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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업과 윤회의 일상윤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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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4 년 10 월 [통권 제138호]  /     /  작성일24-10-05 13:33  /   조회62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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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른바 ‘업業(karman)’과 ‘윤회輪廻(saṃsāra)’란 말을 들으면 곧바로 불교를 떠올릴 정도로 이 두 개념은 불교사상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요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왜 업과 윤회를 말하는가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유무형의 모든 행위들을 일컫는 ‘업’과 그것의 과거 및 현재, 그리고 미래적 삶과의 도덕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윤회’는 불교 고유의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 생사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발생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 업과 윤회란 개념이 불교의 중심 교의 가운데 하나로 포섭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복잡한 논의과정을 거쳤고, 이후에도 불교 내부의 여러 학파들에 의해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 저간의 사정과는 별도로 업과 윤회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을 끌고 있을 만큼 독특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자기중심적이고 쾌락 지향적인 현대인들의 윤리적 삶과 관련하여 업과 윤회는 서구인들에게도 커다란 도덕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 1. 업(karma)를 표현하고 있는 인도 라자스탄 주에 있는 자이나교 사원 라낙푸르(Ranakpur)의 천정 조각.

 

그뿐만 아니라 여전히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적용 가능성을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는, 실천 윤리학의 잠재적 원천으로도 우리들의 지적 호기심을 계속 자극하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행위이론인 ‘업’과 이에 따른 직·간접적인 ‘보상’을 뜻하는 ‘윤회’란 사고방식이 간략하면서도 우리의 도덕적 정서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업과 윤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일상생활 속에서 업과 윤회를 믿고 따르고자 할 때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과 같은 무거운 물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도덕적으로 바꾸는 ‘하나의 윤리적 상징이자 교훈적 방편인 가벼운 물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불자로서의 인간적 고민과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전자의 입장에 서자니 숙명론자가 되어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것 같고,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자니 종교인으로서 어딘가 아쉽고 허전한 구석이 남을 것 같다는 거북함이 생긴다.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와는 현저하게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느 쪽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신행 자세일까? 

 

그런데 업과 윤회와 관련된 언급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불교 경전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과보의 존재 양식들, 예컨대 고통이나 쾌락의 삶 또는 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그 외의 삶을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고 말하거나 생각함으로써 앞으로 발생할 미래의 결과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점 또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업과 윤회의 관념이 우리의 행위를 안내하고 지도하는 도덕규범적인 차원도 분명히 가지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다시 말해 업과 윤회는 일종의 도덕심리학이나 윤리적 삶의 현상학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주1)

 

사진 2. 티베트 불교사원의 벽화 바바차크라(Bhavachakra). 육도윤회의 순환을 보여준다.

 

업과 윤회를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수용한다면 일부의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업과 윤회가 하나의 숙명론에 불과하다는 오해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존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이나 사회적 희생의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조건 지워진 어떤 환경의 영원한 포로가 아니라 그것을 바꾸기 위해 의도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행동할 수 있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윤리적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업과 윤회는 현대사회의 일상윤리적인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사진 3. 에릭 넬슨(Eric Nelson). 업과 윤회는 도덕심리학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사람들은 살면서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왜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가?”, “왜 착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데 비해 사악한 사람들은 떵떵거리고 잘 사는가?”, “세상은 왜 더 나아지거나 정의로운 곳이 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이 모양 이 꼴인가?”, “이 세상에는 왜 고통과 죽음이 존재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업과 윤회는 바로 이와 같은 현실적 물음들에 대한 불교적 답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도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기도 하고 불치병으로 일찍 사망하는가 하면, 사악한 심보를 가지고 정의롭지 않게 살았거나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삶이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불편한 현실이다. 우리는 세상 속의 이런 부정의와 모순을 경험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상의 모습이 우리에게 놀랍지 않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선행과 보상 사이의 논리적 필연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다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업과 윤회의 진리성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것은 곧 업과 윤회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회의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사진 4. 휘슬리 카프만(Whitley_Kaufman). 업과 윤회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기원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교적인 의미의 업과 윤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적인 선악을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도덕적인 인과성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업과 윤회를 거창한 형이상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자유의지가 발휘되는 범위 안에서나 작용하는 윤리적 인과관계로 이해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상은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업과 윤회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기원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주2) 기독교에서는 여호와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 불교는 끊임없이 나고 죽는 과정을 되풀이해야만 하며, 이러한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행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존재론적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주3)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과 논의과정에서 업과 윤회는 필요 이상의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논리로 변형되었고, 결과적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단순 소박한 본래의 윤리적 뉘앙스를 많이 상실하고 말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감수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업과 윤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업과 윤회는 무엇보다도 목적지향적인 자기변화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내가 행한 만큼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도덕적 추론방식은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현대인들에게도 얼마든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업은 곧바로 어떤 형태의 과보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의 도덕적 성품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행위의 속성을 규정할 어떤 잠재적인 ‘힘(saṃskāras)’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업과 윤회의 관점을 이전과는 다르게 ‘결과주의’가 아니라 ‘덕의 윤리’로 해석하려는 움직임도 일었다.(주4)

