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로 세상 읽기]
배포 있게 앞장 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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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9 년 1 월 [통권 제69호] / / 작성일20-06-13 22:47 / 조회6,294회 / 댓글0건본문
김군도 | 자유기고가
설봉 화상이 대중에게 수시하기를 “이 우주는 손가락으로 집어보니 좁쌀알 만한 크기 밖에 안 된다. 그것이 우리 눈앞에 던져져 있는데 범부들은 깜깜 무소식으로 알지 못한다.” 하곤 북을 치면서 모두 나서서 찾아보도록 했다.
擧, 雪峰示衆云,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 抛向面前, 漆桶不會, 打鼓普請看.
(『벽암록』 제5칙)
옹졸해서는 일을 그르치는 게 사람의 일이다. 설봉 화상이 수시하는 내용은 출가 대장부답게 배포를 갖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우주가 어디 좁쌀만 하겠는가. 오히려 한없이 크고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게 우주다. 하지만 한없이 크고 넓은 우주라고 해도 깨달은 이에겐 아주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우주는 좁쌀 크기 밖에 안 된다”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3) 화상은 중국 역사의 격변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란法亂이라 불리는 무종 회창의 불법사태가 있었을 때 승복을 벗고 환속하는 출가자들이 속출하였으나 화상은 어떠한 탄압과 배척에도 굴하지 않고 불조의 혜명을 전하기 위해 산문을 열고 정진했다. 법란시대에 배포가 없었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포가 크다’라고 했을 때 그 사전적 의미는 담력과 도량이 크다는 뜻이다. 담력은 또 겁이 없고 용감한 기운을 말한다. 옛말에 ‘간 떨어지겠다’ 거나 ‘간이 콩알만 해졌다’ 또 ‘쓸개 빠졌다’, ‘담력이 크다, 작다’ 등은 오장육부의 기능 중 ‘간과 담’을 빗대어 마음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간과 담은 서로 음과 양의 부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기치유학氣治癒學에서는 결단력과 줏대, 그리고 용기를 나타낸다고 가르치고 있다. 생리학적으로도 담낭이 허약하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은 무기력해진다. 다시 말해 의욕이 저하되고 어깨는 늘 처져 있으며 움직이기 싫어하므로 이런 사람들과는 어떤 일도 함께 도모할 수 없다.
인도 아잔타 석굴 제26굴. 편안하게 잠든 모습이다.
출가 수행자들로선 이런 모습은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몸이 허약한 사람은 사시사철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특히 겨울과 여름철을 맞아 공동 수행이 이루어지는 안거기간에 건강을 지키지 못하면 공부를 제대로 해내기란 어렵다. 무엇보다 수행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게 되므로 다른 수행자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선객禪客을 지도하는 큰스님들은 사시사철 출가 수행자들의 눈이 살아 있도록 항상 경책警策한다.
설봉 화상이 이 내용을 수시하던 때가 한창 무더운 날씨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모두들 더운 날씨 탓에 맥이 탁 풀려 수행 분위기가 허술해지자 용기를 북돋우고 정진 분위기를 다잡고자 이 공안을 제시했으리란 추측이다. 전쟁터도 아닌데 설봉 화상은 ‘북을 둥둥 울리며 찾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왜 설봉 화상은 ‘북을 치며’라고 강조했을까? 전쟁 상황에서 북소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한다. 설봉 화상은 느슨해진 수행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아니었을까? 즉 자신의 침체돼 있는 분위기를 일신하고 배포 있게 앞장 서 나아가라는 의미였으리라. 배포는 장애를 수습해 나갈 수 있는 자신 있는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배포 없이 위대한 도전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배포는 흔히 말하는 배짱과 다르다. 배짱이 무모하고 계획 없는 도전으로 일관했을 때 ‘배째라’식의 만용과 포기를 의미한다면 배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신념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치밀한 계획 아래 흐트러지기 쉬운 방심放心을 단단히 다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선택의 순간에서는 결단할 수 있는 줏대가 필요하고 주변의 억압과 강제가 개입됐을 땐 이를 물리칠 용기가 샘솟는 것이 배포다.
