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천태종의 개창에 맞서 임제선을 수용한 선사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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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09:23 / 조회203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12
고려 광종 대 법안종이 유입되면서 기존의 구산선문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이후 무신집권기 보조지눌(1158~1210)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고려불교계는 교종 세력이 주도한다. 한국선사상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나말여초 찬란했던 구산선문과 보조지눌의 출현 사이에 존재하는 선사상의 공백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의문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무엇이 구산선문을 급격히 쇠락하게 하였는가?’ 하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지눌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구산선문의 선사상은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천태종의 개창과 구산선문의 쇠락
구산선문이 급격히 쇠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천태종 개창 때문이다. 의천 당시 고려 불교계는 교종 계통인 화엄종과 법상종이 양대 주류를 이루어 대립하고 있었고, 선종은 제3 종단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화엄종 출신인 의천이 불교계의 개편을 추진하였는데, 그 의도는 왕실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천은 교리적인 면에서 법상종에 대한 화엄종의 우위를 확보하고 교단 면에서는 기존의 법안종 승려와 구산선문의 승려를 포섭하여 새롭게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천태종의 창종 과정은 종찰인 국청사를 개성에 건립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청사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원찰로서 1089년(선종 6)에 착공하여 1097년(숙종 2)에 완공하였다. 이해 의천은 국청사의 주지로 임명되었고, 이곳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당시 구산선문에 소속된 천여 명의 승려가 천태종으로 소속을 옮겼고, 직접 천태종에 들어온 승려도 삼 백여 명이나 되었다. 1099년(숙종 4)에는 천태종 자체로 천태종의 승려를 뽑는 승선僧選을 실시하였고, 1101년(숙종 6)에는 국가의 주도 아래 천태선天台選이 실시되었다. 이렇게 출발한 천태종은 국가 차원에서 선종에 소속시켰다.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구산선문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고려 중기 선종의 3대 고승
고려시대 이후 선종사는 ‘천태종을 선종의 범위 속에 포함할 것인가?’의 여부에 따라 그 외연과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선종사를 기술할 때 천태종을 제외하는 것은 천태교학의 독자적인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천태종은 선종과 분리하여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고려 말 태고보우·나옹혜근·백운경한은 ‘여말삼사’라 명명하여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고려 중기 선종을 대표하는 3대 고승으로서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미상)과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1070~1159) 및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1052~ 1144)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대각국사 의천 사후 보조국사 지눌이 출현할 때까지 고려 중기 선종을 지탱한 고승들이다.
고려 중기 숙종 대에서 의종 대까지 왕사와 국사를 역임하거나 추증된 승려가 모두 10명인데, 이중 선종 출신은 3명이다. 담진과 탄연 및 학일이 바로 그들인데, 담진과 탄연은 사굴산문에 속했고 학일은 가지산문에 속했다. 담진은 1105년(예종 즉위년)부터 1106년(예종 1)까지 왕사를 역임하였고, 1114년(예종 9)부터 국사를 역임하였다. 학일은 1117년(예종 12)부터 1122년(인종 즉위년)까지 왕사를 역임하였고, 1145년(인종 23)에 국사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탄연은 1145년(인종 23)부터 1158년(의종 12)까지 왕사를 역임하였고, 1158년(의종 12)에 국사로 추증되었다. 이 같은 사실만으로도 고려 중기 이들이 불교계에서 차지했던 높은 위상을 알 수 있다.(주1)
혜조국사 담진
『조선불교통사』에는 1106년(예종 1)에 극심한 가뭄을 당하자 왕은 담진을 시켜 선법禪法을 강설하게 하면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때마침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1116년(예종 11)에는 보제사에서 담진국사가 행한 선법을 듣고서 예종이 물품을 하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담진에 관한 자료가 미약하여 그의 생애 전모에 대해 상세히 알 수는 없다.
