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거사선]
유리병 속에서 벗어난 대자유인, 육긍 대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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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4 년 2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5-29 14:19 / 조회7,418회 / 댓글0건본문
우리가 선종 특히, 간화선이 성립되기 이전의 조사선(祖師禪)을 말할 때 육조혜능 선사 그 다음으로 떠올리는 인물은 아마도 마조도일(馬祖道一) 대사일 것이다. 조사선의 실질적인 확립자로 일컬어지는 마조 대사의 입실(入室) 제자는 무려 139인, 문하에서 직접 법을 계승한 선사는 88인에 이른다고『조당집』, 『경덕전등록』등에 전하고 있다. 은둔 선승까지 더한다면 문하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사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3대사(大士)로 불리는 백장회해, 남전 보원, 서당지장 선사이다. 3대사 문하에는 문인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도(道)가 높은 쟁쟁한 거사들이 수두룩했지만, 그 가운데 마조대사 문하의 방거사와 비견될 수 있는 재가 선객을 꼽자면 아마도 육긍(陸亘: 764~834) 거사일 것이다.
육긍은 강소성 소주 생(生)으로 자가 경산(景山)이다. 당나라 헌종 때 중앙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뒷날 안휘성의 관찰사가 되었다가, 관리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실세 요직인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기에 육긍 대부(陸亘大夫)라 불리웠다. 일찍이 남전(南泉: 738~834) 선사의 지도아래 뛰어난 안목을 체득한 거사로서『전등록』등에는 남전 선사와 다수의 중요한 법거량을 남기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먼저, 김성동 작가의 소설『만다라』에 소개되어 세간에서도 널리 회자된 ‘병 속의 거위’화두를 중심으로 ‘지금 여기’눈앞의 삶에 대해 참구해보고자 한다.
육긍 대부가 안휘성 선주 지방의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남전 선사를 참문하고 여쭈었다.
“저는 집에서 유리병에다 거위 한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위가 점점 자라 병 밖으로 꺼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병을 깨뜨리지 않고 거위를 꺼내고 싶습니다. 물론 거위를 다치지 않게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거위를 제대로 꺼낼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남전 선사가 “대부여~!”하고 부르자,
대부가 “예!”하고 대답했다.
남전선사가 말했다. “ 나왔구려.”
이에 대부가 깨친 바가 있었다.
육긍 대부가 이 공안을 질문할 당시는 아마도 남전 선사의 도(道)를 저울질해보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유리병 속의 거위’문제는 당시에 유행하던 화두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육긍 대부는 큰 지혜를 갖춘 선지식이 아니고서는 풀기 어려운 이 난제를 들이밀어 남전 선사의 응수를 타진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남전 선사의 지혜보검에 의해 한 방에 박살나고 만다. 남전 선사의 “대부여~!”하는 일성은 마치 준비된 것처럼 자동적으로 나온 지혜작용으로서 백전노장이 아니고서는 발휘하기 어려운 순발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남전 선사는 왜 갑자기 대부를 부른 것일까?
본래면목 계합해야 유리병에서 벗어날 수 있어
남전 선사가 “대부여~!”하고 부른 것은 유리병 속에 갇힌 육긍 대부의 잠든 영혼을 깨우는 천둥소리이자, 그의 너무나도 오래된 온갖 고정관념과 번뇌망상, 집착, 아상(我相)으로 둘러싸인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나 다름 없다.
그리고 육긍 대부가 얼떨결에 “예!”하며 응답한 것은 그의 본래면목이자 자성이 아니던가. 이름 부르는 선사의 목소리를 듣고, “예”하며 대답 할 줄 아는 이 당처(當處)는 한 번도 유리병 속에 갇힌 적이 없는, 아니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은 적이 없는, 본래부터 나고 죽음이 없는, 그 어디에도 매이거나 의지함이 없는 참사람 즉, 무위진인(無位眞人)이자 무의도인(無依道人), 불성(佛性)이 아니던가.
