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의 뒷골목]
무아(無我)를 이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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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6 월 [통권 제5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087회 / 댓글0건본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쓴 『몰입의 기술』은 내적 보상의 중요성에 관한 책이다. 몰입이란 행동과 의식의 합일이다. 등반가가 암벽과 하나가 될 때, 글쟁이가 글과 하나가 될 때, 도박사가 손에 쥔 패와 하나가 될 때, 그들은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경험한다. 승리에 대한 집착도 패배에 대한 걱정도 완전히 사라진다. 남과 같이 있을 때는 불편하고 나만 있을 때는 외롭다. 오직 ‘있기만’ 할 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며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칙센트미하이는 “외적 보상만이 판치는 세태가 인간성의 말살과 지구자원의 고갈을 야기한다.”면서 “노동에서 순수한 재미를 찾는 훈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무언가에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미치면, 밥을 안 먹어도 그만이고 주변에서 비웃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일심(一心)으로 무심(無心)이 되면 존재의 이유는 단순해지고 모양은 소박해진다. 역설적으로 무아(無我)는, 자아에 대한 완전한 만족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제87칙 소산의 있음과 없음(疎山有無, 소산유무)
소산광인(疎山匡仁)이 위산영우(潙山靈祐)를 찾아 물었다.
“듣건대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있음의 구절과 없음의 구절은 등(藤)이 나무에 기댄 것 같다’ 하셨는데 갑자기 나무가 쓰러지고 등이 마르면 구절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위산이 깔깔대며 크게 웃었다.
소산이 일렀다.
“제가 사천 리 길을 포단을 팔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조롱만 하십니까?”
이에 위산이 시자를 불렀다.
“돈을 갖다가 저이에게 주어라.”
이어 부촉하되
“이후 외눈박이용(獨眼龍, 독안룡)이 있어 그대를 파헤칠 것이다(점파, 點破).”
훗날 소산은 명초덕겸(明招德謙)을 만났다. 눈이 하나뿐인 노승이었다. 명초가 일렀다.
“위산은 과연 머리와 꼬리가 반듯하건만 지음자(知音者)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이구나.”
그러자 소산이 물었다.
“나무가 무너지면 칡은 말라버리는데 그러면 구절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명초가 말했다.
“이것을 위산이 들으면 또 한바탕 웃겠는 걸.”
이에 소산이 크게 깨달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위산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었구나.”
갈등(葛藤)이란 단어는 재미있는 어원을 가졌다. 칡과 등은 모두 덩굴 식물이어서 다른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특성을 지녔다. 덩굴식물은 종별로 나무줄기를 감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데, 칡은 왼쪽으로만 등나무는 오른쪽으로만 올라간다. 칡과 등이 한 나무에 얽히면 모습부터 몹시 기괴할 뿐 아니라 나무의 생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갈등의 해결은 보통 칡이든 등이든 한쪽이 말라죽어야만 이뤄진다. 생장속도를 조금씩 늦추면서 공생하는 경우도 보인다. 인간의 갈등도 대개 이러한 방식으로 일단락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有之以爲利(유지이위리)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이라고 말했다. 있음이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없음이 어떤 기능을 하기 때문‘이란 뜻이다. 그는 우마차의 바퀴살이 효용을 얻는 이유는 바퀴살 사이의 공백 때문이라는 비유도 남겼다. 그릇은 비어있기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 집의 평수를 넓히는 방법은 돈을 벌어서 더 큰집으로 이사하는 방법이 우선이다. 그러나 집안의 쓸데없는 물건을 버린다면 시간과 수고를 덜 들이고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렇듯 없음이란 근본에서만 있음은 제값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소산의 질문은 이러한 공존의 미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있음이고 없음이고 나발이고 모든 가치가 무화됐을 때의 경지를 겨냥한다. 바퀴살과 바퀴살 사이의 공백을 논하고 찬(讚)하는 마음의 아래에는 더 멀리 가고 빨리 가고 싶다는 욕심이 흐른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끝내 제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마음이다. 이때 소산은 자충수를 두고 마는데, ‘내가 개고생을 해서 당신에게 왔으니 당신은 반드시 답을 주어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눈에 거슬린다. 소를 제 입으로 잡아먹어놓고 소가 어디 있느냐고 찾는 노릇이니, 위산은 웃을 수밖에.
제88칙 능엄경의 보지 못함(楞嚴不見, 능엄불견)
『능엄경』에서 비롯된 공안(公案) :
부처님이 제자인 아난에게 말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사물을 안다는 것은 사물에 의해서 생기는 결과가 아니다. 만약 우리의 눈으로 보고 안다는 주체가 대상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주관이라 할 수 없고 객관이다. 객관이라면 내가 보지 않을 때에도 그 보지 않은 곳은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겠느냐. 만약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너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본다는 작용이 사물에 의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이중적이다. 일단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아란 건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무아,無我). 한편으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고 독려한다(자등명, 自燈明). 나의 욕심과 분노 때문에 인생이 괴롭다. 한편으론 나의 수고와 지혜 덕분에 내가 또 먹고산다. 내가 없어도 산은 높고 강은 흐르며 개는 짖고 자동차는 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뒤에라야 그것들은 비로소 삶으로 피어난다. 부처님마저 내 마음이 부처님이라고 알아줘야만 그때부터 ‘부처님’이다. 이렇듯 ‘나’는 세상의 시작이고 중심이다.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옳든 그르든 잘났든 못났든. 내 눈에 들어온 꽃만, 꽃이다.
불교는 철저하게 인식론적이다. 세계는 내가 본 만큼만 보이고 알아낸 만큼만 나타난다는 입장이다. 시체의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게걸스럽게 들이켰다는 원효 대사의 설화가 극명한 사례다. 맛있다고 생각하고 마시니 정말 맛있더라는 거다. 날이 샌 뒤에 자신이 마신 물의 실상을 파악한 원효는 지독한 구토 속에서 크게 깨달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가 대오(大悟)를 얻은 장소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에 해당하는 당항성 부근이었다는 설이다.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무덤가에서의 빛나는 통찰 이후 원효는 당대 엘리트들의 단골코스였던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 더는 공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자각이 수행의 완성임을 시사한다.
끊임없이 넘어지고 부딪히는 게 삶이다. 어느 스님에게 “마음이 부처의 마음 같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차분하던 스님의 말투가 조금씩 격해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숨은 쉬어집니다.” 숨쉬기 힘들 만큼의 고통도 있다. 그러나 스님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살아져요. 어떻게든 살아진다니까. 삶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 수밖에 없으니까 살아가는 겁니다. 겁먹지 마세요. 태백산에 생긴 작은 샘이 낙동강을 만들고 기어이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법입니다.”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살아 있다면, 그냥 살아내는 게 도(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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