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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선림의 초대 승록僧錄 겸 외교승으로 활약한 슌오쿠 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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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09:15  /   조회2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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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선 이야기 12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적 작품인 『금각사金閣寺』는 교토 제1의 관광명소로 각광받는 금각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교토의 북서쪽에 위치한 이 건물은 온통 금으로 칠해져 있어 황혼 무렵 호수에 비칠 때면 극락정토가 따로 없을 정도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각사가 상국사相國寺의 탑두사원塔頭寺院(조사나 개조를 모시는 암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진 1. 교토 금각사 전경. 사진: 서재영.

 

그 반대쪽 6km 지점의 은각사銀閣寺 또한 마찬가지다. 정식 이름이 녹원사鹿苑寺인 금각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조성했다. 은각사 또한 원래 이름은 동산자은사東山慈照寺이며,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영했다.

 

이 유명한 암자들의 본찰인 상국사는 일왕이 기거했던 어소御所의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사찰 또한 요시미츠가 보리사로써 건설했다. 그리고 실질적인 개산조는 슌오쿠 묘하(春屋妙葩, 1311〜1388)이다. 실질적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겸손한 그가 개산조를 그의 스승인 무소 소세키로 하고 자신을 2대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국사파의 개조다. 사명대사가 도일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하고 포로 삼천 명을 귀환시킬 때 들렀던 곳이 바로 이 절이다. 그렇다면 당대 무사 집단의 최고 권력자가 존경했던 묘하는 어떤 인물일까. 

 

사진 2. 은각사. 사진: 상국사 홈페이지.

 

스승 소세키와의 선문답과 깨달음

 

묘하는 어릴 때 『법화경』을 접하고, 훗날 자신을 불경자不輕者라고 칭했다. ‘상불경보살품’의 가르침을 평생 자신의 심계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30세 무렵까지는 여러 선지식을 찾아 학문과 수행에 몰두하며 실력을 키웠다. 무소 소세키가 주도하여 전국에 국가의 평안을 위한 안국사와 전몰자 위령을 위한 이생탑 건설이 이뤄지던 1345년 소세키가 주석하던 천룡사에 참선 입실을 허락받았다. 

 

소세키는 단도직입적으로 “흥화興化는 왜 극빈克賓을 때렸는가?”라고 물었다. 묘하는 “오역뢰五逆雷를 들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임제록』의 교감자인 흥화는 『오가정종찬』 임제종 편에 등장한다. 법거량 중 한 대 맞은 극빈에게 흥화는 “극빈유나가 법 싸움에서 졌다. 벌금 5관으로 밥을 지어 이 사원의 모든 대중에게 공양할 것”이라며 밥도 먹이지 않고 그를 쫓아냈다. 절치부심한 극빈은 후에 대오했다. 소케키로부터 분발을 요구받은 유나직의 묘하는 천룡사의 말사인 운거암의 암주가 되었다.

 

사진 3. 슌옥쿠 묘하. 사진: 春屋妙葩保存財団.

 

35세 때 묘하를 면접한 소세키는 그에게 “자네의 응답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지혜의 장애에 걸려 있다.”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발분하여 용맹정진한 그는 마침내 『원각경』의 “일체시에 거하여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읽고 확철대오했다. 그 앞 구절에는 “유성 무성이 모두 불도를 이루고, 일체의 번뇌도 필경은 해탈이 된다. 법계해혜法界海慧가 제상을 비추면 또한 허공과 같다. 이를 여래 수순의 각성이라고 한다.”라고 설한다.

소세키는 묘하에게 슌오쿠라는 호와 법의를 하사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인가했다. 

 

백화의 근본은 염화미소의 한 송이 꽃

마침내 무리 가운데 가문을 잇는 자가 나왔도다.

한결같이 문호를 열고 화기和氣를 이루면

봄의 빛[韶光]은 항하의 모래처럼 한량없으리.

 

소광은 물론 묘하의 선풍을 말한다. 이후 천룡사, 임천사, 상국사의 주지를 맡으면서 소세키의 유업을 계승하는 한편, 교토와 가마쿠라의 양대 5산의 선적을 정리한 『오산판五山版』을 간행하는 등 선문화의 활성화에 큰 업적을 쌓았다. 당시 오산은 임제종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교세가 상승하던 때이기도 했다. 마침내 1379년 전국의 선림을 총괄하는 초대 승록僧錄에 임명되었다.

