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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모든 번뇌를 끊고, 헤아림을 용납하지 않는 운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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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09:19  /   조회29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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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46_ 운문종 1 

 

세계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던 당조唐朝는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쇠락하기 시작하여 결국 주전충朱全忠이 세운 후량後梁(907~923)에 의하여 907년 멸망하였다. 이후 중국은 남북으로 나뉘는 분열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북방은 후량을 비롯하여 후당後唐(923~936), 후진後晉(936~946), 후한後漢(947~950), 후주後周(951~960)가 명멸하는데 이를 ‘오대五代’라고 부른다. 남방은 초楚(897~951), 오吳(902~937), 전촉前蜀(903~925), 오월吳越(907~978), 민閩(909~945), 남한南漢(917~971), 형남荊南(924~963), 후촉後蜀(934~965), 남당南唐(937~975), 북한北漢(951~979) 등의 나라들이 병립하여 이를 ‘십국十國’이라고 칭하고, 이를 모두 통칭하여 ‘오대십국五代十國(907~979)’ 시기라고 한다.

 

북방의 ‘오대’는 조광윤이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로부터 양위를 받아 송宋을 건국(960)하였으므로 53년의 기간이었는데 이 시기에 내란이 빈번하였다. 나아가 후주 세종世宗에 의해 폐불廢佛이 발생하였으므로 불교는 그다지 흥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남방은 비록 ‘십국’으로 분열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다양한 교역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안정과 함께 십국의 황제들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어 북방의 고승들을 대량으로 초빙하였으므로 불교가 크게 흥성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오가’의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이 이 시기에 남방으로부터 출현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운문문언의 생애

 

조사선의 ‘오가’ 가운데 네 번째로 출현한 것은 바로 운문종이다. 운문종은 천여유칙天如惟則의 「종승요의宗乘要義」에서 ‘운문고고雲門高古’(주1)라고 하여 운문종의 선풍이 상당히 높음을 평가하고 있다. 또 『인천안목』 권2에서는 운문종에 대하여 “운문의 종지宗旨는 중류衆流를 절단하고, 헤아림의 논의를 용납하지 않으며, 범부와 성인의 길이 없어 정해情解가 통하지 않는다.”(주2)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진 1. 운문문언 선사.

 

이러한 운문종을 건립한 선사는 바로 문언文偃(864~949)이다. 문언의 생애는 운문종을 창립한 까닭에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7,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6, 『조당집祖堂集』 권11 등 대부분의 선종 사서史書에 전기가 실려 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전기는 『운문산광태선원광진대사행록雲門山光泰禪院匡眞大師行錄』이고, 문언의 어록인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 권하에 실려 있다.(주3) 이 『행록』의 저자는 ‘집현전集賢殿 뢰악雷岳’으로 표기되어 있고, 마지막에 “때는 기유년己酉年 맹하월孟夏月(4월) 25일, 뢰악이 기록함”(주4)이라고 저술 시기를 밝히고 있는데, ‘기유년’은 남한南漢 건화乾和 7년(949)이다. 그런데 『행록』에서 문언의 입적 시기를 “건화 7년 기유년 4월 10일”(주5)이라고 밝히고 있으니 입적 15일 후에 찬술한 글이다. 따라서 문언의 입적 후 생애를 최초로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에 따르면, 문언의 속성俗姓은 장張이고, 소주蘇州 가흥嘉興 사람으로, 진왕晉王 경동조참군冏東曹參軍 장한張翰의 13대代 손孫이다.(주6) 문언은 어려서부터 세속을 싫어하여 공왕사空王寺의 지징율사志澄律師에게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고, 비릉毘陵(현 江蘇省 常州市)의 계단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이후에 다시 지징율사 문하로 돌아와 좌우에서 모시면서 여러 해 동안 강의하며 『사분율四分律』의 종지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 후에 지징율사를 사직하고 황벽黃檗의 후예인 목주도종睦州道踪 선사를 참알參謁하였다.(주7)

 

목주도종의 참알과 깨달음

 

