿기 어려워한다. 그걸 안 믿으면 눈병이 났거나 낫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문제의 근원은 눈병을 눈병인 줄 모르고 제가 보는 것을 다 실제(實際)라고 생각하는 망상에 있다. 망상을 망상인 줄 모르는 데에서 망상이 비롯된다는 말은 그래서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중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불교 특유의 깊은 통찰과 진단을 가장 압축해서 표현한 말인 것이다.

 

무명으로써 진여자성을 작동시킴으로써 무명이 이룩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생은 진여자성을 가지고도 온통 무명을 지어내고 그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그러지 않으려면 무명을 개입시키지 말고 진여자성이 스스로 작동하도록 할 일이다. 무명으로써 진여자성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진여자성 그 자체가 주인공으로서 생각을 일으키고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진여자성이 무명에 의해서 작동하지 않고 그 자신이 본래 모습 그대로 작용하여 일으키는 생각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이다.

 

여기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의 한 대목을 떠올릴 수 있겠다. 망념이 문제라고 진단되니까 무념(無念)을 처방으로 내놓는다. 나중에 <선문정로> 6장 무념정종(無念正宗)을 읽으면서 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무념이라고 해서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무(無)는 망념이 없다는 말이고, 념(念)은 진여자성을 체(體)로 하여 그 용(用)으로서 일어나는 생각을 가리킨다. 즉, ‘망상이 없는 생각’이라는 뜻이지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목석이나 담벼락 같은 무생물의 상태이지 생명체의 상태가 아니다.

 

망상 없는 청정한 생각은 누가 하는가? 나의 진여자성이 하는 것이다. 아(我)로서의 내가 아니라 법신(法身), 연기법(緣起法)으로서의 내가 하는 것이다. 진여자성이 무명으로써 움직여 일어나는 번뇌망상으로 모든 것을 오염시켜 놓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의 청정한 진여자성에서 일어나는 청정한 지혜로써 활발발하게 부처님으로 퍼덕거리며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여태 무명으로 살았구나, 철석 같이 믿고 의지하던 것이 다 무명으로 지어낸 것이구나, 진여자성 그대로 살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자기가 본래 부처임을 보지 못하는 것이 번뇌망상의 원천이자 결과이다. 진여자성을 무명을 통해서 움직일 것이 아니라 그대로 보는 것이 번뇌망상을 여의는 방법이자 결과이다. 그것이 이른바 올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이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는 바른 깨달음에 대해서는 다음 장 ‘무상정각(無上正覺)’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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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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