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 길라잡이 ]
법문을 들으면서 화두하고 능엄주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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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스님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10:47 / 조회1,234회 / 댓글0건본문
질문
요즘 유튜브를 통해 성철 큰스님의 백일법문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문 내용 중에 “내 법문을 들으면서도 화두를 놓쳐서는 안 되며, 화두가 없는 사람은 화두를 받고는 그 화두를 들면서 법문을 들어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법문을 들으면서 화두를 든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요?
제 경우를 비추어보자면, 저는 아직 화두를 하지 않고 절과 능엄주를 위주로 하고 있어서 오고 갈 때 또는 집안일을 할 때 능엄주를 합니다. 그렇다면 법문 들으면서 화두 대신 능엄주를 해도 되는 건지? 법문만 들어도 이해하기가 힘든데 능엄주를 하면서 법문을 듣는다는 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큰스님과 같은 탁월한 분들이나 가능할 것 같은데 저희들 수준을 너무 높게 보신 것은 아니신지요?
답변
모든 수행은 간단間斷 없이, 즉 사이가 끊어짐 없이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특히 선禪 수행에선 이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 조계종曹溪宗은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참선 수행법을 위주로 합니다. ‘간화선’은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풀릴 수 없는 화두話頭라는 의문구疑問句를 심중心中에 넣고 참구參究함으로써 본원本源을 깨우쳐 가는 수행법입니다. 이 간회선에서의 생명은 아무리 궁리窮理를 해도 알 수 없는 화두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켜 극대화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두에 대한 의심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잠시 잠깐이라도 화두를 놓아버려서는 안 됩니다.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默·동動·정靜간에, 즉 내가 어떤 상태에 있던지 늘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애를 써서 마침내 “가슴속이 온통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일부러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짓지 않아도 이미 생겨난 의심이 내 가슴에서 떠나질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꽉 차 있는 마음에서 하게 된다.”라는 상태가 되면 비로소 ‘힘을 얻었다’, 즉 ‘득력得力을 했다’라고 합니다. 득력이 되면 공부의 성취는 시간문제라고 합니다.
성철 큰스님은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 즉 성불成佛에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신 분입니다. 각자 자기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한 보물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찾는 방법으로써 비중 있게 제시한 것이 바로 참선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철 큰스님께서 참선을 해야 하고,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치는 것’, 이것이 공부의 요체要諦요 생명인데, 이것으로 바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에둘러가지 말고 공부의 요체를 향하여 곧바로 실행해 가자는 것입니다. 화두 참선은 이러한 수행법입니다. 공부 수행을 하다가 이런저런 곡절曲折을 만나면, 그에 따른 현실적 방편을 찾아 이것저것 해보면서 깊이를 더해가지 못하고 겉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부에 대한 초심初心을 잃고, 현실적 문제 해결이나 사상적 관념에 빠지는 일종의 주主를 잃어버리고, 부副를 쫓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늘 본분사本分事를 잃지 말고, 어떤 상황이나 경계에서도 마음은 늘 그걸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가는 방법의 하나로 화두 참선을 제시하는 것이며, 심중心中에 존재의 본원本源에 대한 의문구疑問句인 화두를 항상 끊김이 없이 품고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철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중에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화두 참선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의심이 일어나면 그건 마치 블랙홀과 같아서, 일상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더라도 가슴을 꽉 채우고 있는 의심이 의식의 주主가 되어 여타의 행위가 진행되는 심리적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득력得力’입니다.
화두 참선법을 주 수행법으로 삼았다면 이런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지어 가야 되겠지요. 성철 큰스님의 말씀은 결국 이런 득력의 상태가 되어서 법문을 듣든지, 다른 무언가를 하든지 늘 심중에 화두 의심이 있도록 해야 한다는 화두 참선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화두에 의심이 자연스럽게 붙지 않고 있어서, 의심이 일어나도록 의식적으로 화두의 전구前句와 후구後句*를 되새기며 반복해 가는 과정에 있을 때입니다. 화두 하나에만 매달려도 집중이 쉽지 않은데, 다른 것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화두에 대한 집중도 잃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컨대 법문을 들으면서 화두의 전구, 후구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능엄주를 하면서 화두에 의심이 일어나도록 집중해 갈 수 있을까요?
