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고려 광종 대 법안종의 유입과 그 성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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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10 월 [통권 제138호] / / 작성일24-10-05 12:30 / 조회512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10
지방 호족세력의 연합을 통해 고려를 건국한 태조와 달리 광종은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건법과 과거제 등을 실시하였다. 태조와 광종 모두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달랐다. 광종은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계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한편 나말여초 마조계의 선법을 받아 형성된 구산선문은 광종 대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 따라서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출현할 때까지 불교계를 주도한 것은 화엄종과 법상종 등 교종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지눌이 출현하기 이전의 고려 전기 선종과 선사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광종 대에 유입된 법안종과 의천에 의해 창종된 천태종에 있다.
광종 대(재위, 949~975)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유입하게 된 것은 호족세력과 연계된 구산선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안종의 유입으로 인하여 고려 선종의 지형과 성격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법안종의 형성과 전개
법안종은 선종 5가 가운데 가장 늦게 출현한 종파로서 10세기 전반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에 의하여 창종되었다. 그의 법맥은 ‘청원행사→석두희천→천황도오→덕산선감→설봉의존→현사사비→나한계침→법안문익’으로 이어진다. 설봉의존의 문하에서 운문문언이 나와 운문종을 창종하였으니, 법안종의 창종으로 인하여 조계혜능의 문하에서 선종 5가가 완성된 것이다.
문익은 절강성 여항餘杭 출신으로 성은 노魯씨이다. 7세 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후 장경혜릉長慶慧稜(854~932)과 나한계침羅漢桂琛(867~928)에게 사사하고 계침의 법을 이었다. 강남의 주요 지역을 차지했던 남당南唐의 초대 황제 이변李昪에게 초청되어 금릉(남경)의 보은선원과 청량원에서 머물며 포교하였다. 문익을 ‘청량문익’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청량원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선종의 역사에 있어서 법안종의 창종은 ‘위앙·조동·임제·운문·법안’의 5가를 통해 조계혜능의 남종선의 외연을 획정하였고, 남종선의 성격과 특징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5가 선풍의 차이와 그 특징이 무엇인지를 구분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 문익은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을 지어 만당 오대 선종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 열 가지 병폐를 지적하고, 법안종을 제외한 나머지 4가에 대한 종풍의 성격과 특징을 규정하였다. 이는 회창법난 이후 불교계의 주류로 떠오른 남종선 내부의 승풍僧風을 쇄신하고, 혜능의 선사상이 5가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해주었다. 문익은 『종문십규론』에서 “조동은 고창敲唱으로 용用을 삼고, 임제는 호환互換으로 기機를 삼고, 소양韶陽(雲門)은 함개절류函蓋截流하고, 위앙은 방원묵계方圓默契한다.”(주1)라고 각 종파의 특징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선종 5가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다.
문익은 남종선의 사상적 정체성을 분명히 정립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선과 화엄을 사상적으로 융합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화엄의 성기론性起論과 관련이 깊은 ‘일체현성一切現成’을 중심으로 선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종문십규론』을 통해 ‘이사불이理事不二’와 ‘선교불이禪敎不二’를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시도는 남종선 사상의 확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변질 내지 퇴보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 문익의 법은 천태덕소天台德紹(891~972)에게 계승되어 선과 천태의 사상적 회통을 시도하였고, 덕소의 법은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에게 계승되어 선과 정토사상과의 회통에 이르게 되었다.
법안종이 고려에 전래된 배경
당나라가 멸망하고 황하 유역에 일어났던 5대(후량·후당·후진·후주·후한) 왕조는 재정상의 이유로 불교를 억제하였고, 그 주변에 있던 10국들 가운데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왕조에 의하여 불교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민閔의 왕심지王審知(충의왕)와 남한의 유엄劉龑 그리고 남당의 이변李昪·이경李璟과 오월의 전홍숙錢弘俶(충의왕) 등이 대표적이며,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의 문하에서 운문종과 법안종이 이때 성립되었다.
법안종이 고려로 전래된 정치·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한중 해양불교 교류 연구에 크게 공헌한 조영록 교수는 「법안종의 등장과 그 해양불교적 전개–10세기 중국 동남연해의 한중 불교교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법안종의 오월吳越 지방에서의 전등 활동은 그들 선배 선승禪僧들의 개척적 활동에 힘입어 순조로웠다. 법안종은 시기적으로는 10세기 중반까지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상실한 지방개발의 시대에 형성되었고, 지역적으로는 복건·절강·강소성에 걸친 동남연해東南沿海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파되었으며, 한반도까지 그 교세를 펼쳐나갔다.(주2)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법안종의 고려 전래는 광종 대의 정치·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유입된 이유도 있지만, 한·중·일 해양 문화의 교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는 광종이 영명연수의 선법을 유입하기 이전부터 법안문익과 천태덕소 그리고 더 올라가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설봉의 제자로는 항주 용화사에서 활동한 진각眞覺대사 영조靈照(870~947)를 들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민閔과 월越 지방을 떠돌다가 설봉에게 입실하여 인가를 받았다. 무주婺州의 제운산齊雲山 등에서 주석하며 크게 교화를 하였으며, 947년 항주 용화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전등록』 22권에는 그의 법을 이은 제자로 태주 서암의 사진師進 등 7인이 수록되어 있다.