한 때 우리나라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켰던 『일본전산 이야기』(주1)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직원 13만 명에 연매출 8조원을 기록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주식회사 일본전산이란 회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가모리 시게노부 사장의 경영철학과 인재관人材觀은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나가모리 사장은 밥을 빨리 먹고 목소리 큰 사람을 우선 채용했다고 한다. 명문대학 출신도 소용없고 대학 성적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밥 빨리 먹고 목소리 큰 사람이 나가모리 사장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재로 여겨졌다.
나가모리 사장은 왜 이런 사람을 뽑았을까? 한 마디로 스피드Speed와 배포를 높이 산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속도전과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배포를 최고의 필요 가치로 받아들인 나가모리 사장은 이러한 인재 등용으로 3평짜리 창고에서 시작한 회사를 일본 최고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밥 빨리 먹고 목소리 큰 사람들이 속도전과 배포에서 최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선 안될 것이 있다. 밥 빨리 먹고 목소리 큰 사람들이 무조건 속도전에서 유리하고 배포가 다 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심小心한 사람은 큰 일 이루기 어려워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정말 몸에 익혀야 할 힘은 무엇일까? 더욱이 요즘처럼 국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우리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세계는 공통적으로 글로벌 인재의 육성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수 있는 인재들이 무수히 배출돼야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글로벌 인재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에서는 제각각 답이 엇갈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학실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것이 가장 필요한 힘은 아니다. 어학실력만으로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지구촌의 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건 배포다.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주눅 들지 않고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인식을 단련해야만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원래 인도를 찾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가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항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배포였다. 뱃길 낭떠러지에서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면 그는 그 먼 항해를 그만 두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금과 향신료를 찾아 반드시 인도로 들어가야겠다는 그의 배포와 신념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아自我’를 찾는 과정은 배포를 기르는 힘과 직결돼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 하나만으로도 우주에 닿는 힘을 기를 수 있다는 얘기다. 설봉 화상이 수시한 법어에 이 오묘한 뜻이 들어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우주의 조화造化 역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게 된다. 따라서 설봉 화상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할 것을 수행자들에게 권면勸勉하고 있는 것이다.
심약心弱하고 소심小心한 사람은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싯다르타는 왕궁에서 탈출한 첫날 칠흑같이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다. 독충과 맹수가 있을 어둠의 숲에서 사색의 밤을 지새웠다. 궁궐의 휘황찬란한 빛의 세계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캄캄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보통 배포로선 불가능하다. 이러한 배포가 있었기에 싯다르타는 마침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했다. 그리하여 여래如來의 지위에 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이 없는 삶을 강조하셨다. 두려움이 없는 삶이란 주저하거나 낙오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두려움이 없으므로 후퇴하는 일 또한 없다. 불퇴전不退轉의 삶인 것이다.
글로벌 시대 글로벌 인재는 이렇듯 배포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먼저 뚜벅뚜벅 앞장 서 걸으면 많은 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 우르르 몰릴 것이다. 법란 시대에도 불구하고 설봉 화상의 산문山門에 언제나 1천 5백여 명 이상이 운집했듯이 사람들은 두려움 없는 인물을 좇는다. 북을 두들겨 진군하자. 배포 큰 삶으로 나아가자. 부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 없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다.
(주1) 저자는 김성호 변화 코칭 전문가. 불황이 무색할 정도로 무한성장하고 있는 ‘일본전산’의 성공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2009년 샘앤파커스에서 출간됐다. 일본전산은 1973년 세 평짜리 시골 창고에서 단 네 명이 시작한 기업이다. 하지만 불과 30년 만에 계열사 140개, 직원 13만 명을 거느린 일본 최고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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