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시대착오적인 연고주의와 그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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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5 12:24 / 조회279회 / 댓글1건본문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비상계엄령 선포는 대한민국의 헌정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내세워 비상계엄령을 발동했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사건의 여파로 불과 며칠 사이에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피땀 흘려 쌓아온 우리나라의 대외 신용도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는가 하면, 우방국으로부터도 졸지에 여행제한 국가로 분류되는 등 국제적 망신살이 뻗치고 있다. 검찰 출신 대통령의 낡은 선민의식과 충동적인 성정性情이 빚은 한바탕 소극笑劇치고는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다행히 한밤에 국회로 몰려든 민주시민들의 성숙한 정치의식과 국회의 적절한 대처로 비상계엄령은 해제됐지만,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의 자부심 높던 대한민국 국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두고두고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두렵다. 일반적으로 공직사회의 왜곡된 엘리트주의와 그것의 사회문화적 배경에는 권위주의와 연고주의적 정서를 앞세우는 유교문화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비상계엄령 선포를 주도하거나 동조한 대통령 포함 고위 공직자들 사이에서도 특정 고교 출신이라는, 사적인 연고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공직사회의 권위주의적 윤리문화
우리나라 공직사회는 ‘연고주의’와 ‘정실주의’의 부작용이 적지 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은 공직사회 내부에 새롭게 형성된 직장 연고주의인 이른바 ‘직연職緣’의 폐해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달아 발표되고 있다. 이런 제반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의 공직사회가 보여주는 독특한 집단정서의 저변에는 전통사상에서 비롯된 역사문화적 요인들과 깊은 관계가 있는 ‘윤리문화’적 특징(주1)을 띠고 있어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1차적으로 유교적 가치관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다. 예를 들어 가족주의, 사인주의私人主義, 연고주의, 문서주의, 권위주의, 규정만능주의, 연공서열의식, 의리주의, 비물질주의(가장된 청렴문화) 등이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덕 개념들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윤리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일종의 가족주의에 바탕을 둔 ‘온정적 권위주의(paternalistic authoritarianism)’가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지배적 에토스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을 해 본다. 온정적 권위주의란 간단히 말해 ‘다스리는 사람(공직자로 단순화함)’에게는 자애로운 가부장의 역할이 그리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일반 국민으로 단순화함)’에게는 순종적인 자녀의 역할이 기대되는 가족주의적 국가관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주2)
하지만 가족적 친분관계에서 출발하고 있는 온정적 권위주의의 공직문화는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 및 인간적 평등을 전제한 자유민주주의 또는 합리적 계약관계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의 윤리적 사고방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유교적 의리의식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많은 비판자들은 우리나라 공직문화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정실주의와 연고주의의 원천을 바로 유교적 가족중심문화에서 찾고 있는 한편, 이에 대한 미래적 및 창조적 극복을 주문하고 있기도 하다.(주3) 이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몇 해 전 중앙부처의 어느 공무원이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국민을 ‘개, 돼지’로 비유해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의 무의식적 배경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공직자 도덕의식의 유교문화적 영향
유교도덕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나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불평등한 차별적 인간관계를 전제하게 되는 속성을 갖는다. 이처럼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은 결국 통치자를 위한 윤리요,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정치도덕이며, 권력자와 통치자 및 상위자가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고 이를 옹호하기 위한 고전적 정치윤리라고 성격 규정할 수 있겠다. 그 결과 가족, 혈연, 직장, 고향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연고 관계를 중시하고 인정, 의리, 감정 등이 합리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말하자면 윤리적 지체 현상을 빚게 되었다.
