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한국선의 메카 희양산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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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4 16:32 / 조회940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7 | 남종선 전래와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형성 ⑤
‘한국선의 정신과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가진 사림들은 누구나 희양산 봉암사에 이르게 된다. 그 이유는 한국에 선을 최초로 들여온 것이 희양산문과 관련이 있고, 남악의 홍척과 북악의 도의를 거처 북종선과 남종선이 종합된 한국적인 선이 희양산문의 개조 도헌에 이르러 이곳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개산조 긍양은 폐허가 된 봉암사를 중창하여 태조와 혜종과 정종으로부터 극진한 존경을 받았고 광종의 스승이 되었으니, 그의 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현대 한국선이 ‘봉암사 결사’를 통해 되살아나 오늘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희양산문의 개조 도헌과 개산조 긍양 사이의 불연속과 연속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한국 모두 정치 사회적 상황은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든다. 중국은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하고 960년 송나라가 건국될 때까지 오대십국으로 분열되었으며, 한반도 역시 900년 후백제가 세워진 이후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지방의 호족 세력이 할거하여 경쟁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중국의 선종은 만개滿開하여 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고, 마조계에서 점차 석두계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후삼국 시기 한국 선종 내부의 큰 사건을 살펴보면 도선의 풍수·도참사상의 유행과 사무외대사(이엄·여엄·형미·경유)의 출현 그리고 긍양에 의해 희양산문의 법맥이 북종선에서 남종선으로 교체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모두가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사건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고려의 건국으로 인해 다양한 선사들의 활동들 가운데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거나, 사실 이상으로 더 부풀려진 것들일 수도 있다.
희양산문의 개조는 지증국사智證國師 도헌道憲(824~882)이고, 개산조는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878~956)이다. 그런데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보조체징이 자신의 선법이 명적도의의 선법을 계승하고 있다고 분명히 천명하고 있는 점에 비하면, 희양산문의 개산조인 긍양이 과연 개조 도헌의 선법을 계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지난 2월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희양산문의 법백에 대해 최치원은 『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서 ‘쌍봉도신→법랑→신행→준범→혜은→도헌’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고려 이몽유李夢遊가 찬술한 『정진대사원오지탑비문』에는 긍양의 법계를 ‘조계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창주신감→진감혜소(혜명)→도헌→양부→긍양’으로 밝히고 있다.
‘사법嗣法’의 교체! 만약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이것은 긍양의 선택인가, 긍양의 문도들의 선택인가, 그것도 아니면 비문을 지은 이몽유의 각색인가? 선사들의 존재 이유는 불조혜명佛祖慧命을 잇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한국 선종사에 있어서 결코 묵과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엄중함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최치원과 지증국사 도헌의 만남
도의와 홍척과 혜철은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선법을 받고 돌아온 선사인가, 아니면 서당의 선문을 일군 주역들인가? 도의는 37년을 당나라에서 머물렀다. 『조당집』과 『전등록』에는 서당의 법을 이은 이로 단 네 명의 이름만이 올라 있는데, 그 가운데 세 명이 신라인이다. 마조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서당과 백장과 남전이 으뜸이고, 당시 만여 명이 서당을 찾았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도의와 홍척이 중국 선종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자못 크다. 그럼에도 최치원은 홍척과 도의보다 오히려 당나라에 구법의 길을 떠나지 않았던 지증국사 도헌을 더 높게 받들었고, 심지어 살아생전 도헌을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나말여초 선사상에 다가가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최치원의 『사산비명』이다. 그중에서도 신라에 선종이 전래된 배경과 선사들의 면모를 개괄할 수 있는 글로는 단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문」을 꼽을 수 있다. 이 비문은 최치원이 885년(헌강왕 11)에 왕명을 받아 짓기 시작하여 무려 8년간이나 고민을 거듭하다 893년(진성여왕 7)에야 완성한 것이다. 기간도 가장 많이 걸렸지만 그 이전에 지은 진감혜소의 비문이나 낭혜무염의 비문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주인공(지증도헌)의 선종사적 위상을 밝히고 있다. 이 비문에 도의와 홍척이 등장하지만 도헌에는 미치지 못하는 선승으로 취급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필자는 눈을 뗄 수가 없다.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嶽의 홍척洪陟이여! 따오기의 날개를 드리며 대붕새의 날개를 폄과 같다. 해외에서 왔을 때는 도를 누르기 어려웠으나, 멀리 뻗은 선의 물줄기가 막힘이 없구나. 쑥이 삼밭 가운데에 의탁하면 스스로 곧으니, 구슬을 옷 속에서 더듬을 것이요, 이웃에게 빌리는 것을 그만두었네.
