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오래된 미래]
호흡에 대한 염처 수행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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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 2017 년 7 월 [통권 제5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48회 / 댓글0건본문
호흡 수행은 가장 널리 활용되는 명상 방법으로, 불교뿐 아니라 도교, 유교 및 각종 선도 수행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붓다 역시 자주 호흡에 대한 수행에 몰두했으며, 심지어 그의 깨달음이 호흡에 대한 사띠에 기초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붓다는 호흡 수행을 ‘고귀’하고 ‘신성’한 방법이라고 간주했는데,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서 널리 실천되고 있는 호흡 명상과 불교의 호흡 수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호흡수행에 대한 경전의 설명은 <염처경(念處經)>과 <아나빠나사띠 숫따(Ānāpānasati Sutta, 안반수의경)>에 주로 나타난다. <염처경>은 호흡 수행을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아나빠나사띠 숫따>는 4단계 위에 다시 12단계를 더하여 16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염처경>에 따르면 호흡 수행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진다.
이제 그는 숲이나 나무의 뿌리나 빈 오두막에 가서 앉는다. 그는 가부좌를 하고 몸은 곧추세우고 면전에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한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쉬는 것을 알고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쉬는 것을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쉬는 것을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쉬는 것을 안다.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나는 몸 전체로 경험하며 숨을 들이쉴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나는 몸 전체로 경험하며 숨을 내쉴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나는 몸의 구조를 고요히 하며 숨을 들이쉴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나는 몸의 구조를 고요히 하며 숨을 내쉴 것이다.”
위의 경문에서 숲이나 나무뿌리, 빈 오두막은 호흡수행의 조건으로 제시되어 있다. 또한 적절한 자세, 즉 가부좌와 등을 바르게 세우는 좌법 역시 호흡수행을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이제 바른 자세가 완성되면, 다음으로 ‘면전’을 확립해야 한다. 그런데 ‘면전’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면전’은 호흡수행을 할 때 집중하는 신체 부위를 일컫는다. 아비달마와 그 주석서에서는 ‘면전’을 들숨과 날숨을 가장 잘 알아차릴 수 있는 콧구멍 근처라고 이해하고 있다. ‘면전’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사띠가 확고해져서 주의가 집중되어 평정한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면전’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옹호하면서, 아날로 스님은 호흡수행의 과정에서 ‘면전’을 ‘콧구멍 근처’로 보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배나 가슴 등 몸의 다른 부위에 집중하는 방법이나, 또는 특정한 신체 부위에 집중하지 않고 호흡 그 자체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호흡수행이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비유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아날로 스님이 현대 명상가들이 개발한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는 호흡수행 방식, 즉 콧구멍 이외에 배나 가슴에 집중하는 방식은 예로부터 다른 종교 수행법에서도 널리 사용된 것이다. 특히 도교나 유교에서는 ‘단전’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밖에 현대적 수행법에서는 장소와 자세에 대한 요구사항이 상당히 완화되었는데, 시끄러운 지하철에서나 신호등을 기다리거나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호흡수행을 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처럼 호흡수행은 모든 국면에서 실행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행법이다. 하지만 다른 수행법과 불교수행의 차이도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과정에 대한 인지, 즉 사띠에 있다.
그러므로 호흡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을 할 때마다 길다, 짧다고 호흡의 길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들숨과 날숨, 그리고 호흡의 길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수행법은 호흡의 길이를 조절하고 통제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불교수행법에서는 호흡의 길이를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어나는 그대로 호흡의 과정을 지켜보고 그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을 중요시한다. 요약하면, 불교에서 호흡수행은 호흡의 깊이와 길이를 증가시키기보다 호흡의 과정에 대한 인지적 집중상태를 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생리적 과정으로서 호흡을 통제하기보다 호흡에 대한 사띠를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수행이 진행됨에 따라 숙련된 선반공이 선반을 점점 더 정교하고 섬세하게 깎는 것처럼 호흡에 대한 사띠도 더 정밀해진다. 길고 거친 호흡만 알아차리던 것에서 짧고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는 데까지 호흡에 대한 사띠가 세밀해진다. 또한 이처럼 호흡에 대한 사띠가 증가하면 호흡 역시 몸의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점점 더 짧고 미세해진다.
‘면전’이 확립하고 나면 호흡수행은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그 세 번째 단계는 ‘몸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고, 그 네 번째 단계는 ‘몸의 구조’를 고요히 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관찰의 과정을 ‘안다’는 표현 대신 ‘훈련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이 단계에서 수행자의 노력이 더욱 더 요구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몸 전체’로 경험한다는 것은 사띠의 확장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하나의 호흡으로 몸 전체에 대한 사띠가 이루어짐을 의미하고, 비유적으로 이해하면 호흡을 할 때마다 처음, 중간, 마지막에 대한 사띠가 충분하게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호흡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긴지 짧은지 알면서 그 호흡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차리게 된다면 호흡에 대한 사띠는 몸의 다른 부분, 나아가 몸 전체에 대한 사띠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이해와 비유적 이해는 통합될 수 있다.
다음 네 번째 단계에서 수행자는 ‘몸의 구조’를 고요하게 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몸의 구조’를 들숨과 날숨이라고 정의하면서 호흡이 고요해지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반면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호흡에 대한 사띠가 이 단계에 진입하면 모든 움직이려는 경향을 진정시켜 고요하고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데 아날로 스님이 지적하듯이 호흡이 고요해지면 몸 역시 편안해지고 반대로 몸이 편안해지면 호흡이 더 고요해지기 때문에 이 두 해석은 어떤 것을 선택하든 모순되지 않는다.
이처럼 호흡과 몸이 고요해지면 이제 몸의 성질에 대한 사띠가 더 정밀해진다. 또한 느낌이나 정신적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도 계발될 수 있다.
<아나빠나사띠 숫따>에서는 앞의 4단계에 12단계를 더하여 16단계의 호흡수행을 제시하는데, 즐거움과 행복을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지멸과 내려놓음에 대한 관찰까지 사념처 전체의 과정이 호흡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계가 선정을 위한 기본적인 요건이라면 나머지 12단계는 완전한 선정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단계로 제시된 즐거움과 행복의 경험은 선정의 수행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두어야 한다. 이처럼 호흡수행을 통해 몸에 대한 사띠가 자연스럽게 느낌, 마음, 법에 대한 사띠로 점차 확장되고 나아가 모든 염처의 계발과 칠각지까지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호흡명상을 통해 사마타를 계발하느냐, 위빠사나를 계발하느냐의 문제이다. 16단계를 거치면서 주관적인 경험에서 점점 확장하여 미묘한 경험을 인지하게 된다. 반면 삼매를 성취하면 경험은 점점 하나로 통합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들숨과 날숨, 그와 관련된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호흡에 대한 사띠 수행은 깊은 집중력을 계발하여 통찰력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다. 반대로 호흡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강조하면 의식은 다양하고 감각적인 경험의 영역에 머물러 깊은 통찰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통찰력이 계발되려면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16단계의 수행은 전적으로 사마타만 계발하는 것도 아니고 위빠사나만 계발하는 것도 아니다. 호흡의 16단계 수행은 단순히 집중력만 높이는 사마타 수행뿐 아니라 호흡에 대한 사띠를 계발함으로써 평안함과 통찰력을 높이는 위빠사나 수행의 면모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호흡의 숫자를 세는 수식관(數息觀)이 집중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집중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방법이지만 마음을 무디게 할 수도 있고 마음의 평온함보다 마음의 구성적인 활동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는 아날로 스님의 주장도 귀기울여볼 만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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