『불일보조국사비명』은 김부식의 손자인 김군수에 의해 작성되었다. 거기에는 “지눌이 8세가 되었을 때 ‘조계운손曹溪雲孫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서 구계具戒를 받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어 ‘학무상사學無常師 유도지종惟道之從’ 즉 “공부함에 있어서는 일정한 스승에 국한되지 않고, 오직 도道가 있는 사람만을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주2) 이러한 내용을 통해 지눌의 은사인 종휘선사가 조계종 (사굴산문) 소속의 승려인 점은 알 수 있지만, 천태종의 창종 이후 사굴산문이 어떻게 존속해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담진과 그의 제자 탄연이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 유학의 길을 떠났을 때, 북송에 들어간 또 다른 승려가 바로 담진이다. 그는 1076년(문종 9)에 송에 들어가 3년간 유학하였다. 이때는 약 50년 동안 단절되었던 고려와 송의 국교가 재개되었고, 당시 북송의 신종神宗 황제와 신법당 관료들은 고려와 연합해서 요를 공략하려는 대외정책을 펴고 있었다. 담진은 황제와 관료들의 후원 속에서 북송의 수도였던 변경汴京(現 카이펑)에 머물면서 송나라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담진은 당시 신종 황제가 의지하던 임제종의 정인도진淨因道臻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정인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담진이 영향을 받은 정인도진의 임제 법맥은 다음과 같다.
임제의현 → 흥화존장 → 남원혜옹 → 풍혈연소 → 수산성념 → 섭현귀성 → 부산법원 → 정인도진
정인은 본래 임제종의 부산법원의 법맥을 계승하였으나, 변경 정인선원淨因禪院 주지인 운문종의 대각회련에게 나아가 회련의 높은 평가를 받고 정인선원의 주지로 주석하였다. 수산성념(926~993)은 풍혈연소의 법을 이어 수산首山의 광교원과 보응원 등에 머물면서 임제 종풍을 널리 선양하여 임제종 발전에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의 제자로 섭현귀성과 더불어 분양선소가 있다. 분양선소의 법이 자명초원에 이어지고 자명에서 황룡혜남과 양기방회가 나와 임제종은 황룡파와 양기파로 분화되게 된다.
담진은 임제종, 운문종을 비롯한 북송 선종의 새로운 동향과 사상적 흐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좌선의 수행 규칙과 더불어 거란본 대장경을 구해 고려에 전하였다. 1080년(문종 34)에 귀국하여 개경의 선종 사찰인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고, 그 후 춘천 화악사華岳寺, 광주 증심사證心寺, 순천 정혜사定惠社 등에 머물렀다. 담진의 제자로 탄연과 지인之印·관승貫乘·영보英甫 등이 있는데, 이들에 의하여 사굴산문은 그 선맥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와 청평거사 이자현 또한 담진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대감국사 탄연
천태종의 개창 이후 남종선의 선풍은 가지산문의 학일과 사굴산문의 탄연에 의하여 유지되었으며, 조계종이란 이름도 이때 등장하게 된다. 탄연은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등 네 왕으로부터 존경받았으며, 90세를 살다 간 선승이다. 그는 인종 대 왕사를 역임하였고, 사후 국사로 추증되었는데, 탄연에 관한 내용은 이지무李之茂가 찬한 「산청 단속사 대감국사 탑비문」에 전하고 있다.
무과의 종 9품에 해당하는 교위를 지낸 아버지 손숙孫肅과 어머니 안安씨 사이에서 태어난 탄연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신동이었다. 8~9세에 문장을 읽고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글씨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13세에 육경六經의 대의에 통달하였고, 15세에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그의 뛰어난 자질이 궁중에 알려져 즉위 전 숙종의 초청으로 세자 시절의 예종에게 글과 행동을 지도하였다.
