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거사선]
유교 심학을 완성한 금산대사의 후신 왕양명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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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4 년 12 월 [통권 제2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755회 / 댓글0건본문
대인은 천지만물로써 일체를 삼는다
지난 호에서는 유교심학을 완성한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의 전생의 몸이 금산 대사였다는 일화를 그의 선(禪)사상과 더불어 살펴보았다. 아울러 왕양명이 주창한 심학의 핵심용어인,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본래 성품인 ‘양지(良知)’에 대해서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양지’의 또 다른 명칭인 ‘명덕(明德)’을 중심으로 그의 지행합일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은 왕양명의『대학문(大學問)』에 나오는 문답이다.
“대학(大學)이라는 것은 옛날 선비들이 대인의 학이라고 했는데, 감히 묻겠습니다. 대인의 학이 어찌 밝은 덕〔明德〕을 밝힘에 있습니까?”
왕양명 선생이 대답하기를, “대인은 천지만물로써 일체를 삼는다.〔大人者以天地萬物爲一體者也〕그 천하를 한 집과 같이 보고 중국을 한 사람과 같이 본다. 만약에 육체를 너와 나라고 분리하는 것은 오직 소인이다. 대인이 능히 천지만물로써 일체를 삼는 것은 뜻으로 억지 조작을 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그 마음의 인(仁)이 본래 이와 같아서 그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오직 대인뿐이리오. 비록 소인의 마음일지라도 또한 그러하지 아니할 것이 없건마는 저들이 도리어 스스로 적게 만든 것이다.”
왕양명 진영
여기서 누구나 본래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밝은 덕〔明德〕’이라고 한다. “대인은 그 마음의 인(仁)이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어질 인(仁)이 바로 ‘명덕’이다. 우리는 명덕이 흐려서 천지만물이 따로따로 무수하게 보이지만, 깨달아서 밝힌 명덕자리에서 보면 천지만물이 하나라는 것이다. 법성게(法性偈)의 “법성이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없다〔法性圓融無二相〕”는 말도 천지만물이 본래 하나라는 뜻이다. 물론 대인군자가 아닌 소인들도 마음의 본체는 대인과 똑같다. 다만 지극히 큰 마음이라야 천지만물이 하나가 되는데, 소인들은 마음을 크게 쓸 줄 모르고 공연히 축소해서 옹졸하게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인에게도 인(仁)의 마음이 있어서 남에게 ‘인심(仁心) 쓴다’고 말한다. 잔인(殘忍)한 마음이 아닌 인심을 쓰는 것은 본래의 마음, 명덕 그대로 구김새 없이 쓰는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명덕’, 즉 ‘양지’를 거듭 명쾌하게 밝힌 시가 있는데,『왕양명문집』에 나오는 ‘답인양지시(答人良知詩)’다.
양지란 바로 홀로 알 때이니〔良知卽是獨知時〕/
양지 밖에는 다시 아는 것이 없다.〔此知之外更無知〕/
어떤 사람이든 양지가 있지 아니하리요마는〔誰人不有良知在〕/
양지를 알아 얻음에 바로 그것이 무엇이냐.〔知得良知却是誰〕/
양지를 알아 얻음에 바로 그것이 무엇이냐.〔知得良知却是誰〕/
자기 자신이 아프고 가려운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이라.〔自家痛䴸自家知〕/
만약 자신이 아프고 가려운 것을 타인에게 묻는다면〔若將痛䴸從人問〕/
아프고 가려움을 다시 물어서 무엇하랴.〔痛䴸何須更問爲〕
이 게송은 왕양명에게 어떤 제자가 양지를 물은 데 대한 답으로 지은 시다. 이 게송에 따르면 자기 자신이 혼자 스스로 아는것이 양지이며, 양지가 선악시비 등을 모두 안다는 것이다. 양명은 양지를 말과 문자로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선사가 말하듯이 ‘자가통양자가지(自家痛䴸自家知)’라, 자기 자신의 아프고 가려움은 자기가 아는 이것이 양지이지, 양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통양(痛䴸)’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五陰)중 수음(受陰)에 해당한다. 수(受)는 좋고 나쁨, 고통과 즐거움 등의 느낌을 말한다. 이러한 통양은 스스로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물이 차갑고 뜨거운 것을 적셔봐야 알고, 사과 맛도 먹어봐야 확실히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느낌 이외에 감정이나 감각, 인식과 판단 등 모든 정신작용이 양지 즉, 자성(自性)에서 나온 것이다.