그러니, 대부가 “예!”하고 응답하는 순간은 무량한 억겁 전부터 해탈되어 있고, 깨달아 있던 본각(本覺)이 비로소 시각(始覺)과 상봉하는 깨침의 순간이 아닌가. 대부는 진리를 직지(直指)하는 선사의 “(병 속에서) 나왔구려!”하는 가르침에 비로소 자기의 본래면목을 확인하는 감격적인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육긍 대부는 육신과 생각을 자기로 알고 스스로를 구속해왔던 병 속의 거위에서 거듭나 비로소 자유를 얻어 창공을 나는 대붕(大鵬)이 된 셈이다.
우리가 이 공안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장면은 바로 남전 선사가 “대부여~!”하고 불렀을 때, 육긍 거사가 “예!”하고 응답하는 장면이다. 선사가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학인이 “예!”라고 대답 할 때, “이것이 무엇인가?(是什麽)”하고 되묻는 것이 바로 1700공안의 근본인 ‘이뭣고?’화두의 전형이다.
육긍 대부의 스승 남전 선사 진영
남전 선사가 이 대기대용을 쓴 것은 아마도 스승인 마조 대사가 이러한 방편을 수시로 사용해서 무수한 선승들의 눈을 뜨게 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마조록』에는 “도(道)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했다가 마조 대사로부터 방(棒)을 얻어맞고 돌아설 때, 대사가 학인의 뒤통수에다 대고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외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심지어는 상당법문 시에 법문을 들으러 온 대중을 쫓아버리고는 그들의 뒤에서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제시하기도 했다.
“아무개야~!”하고 부를 때 “예!”하고 대답하는 공안의 원형은 선종의 초조인 가섭 존자가 제2조인 아난 존자에게 법을 전하는 ‘가섭찰간(迦葉刹竿)’화두에서 볼 수 있다.
아난이 가섭 존자께 여쭈었다.
“세존께서 금란가사 외에 따로 무슨 물건을 전하셨습니까?”
“아난아!”
“네!”
“문 앞의 찰간(사찰의 깃대)을 꺾어버려라.(倒却門前刹竿箸)”
가섭 존자가 “아난아~!”하고 부르자, 아난 존자가 “예!”하고 대답하는 순간, 가섭과 아난의 본래면목이 전부 드러났다. 말 그대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이뤄졌기에 가섭 존자는 “(법회를 알리는) 찰간의 깃발을 내리라”고 지시하며, 법문은 이미 끝났음을 선언한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을 들어보이자 미소로 화답(拈華微笑)’하여 당처에서 불법을 전해 받은 가섭 존자가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을 다시 아난에게 부촉(咐囑)하는 역사적인 순간인 것이다.
이름 부르고, 대답하는 그 당처가 열반묘심이다
조사 공안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무개야~!”- “네!”하는 선문답이 이토록 깊은 뜻을 지닌 격외구(格外句)임을 모르는 수행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 화두를 온몸으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무의식까지 철저히 투과한다면 모든 공안의 ‘문 없는 문의 빗장(無門關)’이 저절로 열리는 날이 올 것이다.
만약, 아직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독자들은『경덕전등록』에 나오는 바라제(婆羅…提) 존자가 이견왕(異見王)에게 설한 ‘불성법문’을 경청하는 것이 좋다.
“태(胎)에 있으면 몸(身)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人)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하고, 코에 있으면 ‘냄새 맡는다’하고, 혀에 있으면 ‘말한다’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는다’하고, 발에 있으면 ‘걷는다’고 합니다. 나타나면 모래같이 무수한 세계를 감싸고, 거두면 하나의 미세한 먼지 속에 존재합니다. 아는 이는 이것을 불성(佛性)이라 부르지만, 모르는 이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릅니다.”
이견왕은 이 말을 듣자 심안(心眼)이 즉시 열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 글을 쓰는 필자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한자리에서 마음의 문이 열리는 귀중한 인연이 펼쳐진다면 “아무개야~!”하고 부르는 당처, “예!”하는 소리를 듣는 형상 없는 당처가 바로 불성임을 깨닫는 시절인연이 도래하리라. 지금「고경(古鏡)」이란 마음거울을 통해 이러한 ‘조사의 표방(標榜)’을 접한 수행자들은 설혹, 당장 돈오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기연으로 반드시 불조의 진신(眞身)을 친견하는 때가 온다고 확신한다. 유리병 속에서 벗어난 거위처럼, 우리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일상의 삶속에서 대자유를 구가하는 제2의 육긍 대부가 될 것을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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