 

사진 5. 브래드포드 코켈렛(Bradford Cokelet). 업과 윤회를 도덕관념으로 가정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반해 위대한 철학자 칸트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신을 요청했듯이, 불교윤리에서도 ‘업’과 ‘윤회’를 실천적인 차원에서 ‘요청’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되면 업과 윤회는 그것의 자연적 실재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들의 윤리적 사고와 행동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의 인간적 필요성에 따라 업과 윤회라는 도덕관념을 역으로 가정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주5)

 

개인적으로 보기에 업과 윤회는 불교윤리적인 삶의 방식을 일상윤리적인 의미로 알기 쉽게 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와 관련된 갑론을박이 오랫동안 있어 왔고 불교전통들마다 약간씩 설명을 달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대적인 행위원리로 상큼하게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라는 실천윤리학적인 고민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업과 윤회의 원리를 전생과 내생의 세계까지 확장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 곧바로 적용해 보자는 주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업과 윤회라는 사고방식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법문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며, 나아가 행위의 선택과 그것이 도덕적 성품의 형성에 미치는 결과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업력業力이 언제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주장하지만 업과 윤회라는 불교윤리적 설명방식은 과거 반성적인 숙명론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윤리성을 한껏 간직하고 있는, 말 그대로 싱싱한 도덕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분들은 업과 윤회의 교설을 막연히 그럴 것 같다고 믿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아니면 조그만 일에서부터 그것의 불교적 의미를 되새기고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가르침에 따라 지금 당장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내 모든 행동의 윤리적 변화를 발원하겠는가? 이는 어쩌면 교양과 상식을 갖춘 수준 높은 불자들의 도덕적 실천과 관련된 ‘삶의 질’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각주>

(주1) Eric Nelson(2005), “Questioning Karma: Buddhism and the Phenomenology of the Ethical”, http://www.buddhistethics.org/karma12/nelson01.pdf. pp.2-6; Peter Harvey(2000), An Introduction to Buddhist Ethics: Foundations, Values and Issu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3〜31 등 참조. 특히 피터 하비는 초기 경전 속의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 업과 윤회가 숙명론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며 이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예컨대 업과 이에 따른 윤회의 삶은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도 하며, 악행에 대한 참회를 통해 그 업이 없어질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성성취하는 데 가장 유리한 지위인 만큼 그것의 의미를 깊이 자각하고 자비행을 베풀어 선업을 쌓을 것을 강조한다

(주2) Whitley Kaufman(2005), “Karma, Rebirth, and the Problem of Evil”, http://www.

buddhistethics.org/karma12/kaufman01.pdf. p.24.

(주3) Eric Nelson(2005), “Questioning Karma: Buddhism and the Phenomenology of the Ethical”, http://www.buddhistethics.org/karma12/nelson01.pdf. pp.6-10.

(주4) Damien Keown, “Karma, Character, and Consequentialism”,http://www.buddhistethics.org/karma12/keown01.pdf, pp.329-349.

(주5) 구체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Bradford Cokelet(2005), “Reflections on Kant and Karma”, http://www.buddhistethics.org/karma12/cokelet01.pdf, pp.1-13; 김진(2005). 「한국불교의 무아윤회 논쟁」, 『철학』 vol. 83, 철학연구회, pp.35-59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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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동국대 국민윤리학과 졸업(문학박사). 영국 더럼 대학교 철학과 방문학자 및 동국대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다. 역저서로는 『불교윤리학 입문』, 『자비결과
주의』,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 윤리』 등이 있고, 공리주의와 불교윤리의 접점을 모색하는 다수의 논문이 있다.
hnk@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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