『행록』에는 문언이 도종을 참알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언) 선사가 처음 참알하여 세 번 문을 두드리자 도종은 겨우 문을 열었다. 선사가 들어가려고 하자 도종은 밀어내며 말하기를, “진나라 시대의 쓸모없는 물건이군!”이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사는 홀연히 밝게 깨달았다. 그 후에 몇 년을 묻고 참알하여 그윽한 곳에 깊게 도달하였다. 도종은 그 신기神器가 가득하고 넓어 깨달음의 수레[覺轅]를 맡을 수 있음을 알고 말하기를,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 지금 설봉의존雪峰義存 선사에게 찾아가서 참알하여 그의 법을 계승하도록 하고, 이곳에 다시 머물지 말라.”라고 하였다.(주8)

 

따라서 문언은 목주도종을 참알하여 깨달음을 얻었고, 그의 문하에서 몇 년을 수학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도종은 문언을 설봉의존에게 보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설봉에게 보냈을까? 여러 자료를 검토해도 목주가 문언을 설봉에게 찾아갈 것을 강권했는지에 대한 단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와 같은 사례는 임제의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진 2. 설봉의존 선사.

 

주지하다시피 임제의 법계는 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임제가 깨달음을 얻은 일은 바로 대우大愚를 참알한 것이고, 대우는 “내가 홀로 산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했는데, 뜻밖에 오늘 한 아들을 얻었구나.”(주9)라고 하였으며, 임제는 십여 년 동안 대우를 시봉하였는데, 대우는 임종하면서 “그대는 스스로 평생平生을 저버리지 않았고, 또 나의 임종을 지켜 주는구나. 뒷날 세상에 나가 마음을 전하게 되거든 무엇보다 황벽黃蘗을 잊지 말라.”(주10)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보자면, 임제의 스승은 명확하게 대우라 해야 할 것인데 임제의 법계는 황벽의 사법嗣法으로 설정한다.

 

임제나 문언이 깨달음을 열고 십여 년과 몇 년을 모신 대우와 도종의 법계를 계승하지 않은 것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문헌에서 가장 명백하게 지적하는 일은 대우나 도종이 법계를 양보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우와 도종이 자신이 차지하는 제방에서의 위상이 그다지 크지 않아 제자를 위하여 더욱 위세를 가진 선사에게 법계를 양보하여 넓게 법을 펼칠 기회를 제공한 미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임제나 문언의 문하에서 황벽이나 설봉의존의 법계를 강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황벽은 물론이고, 설봉의존은 당시에 각각 선종에서 거대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설봉의존 전기에는 당시 의존이 사십여 년을 행화行化하여 문하에 천오백 명이 넘는 학인들이 운집하고 있었다고 한다.(주11)

도종의 권유를 받아들여 문언은 설봉의존을 참알하였는데, 『행록』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선사는 그 뜻에 의지하여 영중嶺中으로 들어가 설봉의 문하로 가서 선리禪理를 익히고 쌓아 도道가 의존선사와 계합契合하여 드디어 은밀하게 종宗을 인가받고 법을 부촉付屬받았다.(주12)

 

여기에서 문언은 의존과 선리가 계합하여 “은밀하게 종宗을 인가받고 법을 부촉받았음”만을 밝히고 보다 구체적인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경덕전등록』에서 “처음에는 목주睦州의 진존숙陳尊宿(道踪)으로부터 대지大旨를 발명發明하였고, 나중에 설봉雪峰에게 가서 현요玄要를 더욱 증진하였다.(주13)”라고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다. 

 

『행록』에서는 “(설봉의) 참례를 마치고, 영중嶺中을 나와 제방諸方을 널리 참알參謁하였는데, 서로 다른 기봉機鋒과 깊고 절묘한 논변論辨을 엄격하게 궁구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주14)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문언은 설봉의 문하에서 몇 년을 수학한 이후에 제방을 널리 유력했음을 알 수 있다. 입적 직전에 남한南漢 황제에게 올린 「대사유표大師遺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사진 3. 운문산 광태선사 전경.

 

신臣의 자취는 본래 한미寒微하며 초야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공문空門을 애절하게 사모하였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다른 인연에 서원誓願하여 용맹한 의지로 내전內典(佛典)을 오직 탐구하니, 혹 끼니를 잊고 물으며, 눈 속에 서서 앎을 구하였습니다. 풍상風箱으로 곤궁했던 17년 동안 남북 수천 리 밖을 섭렵하였습니다.(주15)

 

이로부터 문언은 설봉의 문하를 떠나 17년 동안 제방을 유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장기간의 유력을 통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고, 이후에 소주韶州(廣東省 韶關市) 영수사靈樹寺의 지성여민知聖如敏의 문하로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여민이 입적하면서 황제에게 문언을 주지로 천거하였고, 영수사에서 12년간 주지를 맡으며 법을 펼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남한의 고조高祖 유엄劉龔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황제의 지지는 이후 운문산으로 옮겨 운문종을 창립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하겠다.

