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의 뒷골목]
‘여릉의 쌀값’에 기여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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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12 월 [통권 제5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94회 / 댓글0건본문
2015년 8월 경북 문경에 갔었다. 어떤 노스님의 수행담을 인터뷰해서 불교신문에 싣기 위한 길이었다. 봉암사 근처에 있는 외딴 암자에 올랐다. 40년 이상 은둔해온 스님을 거기서 만났다. 당신은 혼자 나무하고 밥 지어먹고 예불하고 참선하며 살았다. 자동차도 휴대폰도 상좌도 없었다. 거처는 법당이라 하기 민망한 폐가였다. 타인과의 교유라고는, 가끔 용돈을 주기 위해 문중(門中) 후배들이 보내는 인편이 전부인 듯했다. 기자와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걸 간곡히 설득해 몇 마디 얻어 들었다. 그래도 신문 한 개 면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다. 절에서 내려온 뒤 재차 전화해서 꼬치꼬치 캐물었고 통화를 녹음했다. 그야말로 글감을 싹싹 긁어모은 셈이다.
폐관(閉關)의 직접적인 이유는 벼락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1972년 가을비가 내리던 날이었고 우산을 들고 처마 밑에 앉아 있던 스님은 낙뢰사고를 당했다. 고압전류에 온몸이 파헤쳐져 며칠간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뻣뻣이 굳어 눈 감은 육신에 다들 죽은 줄 알았다. 다행히 정신을 되찾았는데, 최초로 돌아온 ‘제정신’은 허무감이었다. ‘그간의 수행이 죄다 헛공부였구나!’ “나에겐 죽음을 극복할 힘이 없다”는 걸 절감했고, “이른바 생사(生死)의 경계를 ‘진짜로’ 넘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43년이 흘렀다. 깨달음의 경계를 나에게 설명할 때 당신은 시종일관 어린아이 타이르듯 했다. ‘나는 한 소식을 했다’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는 느낌이었다. 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그의 선(禪)은 몹시 드높았는데, 나는 그 드높은 선을 끌어내려 독자들이 최대한 알아먹을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에게는 언어가 필요 없었지만 나는 언어가 있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터뷰는 게재되지 못했다. 어른은 세상만이 아니라 종단도 등지고 있는 상태여서, 승적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결국 밥벌이를 위해 그의 언어를 따내려고 공들였던 나의 수고와 수모는 고스란히 허사가 됐다.
다만 참선에 대한 역설(逆說)만은 여전히 솔깃하다. 군더더기 없는 ‘날말’로 느껴졌는데, 내가 뱉은 말이 아닌데도 자못 후련했다. “참선한다고들 하는데, 웬만해선 진짜 제대로 된 참선을 하기란 어렵지. 누가 참선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면 이렇게 말해주고 돌려보내. ‘세상에서 해볼 것 다 해보고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때, 오직 죽을 일밖에 안 남았을 때 그때 오라고.’ 한창 젊은 사람들이 얼른 돈을 벌어야지 어설픈 생각으로 참선한답시고 나서면 안 돼. 한번 시작하면 10년 이상 해야 하는 일인데. 만약 깨닫지 못하면 돈도 못 벌고 청춘다 지나가고 남은 건 없고…, 얼마나 원통하겠어. 깨달음이란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 간절하게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법이야.”
석두희천(石頭希遷)이 약산유엄(藥山惟儼)에게 물었다.
“너 거기서 뭐하냐?”
“아무 것도 안 하는데요.”
“그냥 한가롭게 앉아있는 거로구나.”
“한가롭게 앉아 있다면, 하는 일이 있는 겁니다.” <선문염송>
무심(無心)이란 아무 것도 담아두지 않는 마음이다. ‘앉아 있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게 되면, 필시 ‘앉아 있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에 빠지거나 ‘왜 너만 누워 있느냐’는 질투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어떤 일을 하든 사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마음이어야만, 일이 고통스럽지 않고 사람이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 그저 되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삶보다 속 편한 삶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참선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돌부처의 마음만이, 길가에 뒹구는 구멍 난 비닐봉지의 마음만이, 아무 것도 아닌 마음만이 참선을 즐길 수 있고 죽음을 버텨낼 수 있다. ‘그냥’ 살려고, 나는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3년간의 『종용록』 연재를 마친다. 직장인으로서 충실했던 틈틈이 책을 읽었고, 주말마다 읽은 내용에 이런저런 생각을 섞어서 글로 옮겼다. 『종용록』의 저본은 『굉지송고(宏智頌古)』. 중국 북송(北宋) 시대를 살았던 굉지정각(宏智正覺)이 이름난 선사들의 특출한 언행을 담은 100개의 고칙(古則)에 송(頌)을 붙인 문헌이다. 여기에 만송행수(萬松行秀)가 시중(示衆)과 평창(評唱)을 삽입한 것이 『종용록』이다. ‘종용록’이란 명칭은 만송이 원고를 집필했던 장소인 종용암(從容庵)에서 유래한다.