또 『전등록』에는 문익의 제자로 혜거慧炬(899~974)와 영감靈鑑이 수록되어 있다. 혜거는 943년 이후 중국에 건너가 문익에게 사사하고, 귀국하여 도봉산道峰山 영국사에서 교화를 펼쳤다. 비문에는 “그의 도덕이 마치 도안道安과 그의 제자인 혜원慧遠과 같이 높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 정종이 왕사로 섬기고 또 광종이 국사로 받들었던 인물이다. 광종 22년(971)에 제자들에게 반드시 상속하라고 지정한 세 사찰 가운데 하나가 ‘도봉원道峰院’이었는데, 당시 혜거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영명연수 선사의 영향
법안문익과 천태덕소의 법안종 선풍이 고려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영명연수의 선사상이다. 연수는 문익과 같이 항주 임안의 여항 출신이자, 덕소가 활동하였던 천태산 근처 항주의 영명사(현 정자사)에서 그 선풍을 드날렸다. 연수는 문익과 덕소에 이어 법안종의 종풍을 크게 드날린 선승이자 종밀宗密(780~841)에 이어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고려 불교계에 미친 연수의 영향에 대하여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경덕전등록』 ‘지각선사연수’조의 말미에 수록된 다음의 글이다.
연수대사가 영명도량에 있은 지 15년 동안 제자들 1천 7명을 지도했고, 개보 7년(974)에 천태산에 들어가 계를 설하여 1만여 명을 제도했다. … 매일 여섯 차례 정진하고 도를 행하다 남는 힘으로 『법화경』 1만 3천 부를 읽었고, 『종경록』 1백 권과 시·게송·부賦·영詠 등 천만 마디를 저술하였는데, 해외에까지 퍼졌다.
고려국의 왕이 대사의 설법을 전해 듣고 사신을 보내 제자의 예를 올리며, 금실로 짠 가사와 자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금조관金澡罐 등을 바쳤다. 그리고 그 나라의 승려 36명이 직접 수기를 받고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본국으로 돌아가 제각기 한 지방을 교화하였다.(주3)
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광종이 연수의 사상에 심취하여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광종이 왕명으로 승려 36인을 뽑아 연수에게 보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연수는 904년생이고 광종은 925년생으로 21세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975년에 생을 마감한다. 광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949년이고, 연수가 항주의 영명사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961년이다. 따라서 광종이 연수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연수에게 법을 받고 귀국한 36명의 승려 가운데 행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승려로는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930~1018)과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932~1014)을 들 수 있다.(주4)
지종은 956년(광종 7)에 중국으로 떠났으며, 오월에 들어가 영명사에서 연수를 만나 심인을 얻은 것은 961년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해에 천태산 국청사에 들어가 나계의적螺溪義寂을 만났다. 968년에는 『송고승전』을 찬한 찬녕贊寧을 만나 그로부터 크게 숭앙받았으며, 의적이 자신의 사가私家를 희사하여 절로 만든 전교원傳敎院으로 지종을 초청하여 『마하지관』과 『법화경』을 강설하게 하였다. 이는 지종이 제관 및 의통과 더불어 천태의 사상에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종은 970년(광종 21)에 귀국하였는데, 광종 사후 경종과 성종 및 목종과 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영준은 출가 후 도봉산 영국사에 머물고 있던 혜거국사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고, 30대가 되어 중국으로 유학할 뜻을 품게 된다. 드디어 968년(광종 19)에 영명사에서 연수를 만나 심인을 얻고서 972년(광종 23)에 귀국하였다. 영준이 연수를 만나 법을 받는 장면을 그의 비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수) 선사가 “동국이 당나라와 같은가 다른가?”하고 물었다. 이에 영준은 “통달한 사람에게는 동서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 어느 날 (연수) 선사가 “색신色身은 질문하지 않거니와 어떤 것이 마음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영준이 “어떤 것이 질문하지 않은 색신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연수) 선사가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동국에서 진불眞佛이 출세하였다.”라고 하였다.(주5)
영준이 귀국할 당시 광종은 군신들과 더불어 환대하니, 마치 구마라집이 진나라에 오는 것과도 같고, 섭마등이 한나라에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이후 경종 대에 이르면 그가 주지로 머물고 있던 개경 근처의 복림사福林寺에는 참선하는 승려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따라서 연수로부터 인가받고 귀국한 지종과 영준의 활동에 의해 법안종의 선풍이 고려에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종과 영준 이외에 34명 승려들의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광종 당시 많은 승려들이 항주의 영명연수를 찾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당시 연수의 영향력은 지대하여 고려는 물론 일본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연수는 법안종의 3대 조사이자 정토종의 6대 조사로서 선종과 정토종에서 모두 추앙받는 인물이다. 특히 그의 『종경록』과 『만선동귀집』은 광종 이후 한국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호에 다루고자 한다.
<각주>
(주1) 文益撰, 『宗門十規論』 “曹洞則敲唱爲用, 臨濟則互換爲機, 韶陽則函蓋截流, 潙仰則方圓默契.”
(주2) 조영록, 「법안종의 등장과 그 해양불교적 전개 – 10세기 중국 동남연해의 한중 불교교류」, 『이화사학연구』 30집, 737쪽.
(주3) 『景德傳燈錄』 권26. ‘杭州慧日永明寺智覺禪師延壽’條. “師居永明道場十五載, 度弟子一千七百人, 開寶七年入天台山度戒約萬餘人. … 六時散華, 行道餘力念法華經一萬三千部. 著宗鏡錄一百卷, 詩偈賦詠凡千萬言, 播于海外. 高麗國王覽師言敎, 遣使齎書敘弟子之禮, 奉金線織成袈裟紫水精數珠金澡罐等. 彼國僧三十六人親承印記, 前後歸本國各化一方.”
(주4) 지공의 행적은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문」에, 영준의 행적은 「합천 영암사 적연국사 자광탑비문」에 수록되어 있다.
(주5) 金猛 撰, 「합천 영암사 적연국사 자광탑비문」(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2)』,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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