다시 말해 유교윤리는 부자, 군신, 부부 등 특정한 인간관계에 있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도덕적 의리에 관심을 가질 뿐, 사회라든가 공동체 전체의 번영을 위한 공공의 도덕관념을 발달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부자나 부부 또는 형제자매 등으로 구성된 가족 중심의 소집단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private-regarding)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적 이익의 분배 과정에서도 자연스럽게 자기와 직·간접적인 혈연, 지연, 학연, 직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사고방식을 낳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이런 관계의 범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우리는 검찰 출신 대통령의 통치행위에서도 유사한 인사 사례를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가족주의 패거리 문화의 변화 필요성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와 발동 과정에서 드러난 검찰 인맥과 동일 고교 출신 인사들 간의 사적 카르텔은 가족주의적 공직문화의 참담한 폐해 사례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연고주의란 한마디로 말해 과거에 형성된 개인들 간의 사적 인연을 특히 중시하는 태도이다. 한 인격체의 탄생과 훈육 및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혈연, 개인의 도덕적 성품과 친교의 바탕이 되는 지연, 더 나아가 지식과 사회적 지위의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학연, 사회 진출 후 맺게 되는 직장 동료와의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직연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적 정서이자 감정적 결합으로 무조건 나무랄 일만은 아니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규정된 절차와 과정을 따라야 할 공직사회의 중요한 결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집단 이기주의의 성향을 보이는 각종 패거리 문화의 배경으로 유교적 가족주의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합리적인 정책 결정과 발전 계획이 수립되고 제도상 능률적인 행정조직이 가동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직을 움직이는 공직자들의 윤리적 가치관이나 태도, 즉 윤리문화적 의식구조가 공공성과 도덕성으로부터 거리가 멀다면 그들이 속한 공직사회는 비합리적이고 투명하지 않은 정책 결정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공직사회의 미래세대에 거는 기대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공직자들은 일반 국민보다 훨씬 더 높은 윤리의식을 가질 것이 요구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윤리의식을 공직자 개인이 얼마나 내면화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내외부적인 환경도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까지 우려의 눈길을 보냈던 유교윤리문화의 문제점들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진 지금 대다수 국민들 또한 ‘끼리끼리 문화(각종 연고주의)’의 폐단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해소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가령, 컴퓨터와 인터넷에 익숙한 20~30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에게 기성세대 방식의 고향이나 학교, 공무원 시험 몇 회냐 등의 질문은 이제 특별한 관심사가 못 된다. 더욱이 장차 공직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할 여성 인력의 점증하는 숫자를(주4) 고려해 볼 때 상대적으로 가부장제적 질서에 익숙한 남성 중심의 공직사회 윤리문화도 실질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가져올 것이 예상된다.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령 선포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황당한 정치적 해프닝으로 끝나가는 분위기다. 다시는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적인 고비마다 우리 국민이 보여준 위대한 저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이 되었다.
시민들의 높은 교양 수준과 깨인 정치의식은 그동안 피땀 흘려 가꾸어 온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국가의 풀뿌리 무형자산이다. 한낱 연고주의를 매개로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고위 공직자들이 벌인 어처구니없는 헌정질서 유린행위가 국가 전체를 내란상태로 몰아넣을 뻔했다. 말하나 마나 그들에게는 엄중한 인연법의 과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기 2569년 을사년乙巳年 새해는 더 밝고 더 맑은 불국정토 대한민국의 기운이 국내외 곳곳에서 용솟음치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비원悲願을 담아 불보살님 전에 엎드려 108배라도 정성껏 올려볼 작정이다.
<각주>
(주1) 여기서 ‘윤리문화(ethical culture)’란 개념은 소속 공동체 구성원들의 윤리적 삶과 관련된 공통의 가치정서 및 판단체계 전체를 총칭하는 것으로 정의해 보기로 한다.
(주2) 박종민, 「21세기 바람직한 공직문화와 그 수용방안」, 감사원, 『감사(54)』(1997), p.32.
(주3) 김낙진, 『의리의 윤리와 한국의 유교문화』(서울: 집문당, 2004), pp.3〜8.
(주4) 인사혁신처의 정기인사통계에 따르면 2023년 12월 31일 기준 행정부 국가 공무원은 총 768,067명이며 이 가운데 남성은 394,240명(51.3%)이고, 여성은 373,827명(48.7%)이다. 다만 2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은 총 1,233명 가운데 남성 1,111명(90.1%), 여성 122명(9.9%)으로 여전히 남성 공무원 숫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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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조형춘님의 댓글
조형춘 작성일학문적 접근인 듯 하지만 민감한 현실 정치에 직접적인 표현은 고경의 발간 목적에 맞는 것인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