육조혜능 선사는“세상 사람들의 본래 성품이 청정해서 모든것이 자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미혹과 망령을 없애고 안팎을 밝게 사무치면 자성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니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다”(『육조단경』)고 설했다. 황벽 선사도“일체 모든 것은 오직 한 마음〔一心〕뿐이다”, “일체 모든 것은 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것이다”(『전심법요』)라고 했다. 이렇듯 양명의 양지와 명덕은 선종의 자성청정심, 일심, 본래 성품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심학은 이론상 선종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 실천론은 보다 현실적이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통한 ‘치양지(致良知)’로 완성된다. 이는 마음과 이치(理), 언행이 하나 된 경지로써, 인간이 본래부터 타고난 성품(良知)을 완성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명학의 완성과정을‘교(敎)의 삼변(三變)’이라 해서 용장 오도(悟道)의 ‘심즉리’(37세), 귀양서원의 ‘지행합일’(38세), ‘치양지’의 제창(49세)으로 구분하는 것도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앎이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이란 앎의 완성
1506년, 어린 황제에게 환관의 횡포를 탄원하던 신하들이 옥에 갇히자 양명은 이들을 구하고자 지도자격인 유근(劉瑾)의 파면을 상소했다가 오히려 장형 40대를 맞고 좌천되고 말았다. 그는북경에서 5,000Km나 떨어진 용장(龍場)이라는 곳에 역승(驛丞)이라는 말단 관리로 좌천되었다. 당시 용장은 땅 속에 굴을 파고 생활을 하던묘족(苗族)의 변방이었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조정에서 언제 자객이 올지 모르고 오지에서 병에 걸려 객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양명은 2년간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지녔던 명예와 지위, 재산 등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용강산(勇剛山) 자락에 굴을 파놓고밤낮으로 침묵 속에 정좌(靜坐)하며 도를 닦았던것이다.
그렇게 수도생활을 하면서 양명은 성인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갈 것인가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는 잠자리에서 의문의 해답을 찾다가 갑자기 크게 깨달았다〔大悟〕. 오랫동안 도를 찾아 헤매던 결과로“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충분하며, 이전에 바깥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것은 잘못임”을 깨달았다. 그토록 갈구하며 찾아 헤매던 도가 자신의 마음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안 것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심즉불(心卽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이었는데, 그것을 그는 유가적 표현으로‘심즉리(心卽理)’라 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최대 고민거리였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참 뜻을 비로소 확연히 안 것이다. 이 험한 귀양지에서 마침내 진리를 깨달았으니, 이를‘용장오도(龍場悟道)’라한다.
양명 철학의 특성은 그가 주자의 격물치지를 비판하는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 주자는 격물(格物)을 일(事)과 사물(物)에 담긴 이치(理)를 탐구하는 것, 곧 객관 사물로부터 그 이치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에 대해 양명은“격물치지는 내 마음의 양지를 모든 사물에 다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양지란 하늘의 이치이다. 내 마음의 양지, 즉 하늘의 이치를 모든 사물에 다하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양지의 체득은 이지적 탐구의 결과라기보다는 스스로 깨닫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실천에 있어서도 주자의 먼저 알고 나중에 행한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반대하고, “앎이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이란 앎의 완성”이라고 하는 지행합일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에게 앎은 곧 행이었기에 그는“아직까지 알고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아직 알지못한것이다.”(『전습록』)라고 선언했다.
이런 말은 간단해 보이지만,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들어, 우리가 보살행이 수행의 중요한 덕목임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핑계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를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의 행이 여전히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있다면, 그 깨달음은 거짓인 것이다. 나의 행동과 나의 앎은 분리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것이 곧 깨침의 수준인 셈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라
56세 때 광둥·광시의 묘족(苗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명은 병든 몸으로 출전하여 진압한 후 돌아오는 길에 과로와 고열로 입적하였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발 전야에 양명학의 진수를 논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4구결(四句訣)이 있는데, 이를 참구해보자.
마음의 본체는 본래 선과 악이 없는 것이지만〔無善無惡是心之體〕/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意〕의 작용 때문이다〔有善有惡是意之動〕.
그러므로 이미 나타난 선과 악을구 별하여 아는 것이 양지이며〔知善知惡是良知〕,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格物)이다〔爲善去惡是格物〕.
선과 악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본래면목은 양명이 말한 양지와 다르지 않다. 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본래부터 아는 마음인 양지(良知)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인 양능(良能)을 가진것은 대인과 소인, 성인과 범부가 동일하다. 다만 성인의 양지는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의 해와 같고, 현명한 사람의 양지는 엷은 구름이 떠 있는 해와 같으며, 어리석은 사람의 양지는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의 해와 같다고 했다. 비록 밝고 어두운 차이는 있지만, 흑백을 구분할 수 있는 해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양명학의 종지인‘치양지(致良知)’는 지식이나 알음알이에 기대어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늘 반성하며 성의를 다해 행동함으로써, 본래의 선한 마음을 회복하여 올바른 삶을 살려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양명학은 수많은 세월 동안 관변철학으로 화석화된 유학을 사람이 가진 본래의 명덕과 인(仁)을 바탕으로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일깨운 실천철학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행합일사상은 성품을 깨달아 출세간에만 머물기 쉬운 선종을 일상의 삶 속으로 녹아들도록 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선종 위주의 한국불교는 ‘본래성불’만을 강조하여 근본지에 안주하면서, 세간의 차별지와 후득지에는 어두워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양명의 지행합일사상을 돌아보면, 수행자들이 깨달은 근본지혜를 세간에 적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이끄는 묘용(妙用)을 발휘하는 안목이 새롭게 계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이번호를 끝으로 김성우님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옥고를 보내주신 김성우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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