담연 자약한 현계산의 선지식(도헌)이여! 열두 인연[十二因緣]이 헛된 꾸밈이 아니로다. 어찌 줄을 잡고 또한 말뚝을 박을 것이며, 어찌 종이에게 붓을 핥도록 하고 먹물을 머금게 할 것인가.
저들(도의와 홍척을 말함)이 혹 멀리서 배우고 돌아와 포복匍匐(활동하였다는 뜻)했지만, 나(지증대사를 말함)는 앉아서 고요히 마적魔賊을 항복받았노라.(주1)
“최치원에게는 분명한 ‘동인東人’ 의식이 있었다.”라는 최영성 교수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도헌은 신라 땅에 앉아서 고요히 마적을 항복 받았노라.”라고 최치원은 그의 위대성을 노래했다. 비록 북종선의 법맥을 멀리 이었지만, 이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깨달음에 충실했던 도헌의 정신세계를 최치헌은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이 글을 완성하고 난 이듬해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벼슬을 버리고 산천을 떠돌았다. 어느 비가 내리는 가을밤에 최치원은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부는데 어디선가 애닲은 노래 들리네
옛말에 지음지우知音之友라 하였거늘 그 소리 이해하는 자 드물구나.
깊은 밤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는 예전 같은데
등불 아래 마음은 만리 밖에 있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우리에게 잘 알려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란 시이다. 지증국사의 비문을 지을 때 최치원의 열정적이었던 모습과는 너무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긍양의 희양산문 개창
희양산문은 935년 개산조 긍양이 봉암사에 주석하기 시작하면서 폐허가 된 사찰을 중창하고 법계를 정비하여 구산선문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긍양은 고려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태조 왕건은 물론 혜종과 정종으로부터 존경받았고, 특히 광종은 긍양을 스승으로 대우하면서 극진히 받들었다.
긍양의 비문인 「정진대사 원오탑비문」은 965년(광종 16) 한림학사 이몽유가 지었다. 그는 986년(성종 5)에 최승로 등과 더불어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에는 광종이 지나치게 불교의 신비함을 숭상하여 민폐를 끼쳤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광종은 평소 긍양을 숭상한 나머지 “긍양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침식을 잊고 소리 내어 울었다.”라고 이몽유는 기록하고 있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기 한 해 전인 900년에 긍양은 스승 양부陽孚의 곁을 떠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수많은 고생 끝에 석상경저의 수제자인 곡산도연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인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긍양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긍양이) 곡산谷山으로 가서 도연道緣을 친견하였으니, 그는 석상경저石霜慶諸의 수제자였다. 대사(긍양)가 묻되 “석상의 적적的的한 대의大意는 어떠한 것입니까?” 화상(도연)이 대답하되 “대대로 일찍이 전승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사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크게 깨달았으니, 묵묵히 현기玄機를 통달하고 비밀리 법통을 전해 받았다.(주2)
사굴산문 범일梵日의 법을 이은 행적行寂이 885년에 석상경저로부터 인가받고 귀국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니, 긍양은 석상의 명성을 들었을 수 있다. 긍양이 도연에게 ‘석상의 적적한 대의’를 묻자, 도연은 ‘전승하지 않는 것’이라 대답했다. 석상의 선법에 어떠한 특징이 있을 거라는 긍양의 관념을 도연은 한 방에 무너뜨린 것이다. 이에 긍양은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였다.