1088년(선종 5)에 개경 북쪽에 있는 성거산 안적사에 가서 주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이후 광명사로 나아가 혜조국사 담진의 제자가 되어 그로부터 심인心印을 얻었다. 탄연은 선종 승려로서 고려의 법계를 차례로 밟은 모범적인 사례를 보이고 있다. 그는 1104년(숙종 9)에 대선大選에 합격하여 왕명에 따라 중원 의림사의 주지가 되었다. 1106년(예종 1)에는 대사大師, 1109년(예종 4)에는 중대사重大師, 1115년(예종 10)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1117년(예종 12) 선암사에 머물렀다. 1121년(예종 16)에 선사禪師가 되었고, 1132년(인종 10) 대선사大禪師가 된 뒤부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1146년(인종 24)에 왕사王師가 되었다.
탄연은 개경의 광명사를 비롯하여 보제사 등에 10년을 머무르고 이어 충주의 의림사와 영원사 등 여러 사찰에 머물다가 말년인 1148년(의종 2)부터 입적할 때까지는 산청의 단속사에 머물렀다. 탄연은 단속사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대표적인 제자로 효돈孝惇·연담淵湛·회량懷亮·처단處端 등이 있다.
탄연은 북송의 임제종 승려들과 서신으로 교류했는데, 육왕개심育王介諶(1080~1148)을 비롯하여, 도경道卿·응수膺壽·행밀行密·계환戒環·자앙慈仰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지금의 아육왕사인 광리사의 개심과의 서신 교류는 특별하였는데, 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지었던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아울러 상당하여 설법한 어구語句를 무역상의 배편으로 송나라 절강성 사명四明에 위치한 아육왕산 광리사廣利寺(아육왕사)에 있는 개심선사介諶禪師에게 보내어 인가印可를 청하였다. 개심선사가 극구 칭찬하면서 사백 자가 넘는 인가서를 보내왔으나 글이 너무 많아 비문에는 싣지 않는다.(주3)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탄연은 무역상의 배편을 통해 행주좌와 사위의에 관한 송과 더불어 평소 행했던 상당법어를 개심선사에게 보냈고, 그로부터 인가를 받았던 것이다. 『속전등록』 권53 ‘육왕개심선사 법사조’에는 “해상 방경인이 개심의 설법을 기록하여 귀국하자, 탄연이 그것을 보고 개오開悟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개심은 임제종 황룡파를 창시한 황룡혜남의 4세이다. 개심의 법맥은 ‘황룡혜남 → 회당조심 → 영원유정 → 장령수탁 → 육왕개심’으로 이어진다. 즉 개심은 임제의 11세 손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지무는 비문에서 “국사의 소속 종파를 상고해 보건대, 스님은 임제의 9대 법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탄연은 ‘자신의 임제종 법맥을 담진에게서 이어진다고 인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탄연의 비문에는 ‘고려국 조계종 사굴산하 단속사 대감국사비’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조계종’이라는 글자와 ‘사굴산’이라는 글자가 분명히 나타난다. 탄연은 1159년(의종 13)에 제자들을 불러서 “내가 돌아갈 곳은 내가 벌써 잘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각기 수도 정진에 진력하고, 삼가하여 세속의 예를 따라 장례식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훈계하고서, 합장한 채 입적入寂에 들었다. 보조국사 지눌이 태어난 이듬해의 일이다.
<각주>
(주1) 김아네스, 「고려 중기 대감국사 탄연과 지리산 단속사」, 『남도문화연구』 23, 85-86쪽. 참조.
(주2) 金君綏撰, 「佛日普照國師碑銘」, “年甫八歲 投曹溪雲孫宗暉禪師 祝髮受具戒. 學無常師 惟道之從 志操超邁 軒軒如也.”
(주3) 李之茂撰, 「山淸 斷俗寺 大監國師 塔碑文」, “嘗寫所作四威儀頌 倂上堂語句 隨商舶 寄大宋四明阿育王山廣利寺 禪師介諶印可. 諶乃復書 極加歎美 僅四百餘言 文繁不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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