사실 ‘송’이든 ‘시중’이든 ‘평창’이든, 다들 논평이다. 내가 쓰는 글 역시 어차피 논평일 것이므로, 논평의 대상이 되는 ‘본칙(本則)’에만 집중했다. 본칙에는 일상 속 선사들의 모습이 대화로 또는 잠언으로 담겼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사유양식을, 그것도 1000년 전 중국인들의 사유양식을 따라잡기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내가 최초로 얻은 지성은 선(禪)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교수들에게서 특별히 배운 것은 없다. 1학년 때 유난히 심했다. ‘니체’를 듣고 싶었으나 의무적으로 ‘플라톤’을 들어야 하는 시기였다. 출석일수나 관리하면서 술이나 마시러 다녔다. 이듬해 선불교와 노장사상을 동시에 수강한 인연이 어쩌면 지금의 인생을 결정한 것인지 모른다. 남들은 서양의 분석에 능한 반면 동양의 여백에는 힘겨워했는데, 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불법이 무엇입니까?” “여릉(廬陵)의 쌀값이 얼마이더냐?” 화두에 안목이 트였다. 무엇보다 ‘나처럼 생각하는 인간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에 작약했다. 비록 출가는 못했으나 선사들의 흔적이 가까이 있기에 그런 대로 자족한다.
‘여릉’은 꼭 ‘여릉’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이 속한 도시이거나 공동체다. 사람은 제가 지닌 재능과 노력과 업보로써 다들 그날그날 정해지는 쌀값에 기여하거나 쌀값을 뒤흔들면서 살아간다. 나라가 망한다손 쌀값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본성이다. 본성대로 산다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재주로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끌어가는 것이란 생각. 그리고 이렇게 어떻게든 살아있지 않은가. 견성(見性). ‘견’이 곧 ‘성’이다.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깨달아 있는 것이다.
81년 동안(八十一年) 이 한마디뿐(只此一語).
부디 잘들 있게(珍重諸人).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切莫錯擧).
만송행수는 『종용록』을 쓰던 종용암에서 입적했다. 앞선 선사들의 말과 삶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셈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다. 상투적인 애도와 송사(送辭)를 금하고 있다. 무심에 대한 오랜 훈고(訓詁)는 무정(無情)을 낳고 초연으로 건너간다. 고요히 살면, 죽음도 안정적이다.
한편으론 내공의 시간이 81년쯤은 되어야 죽음이 반가워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눈멀지 못해서 이익을 찾아 헐떡이고 귀멀지 못해서 못내 질투를 감내해야 하는 게 청춘이다. 그러므로 늙어서 낡고 문드러진 몸만이 죽음과 온전히 섞이기 쉽다. 감인대(堪忍待). 견디고 참고 기다리면서 세월을 묵묵히 따라가다 보면, 세월이 수고했다며 물 한 모금 내어줄 날이 있을 것이다. 살아남는다는 건 단순히 세속의 전리(戰利)을 넘어 영성(靈性)의 영역이다.
다시 소중한 <고경>에 집필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종용록』이든 『벽암록』이든 옛 중국 스님들의 말과 삶을 소재로 한 고전이다. 예전부터 한국판 『벽암록』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근현대 한국 선사들의 수행 일화들은 고대 중국 선사들의 그것보다 몇 겹은 쉽고 정답게 다가올 것이란 믿음이다. 궁극적으로는 이른바 ‘선(禪)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는 시간이 되길 빈다. 그 안에서나마 탐심과 악심을 쉴 수 있을 테니까. 내가 가진 말의 맛과 내가 처한 삶의 맛을 숙성하고 싶다. 부디 소화를 잘 시켜서 다가올 죽음 앞에서 ‘역류성 식도염’ 따위로부터는 면탈해야겠다. 두려워한다거나 아쉬워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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