 

운문종의 창립과 입적

 

『행록』에서는 운문산雲門山으로 옮겨 입적하기까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운문산으로 옮겨 폐허가 된 터를 새롭게 고치고 동우棟宇를 크게 신축하였다. 선사는 조실祖室에 있었던 24년 반 동안 선풍禪風이 사방에 퍼지고 교화가 넓게 펼쳐져 선도禪徒들이 모여들었다. 문에 들어 입실入室한 자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 선사는 건화乾和 7년 기유년己酉年 4월 10일에 순적順寂하였다. 선사는 미리 표表를 올려 황제에게 하직하였으며, 또한 유계遺誡를 쓴 이후에 가부좌跏趺坐하여 입적하였다.(주16)

 

이로부터 문언은 말년에 운문산으로 옮겨 원래 있던 사찰, 즉 광태선사光泰禪寺를 새롭게 수리하여 입적할 때까지 24년을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려 운문종을 창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권3에는 문언이 입적하기 한 해 전에 남한 황제로부터 ‘광진선사匡眞禪師’의 호를 하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주17)

 

사진 4. 운문산 광태선사 입구.

 

이상으로 간략하게 문언의 생애를 고찰하였다. 문언은 황벽의 제자인 목주도종에게서 깨달음을 얻었고, 다시 설봉의존을 참알하여 몇 년을 수학한 이후 17년간 제방을 유행하였다고 하겠다. 그 후에 영수사의 지성여민 문하로 들어가 비로소 정착하였고, 지성의 입적 후에 주지를 맡으며 비로소 개당開堂하였고, 이후 운문산으로 옮겨 널리 선을 펼쳐 운문종을 창립하였다. 이로부터 보자면, 문언의 법맥은 비록 설봉의존을 계승하였지만, 오히려 남악계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설봉은 청원행사-석두희천-천황도오-용담숭신-덕산선감을 계승했으므로 청원계靑原系에 속한다. 그러나 문언이 깨달음을 얻은 목주도종은 남악회양-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을 계승했고, 지성여민도 남악회양-마조도일-백장회해-복주대안을 계승했으므로 명확하게 남악계南岳系이다. 이러한 까닭에 후대에 남악계의 임제종과 청원계의 조동종이 대립할 때, 운문종의 법계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문언이 창립한 운문종은 운문삼구雲門三句를 비롯하여 다양한 선사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남한 황제들의 절대적인 지지로부터 오대십국과 북송 시기에 ‘오가’ 가운데 가장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다. 그에 따라 이를 이어서 운문종의 선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주1) 善遇編, 『師子林天如和尚語錄』 卷9, 「宗乘要義」(卍續藏70, 833c).

(주2) [宋]智昭集, 『人天眼目』 卷2(大正藏48, 313a). “雲門宗旨, 截斷衆流, 不容擬議, 凡聖無路, 情解不通.”

(주3) 이는 [宋]頥藏主集, 『古尊宿語錄』 卷18(卍續藏68, 122b)에도 실려 있다. 

(주4)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下(大正藏47, 576a). “時己酉歲, 孟夏月二十有五日, 雷岳錄.”

(주5) 앞의 책. “乾和七年己酉四月十日順寂.”

(주6) 앞의 책(大正藏47, 575c). “姓張氏, 世爲蘇州嘉興人, 寔晉王冏東曹參軍翰十三代孫也.”

(주7) 앞의 책. “纔自髫齓, 志尚率己厭俗, 遂依空王寺志澄律師, 出家爲弟子. …… 及長落䰂稟具於毘陵壇, 後還澄左右侍講數年, 賾窮四分旨. …… 乃辭澄謁睦州道蹤禪師, 蹤黃檗之裔也.”

(주8) 앞의 책. “師初往參, 三扣其戶, 蹤纔啟關. 師擬入, 蹤托之云: 秦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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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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