법문을 들으면서 능엄주를 한다
참선參禪과 주력呪力은 성격이 다릅니다. 참선은 화두에 대한 의심을 키워나가는 것인 데 반해, 주력은 진언眞言의 소리 그 자체를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으며 하는 것입니다. 진언 수행은 마음속에서 어떤 의미를 느끼거나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진언의 음音을 반복하여 소리 내는 것이기에 그 소리 자체를 놓치면 무미건조한 행行이 되기 십상입니다.
진언 수행, 즉 주력의 생명력은 소리에 있습니다. 때문에 주력을 하는 동안은 진언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에 집중해야 하기에 다른 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능엄주는 양量이 길고 비슷한 음이 많아서 그 자체로 고도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하다가 막히거나 비슷한 다른 곳으로 넘어가서 하게 됩니다.
이런 능엄주를 법문을 들으면서 한다면, 두 개 다 놓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능엄주를 하면서 화두를 든다
혹 어떤 분들은 능엄주를 하면서 화두를 들려고 애를 쓴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화두는 어떤 상태에서도 끊김이 없이 들어야 한다고 하니 주력을 하는 시간에도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평상시에 화두에 의심이 붙지 않는 사람이, 그래서 의심을 일으키려고 애써야 하는 상황에서 능엄주를 한다고 의식의 집중을 분산시키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서로 방해되어 둘 다 잘 안될 것입니다.
화두에 대한 힘을 얻은 상태, 즉 득력의 상태가 된 사람에게는 능엄주를 하든 뭘 하든 가슴속에 화두에 대한 의심의 답답함이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능엄주를 하면서 화두가 또는 화두를 들면서 능엄주가 동시에 되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이런 득력의 상태가 아니라면 능엄주 하는 동안에는 능엄주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
참선이나 기도(아비라, 능엄주, 절 등)를 하는 이유와 목적은 다 같습니다. 아니 같아야 합니다. 주력을 위주로 하는 분도 주력을 하는 이외 시간에 자기 자신의 근원을 탐구하는 참선의 정신과 행行이 필요합니다. 참선을 위주로 하는 분도 불보살님의 힘과 공덕이 들어 있는 진언 수행을 병행함으로써 근원을 찾아가는 데 걸림이 되는 각종 장애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화두 참선법과 진언 수행법 모두 불보살님들과 역대 큰 스승님들이 우리들을 위해 베풀어 놓으신 아주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적절히 맞게 쓸 수 있다면 상승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선을 하든 기도를 하든 기본 바탕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참회의 마음입니다. 지나온 삶에 대한 참회가 바탕이 될 때, 자기 자신의 단단한 습기가 누그러져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존재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삶이 보다 순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회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훌륭한 방법이 있습니다. 절 수행이 그것입니다. 일상에서 할 수 있다면 매일 108배 이상 절을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經典과 어록語錄을 공부하고 이해하여 길을 가는 데 지침으로 삼고, 실참실수實參實修의 수행을 통하여 이를 자신에게 적용하며 사는 향기로운 삶이기를 바랍니다.
※ 정림사 일행스님의 글을 더 보실 분은 https://cafe.daum.net/jeonglimsarang을 찾아주세요.
* 화두話頭는 전구前句, 후구後句로 구성되어 있다. ‘마삼근麻三斤’의 화두를 예로 든다면 ‘부처를 물었는데’는 전구이고, ‘어째서 삼서근이라 했는가?’는 후구이다. 한동안 전구, 후구를 같이 되새기며 들다가 익숙해지면 후구만 들어도 의심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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