 

막부와 갈등과 시 창작에 몰두

 

그는 시문에도 능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탁월했던 것은 훗날 대륙과 한반도와의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외교승들을 배출한 상국사의 위상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의 일생이 어찌 평탄하기만 했을까. 당시 오산제일이던 남선사의 산문 신축을 막부에 제언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분쟁상태에 있던 천태종에서 항의하여 철거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묘하는 천룡사 주지를 그만두고 암자에 은거했다. 막부가 화해를 위해 묘하를 주지로 초청했지만, 이를 거부하자 그의 제자 230여 명의 승적을 박탈했다. 동해안 쪽 운문사에 틀어박혀 시작에 몰두했다. 그때의 작품과 서간을 모은 것이 『운문일곡雲門一曲』이다. 그중 하나, 1371년 겨울에 지은 ‘객중우작客中偶作’을 들어본다.

 

“천룡사를 짊어진 지 20년

머리가 불타고 안면安眠할 수 없었노라.

범종 소리는 청량한 아침을 뚫고

웃음 한 번 날리며 소천지에 은둔하노라.”

 

천룡사는 소세키를 파조로 하는 차아파嵯峨派의 중심지다. 선문 확장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지만 뜻이 관철되지 못한 처지를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그는 세상을 견성성불의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은거와 출세를 자유자재했다. 그의 선사상은 대혜종고에 의거하고 있다. 천룡사의 소참법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신은 전에 ‘이런 벌레는 주지가 될 수 없다’고 했음에도 지금 산에 머물고 있는가라는 풍즙의 질문에 대해 대혜선사는 ‘산에 머물든 말든 또한 산이든 강이든 이 전 대지가 종고宗杲 아닌가’라고 답했다. 그러나 나라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야색野色은 어디까지나 야색이며 산은 방해가 되지 않도다. 태양 빛은 수평선으로 물과 더불어 이어져 있도다.’” - 『보명普明국사어록』

 

주객미분의 본래 자리에서 성속이 하나임을 설파하고 있다. 간화선 제창자로서 본래면목을 드러내고, 살활자재의 선법을 드날린 대혜를 선문의 스승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혜종고의 선사상에 의거

 

대혜와 묘하의 관계는 제자들의 꿈에서조차 나타난다. 어록에는 제자인 쇼주昌樹가 꿈속에서 중국에 도항하여 4조 대의도신 선사의 도량을 방문했다. 묘희세계에서 대혜의 보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양기파의 학승 중엄원월을 만났다. 가까이 가니 중엄은 중앙에 걸려 있는 화상을 가리키며 ‘대혜선사’라고 말했는데 그 위에 ‘대지보명大智普明의 네 자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묘하의 화상이었다. 운판 소리에 깨어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았다. 묘희는 대혜의 호다. 묘하는 지각보명知覺普明 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제자들에게 대혜에 대한 가르침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대혜에 대한 경모는 자연히 운문문언으로 이어진다. 묘하는 상당설법에서 『운문록』을 텍스트로 삼았다. 운문의 고칙을 들어 깨우쳤다. ‘묘희배촉죽비妙喜背觸竹箆’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운문의 엄한 죽비가 뱀처럼 행인의 길을 막는다.

불쌍한 학인에게 몰아부쳐 기機가 기를 빼앗도다.

급하게 뱀 머리를 피해도 이미 늦었다.

일언반구를 구하려 세월을 보내버리고 말았도다.”

 

문자를 구한 자신과 제자들을 경책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승려가 운문에게 “어떤 것이 제불의 출신처인가?”라는 질문에 “동산이 물 위로 간다[東山水上行].”라고 답한 것에 대해 묘하는 이렇게 설했다. 

 

“천척千尺의 수문을 뽑아버리고

백천百川을 방류하여 서해로 흘러가게 한다.

