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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4 월 [통권 제4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9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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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사랑해서 눈물이 난다’라는 구절이 있는 노래로 휴대폰벨소리를 바꾸려는데,

바꾸고 나니 술이 깨고 

멀쩡해지고 

왜 바꿨나 싶고

 

또 무언가를 써야 하고

왜 쓰나 싶고

왜 다니나 싶고

이러면서 쓰고

이러면서 다니고

 

결국 다 이뤄져 있다.

 


 

 

제81칙 현사가 마을에 이르다(玄沙到縣, 현사도현)

 

현사사비(玄沙師備)가 포전현(蒲田縣)에 갔다. 거기서는 갖가지 연희(백희, 百戱)를 베풀어 선사를 환영했다. 다음날 소당장로(小塘長老)에게 현사가 물었다.

“어제의 그 시끄러움은 다 어디로 갔는가?”

소당이 말없이 가사 자락을 들어보였다. 현사가 말했다.

“아무 쓸모도 없을 줄 알았다.”

 

『조당집(祖堂集)』 권10에는 현사사비의 품성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모든 행동은 모범적이었으며 풍상(風霜)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더위와 추위를 어찌 피했으랴. 선사의 기틀이 순일함을 보고 매양 경탄하다가 마침내는 비두타(備頭陀)라고 불렀다.” 두타란 범어 드후타(Dhuta)의 음역(音譯)이다.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온전히 도를 닦는 일에 온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현사가 얼마나 세속의 물욕에 초연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즘에야 개신교의 전유물인 양 돼버렸지만 ‘장로’는 본래 불교의 용어였다. ‘길 장(長)’자에 ‘늙을 로(老)’ 자를 써서 지혜와 덕망이 높은 노스님을 가리켰다. 옛날 선종에서는 주지스님을 이렇게 불렀다. 곧 소당 장로가 백희를 주관한 호스트였을 것이다. 가사 자락을 들어 보인 연유는 ‘성대한 잔치를 연 것은 모두 부처님 제자로서 당연한 도리’라는 입장을 알린 것이라 짐작된다. 스님들이니 요란하고 난잡한 술판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온당한 ‘법회’였을 터임에도 현사는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아무리 맛나고 값진 음식을 내놓는다 한들, 한낱 나무토막이고 쇳덩어리인 불상(佛像)이 그걸 어떻게 받아먹을 것인가. 

 

주지(住持)란 단어는 당나라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명언을 남긴 스님이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는 청규(淸規)를 만들어 출가자들의 노동과 자급자족을 독려했다. 하여 탄탄한 사원경제를 이뤄 황제들에 의해 자행된 불교파괴인 법난(法亂)에도 선종 사찰은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 절에 불상을 따로 두지 않은 것도 백장이 만든 선가의 전통이다. 도를 깨달아 간직하고 있는 주지와 주지의 법문이 부처님을 대체했다. 사람이 부처여야만 사람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82칙 운문의 빛과 소리(雲門聲色, 운문성색)

 

운문문언이 대중에게 말했다.

“소리를 들어 도를 깨닫고 빛을 보아 마음을 밝힌다.”

손을 들고는

“관세음보살이 돈을 가지고 와서 호떡을 샀다.”

손을 내리고는

“알고 보니 만두였다.”

 

조사선에서 가장 난해하고 뚱딴지같은 개념이 바로 돈오(頓悟)다. 단박에 깨닫는다는 것인데, ‘수행은 고행’이라는 통념에 익숙한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여하튼 선사들은 즉각 깨달을 것을 요구한다. 일정한 단계나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헛것이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정법(正法)을 가로막는 맹독”이라며 지해(知解)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해란 알음알이이고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시도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사유는 그저 생각일 뿐이다. 

 

사유(思惟)란 단어는 꽤나 그럴 듯 하고 있어 보이지만, 삶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마음에 무언가를 자꾸 섞고 얽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봐야 나의 생각만 늘어날 뿐 너의 생각과는 갈수록 멀어진다.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세상과 화해할 수 없다. 

 

돈오는 어느 날 무언가를 보거나 들었을 때 갑자기 이뤄진다. 영운지근은 복사꽃이 피는 걸 보고 깨쳤다. 향엄지한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 돌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쳤다. 동산양개는 강을 건너다가 수면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깨쳤다. 천녕범기는 성루의 북소리를 듣고 깨쳤다. 청허휴정은 닭이 우는 소리에, 고봉원묘는 목침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쳤다. 

 

운문이 이야기하는 성색에 힘입어 그들은 성색 너머의 세계로 달아났다. 호떡이 순식간에 만두로 변하는 세상이란 호떡을 먹어도 만두를 먹어도 심지어 아무 것도 먹지 못해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세상일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세상. 하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세상. 아, 내가 없는 세상.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죽지도 않는 세상.

 

제83칙 도오의 간병(道吾看病, 도오간병)

 

위산(潙山) : 어디서 오는가?

도오(道悟) : 아픈 사람들을 돌보다 왔습니다.

위산 : 몇 사람이나 병들었던가?

도오 : 병든 자도 있고 병들지 않은 자도 있습니다.

위산 : 병들지 않은 자란 원지두타(圓智頭陀)가 아니겠는가?

도오 : 병들거나 병들지 않는데 전혀 간여치 않는 이를 속히 이르시오 속히 이르시오.

위산 : 말할 수 있더라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시구가 있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온정이 말살되어 가는 시대가 배경이다. 일정하게 잔혹하고 일정하게 비열한 인간들이 서로 속이고 물어뜯으며 만들어가는 현실을 비판하는 시다. 그들의 악마성은 문명과 교육이 만들어줬다. 더 좋은 데에 살고 더 많이 배울수록 탐욕스럽고 간악하다. 국정농단에 연루된 인물들의 다채로운 갑질과 배신과 꼼수의 활극은 거대한 악(惡)의 경전(經典)이다. 어떻게든 남을 아프게 하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를 아프게 한다. 남을 아프게 하려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 자기 아픈 줄도 모른다. 그들이 미리 아팠다면 나라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픈 자들이 탐욕스럽고 간악하다면, 아프지 않은 자들은 욕심이 적고 선량할 것이다. 

 

원지(圓智)는 도오의 법명이다. 그 역시 두타행에 충실했던 모양이다. 위산은 ‘도오 너는 아프지 않은 큰스님이겠구나’ 슬쩍 치켜세워주며 짐짓 떠보고 있다. 그러나 도오는 스승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프네’ ‘안 아프네’ 분별하는 순간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만다는 게 선사들의 한결같은 입장이다. 아프다가도 낫고 안 아프다가도 아픈 게 눈앞의 생생한 현실이다. 

 

봄날의 꽃은 어찌도 저리 아름답게 피었을까. 두견새가 표표히 하늘을 나는데 구름의 옷고름을 건드려 비가 내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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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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