『전등록』 15권 ‘도오산 원지선사 법손’ 조에는 석상이 스승 도오원지道吾圓智에게 ‘촉목보리觸目菩提’에 대해 묻자, 도오는 사미를 불러 “깨끗한 병에 물을 채워 오너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석상에게 다시 ‘무어라 물었지?’라고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 나온다.(주3) 석상은 ‘촉목보리’라는 세계를 관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도오는 그러한 관념을 내려놓으면 일상 그대로가 보리임을 석상에게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긍양은 도연을 통하여 이러한 석상의 선법을 전해 받은 것이다. 석상의 선법은 긍양 이외에도 석상의 제자인 구봉도건으로부터 성주산문의 현휘玄暉가 법을 받아 왔다. 따라서 긍양의 법맥은 마땅히 ‘조계혜능→청원행사→석두희천→약산유엄→도오원지→석상경저→곡산도연→정진긍양’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몽유는 ‘도헌→양부→긍양’의 법계를 강조하고 있고, 더군다나 법랑과 신행으로부터 이어진 도헌의 법맥을 쌍계사의 혜소에게서 법을 이은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광종이 자신의 불교계에 대한 정책을 긍양의 비문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희양산문의 전승
긍양은 봉암사에서 935년부터 951년까지 머물렀고 다시 953년부터 956년까지 머물다 입적하였다. 총 19년을 머물면서 봉암사를 중창하고 희양산문을 다시 일으켰다. 그런데 도헌과 긍양의 선법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존재한다. 그것은 신라와 고려가 단절되어 있음과도 같다. 긍양은 봉암사를 찾아온 수많은 수행자들에게 도헌과는 달리 석상의 선풍으로 남종의 돈오선법을 지도했을 것이다. 긍양의 열반 이후 그의 문도들은 긍양과는 달리 석상의 선풍을 올곧게 지켜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956년(광종 7) 긍양이 열반에 들고, 965년(광종 16)에 이몽유의 비문이 완성된다. 그리고 971년(광종 22)에 광종은 “국내의 사원 가운데 오직 세 곳만은 전통을 지켜 문하의 제자들을 상속相續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 이른바 세 곳이란 고달원高達院·희양원曦陽院·도봉원道峰院이다.”(주4)라는 조치를 내렸는데, 이러한 광종의 조치로 희양산문은 더욱 번성하게 된다.
긍양의 문하에 형초逈超가 있었고, 형초의 문하에 원공지종圓空智宗이 있었다. 지종은 오월에 들어가 영명연수靈明延壽로부터 인가받고 돌아와 법안종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광종의 절대적 지원에 의하여 크게 번성했던 희양산문은 이러한 법안종 세력에게 흡수되었고, 성종 이후 급격히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각주>
(주1) 최치원,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문」. “北山義與南岳陟. 垂鵠翅與展鵬翼. 海外時來道難抑. 遠派禪河無壅塞. 蓬托麻中能自直. 珠探衣內休傍貳. 湛若賢溪善知識. 十二因緣匪虛飾. 何用攀兼附. 何用筆及含墨. 彼或遠學來匍匐. 我能靜坐降魔賊.”
(주2) 이몽유,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문」. “於谷山謁道緣和尙. 石霜之適嗣也. 乃問曰石霜宗旨的意如何. 和尙對云 代代不曾承. 大師言下大悟. 遂得黙達玄機密傳秘印.”
(주3) 『경덕전등록』 권15. ‘潭州前道吾山圓智禪師法嗣’條, “師後參道吾問. 如何是觸目菩提. 道吾喚沙彌. 沙彌應諾. 吾曰 添淨缾水著. 吾卻問師. 汝適來問什麽.師乃擧前問道吾便起去. 師從此惺覺.”
(주4) 김정언,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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