태고적 치수했던 우禹의 힘은 어디로 갔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부가 해조를 농하는 모습뿐.”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나 동산수상행은 대혜도 강조한 공안이다.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을 자유자재한 운문의 면목을 계승하고 있다. 해조음은 문수와 관음의 설법으로 들리고, 무수한 중생의 아우성으로도 들린다. 나아가 어부는 경식구민의 무아에 취한 자신과 중생 구제의 방편을 구사하는 묘하 자신의 의지로써도 읽힌다.

 

묘하는 『벽암록』 제27칙의 체로금풍體露金風에 대해 읊기도 했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진 때는 어떻습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대한 운문의 답이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깊은 시절이다.

체로금풍을 작자作者는 알고 있다.

수문 안의 취모는 원래 부동하며

산호는 달을 잡는 한 가지 한 가지에.”

 

작자는 운문이든 자신이든 선지식 누구든 해당될 것이다.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불성의 현현을 드러내는 동시에 사바세계에 그 빛을 드리우고 있다. 운문의 살림을 변토 일본에서 이어가고자 하는 노력으로 뿌리와 가지가 번성하고 있다. 가마쿠라 때 시작된 5산은 무로마치에 이르러 5산10찰로 정착되고, 그 중심에 상국사가 있다. 

 

사진 4. 상국사 전경. 사진: 교토 산보 네비.

 

상국사는 묘하의 노력 덕분에 후에 많은 외교승을 배출하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의 첫 외교는 1367년 왜구 척결을 위해 파견한 원나라의 김룡金龍과 고려의 김일金逸과의 만남에서였다. 이 외교사절에 대한 답신의 외교문서를 작성한 것은 승록의 위치를 가진 묘하였다. 다음해 천룡사의 승려들을 각각 원과 고려에 파견하여 그 문서를 전했다.

 

사명대사와 이에야스의 회담에 배석

 

묘하가 확립한 5산10찰제는 이처럼 주변국과의 외교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기관이기도 했다. 물론 그 시작은 도일한 중국 승려나 중국에 유학한 일본승들이었다. 동아시아의 공동 언어인 한문에 능한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묘하는 특히 고려에 대한 멸시의 관념을 불식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그의 문하에는 고려인이 있었고, 태고보우와도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사진 5. 사이쇼 조타이 초상. 사진: 大阪城 天守閣 박물관.

 

2세기 후인 중세 말에는 상국사 주지인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 1548〜1608)가 등장한다. 당시의 승록으로서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가까웠으며, 외교문서 작성에도 참여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도막부를 세운 토쿠가와 이에야스와도 친분이 두터워 외교정책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원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탐적사로서 사명대사를 파견했다. 1605년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사명대사와 이에야스가 회담할 때 배석했다. 사명당은 조타이와도 친분을 갖고 교류했으며, 그에게 보내는 시가 『사명대사집』에 남아 있다. 회담 2년 뒤에는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다시 파견하여 12회까지 이르게 된다. 상국사의 암자인 자조원慈照院에는 조선통신사가 남긴 시문과 서화가 다수 보관되어 있다. 묘하의 문파 중에는 걸출한 외교승으로 도쿠소 슈사(特叟周佐), 젯카이 추신(絶海中津), 겐추 슈가쿠(厳中周噩) 등이 나왔다. 

 

사진 6. 녹왕원 전경.

 

교토 서쪽 산자락에 요시미츠에 의해 건립된 녹왕원鹿王院의 개산조는 묘하가 맡았다.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낀 그는 『녹왕원유게』를 만들어 승려의 수, 일일행사, 사찰의 경제, 제사 비용 등 상세하게 사찰 운영에 대해 기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병을 치료하는 중에 열반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몽환과 같은 70여 년

선사先師와의 연을 이제 매듭지었다.

일국의 황금을 수습하고

옛날의 돛을 높이 달고 떠나는 합동선合同船.”

 

선사는 물론 무소 소세키를 말한다. 일국의 황금은 불지의 회복을, 합동선은 출재가를 막론한 모든 중생을 대승보살도에 태운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 생을 후회 없이 보냈다는 내면의 충만감이 드러난다. 법화의 정신으로 모든 방편을 펼치고, 임운등등의 선풍을 휘날리며 맘껏 춤추었다. 묘하가 그랬듯이 임제종의 공안은 시공을 초월한 바로 그 직하의 중심에서 걸림없이 활보하는 근원적인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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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전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조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이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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