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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실록에 나타난 요승에 얽힌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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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2 월 [통권 제142호]  /     /  작성일25-02-04 09:40  /   조회3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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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승妖僧이라는 말은 ‘요망한 승려’로 번역되며, 대체로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대표적으로 고려 말 신돈에게 ‘요승’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신돈이 과연 요승인가? 조선을 건국한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요승일 수 있지만, 오늘날 역사적 평가에서 보자면 요승이 아니라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승려 신분의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록에 등장하는 많은 요승들도 새롭게 평가해야 되지 않을까?

 

유학자의 주관으로 붙여진 요승

 

실록에서 신돈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요승을 언급하고 있는 기사는 제2대 임금인 정종 대에 나온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할 때 공을 세웠던 장사길張思吉·장사정張思靖의 죄를 물어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 가운데 “장사길과 그 아우 장사정 등은 … 지진이 일어난다는 요승의 허튼소리에 이끌려 남의 가산家産을 부수고 불법한 일을 많이 행하여 …”(『정종실록』 2년(1400) 6월 2일)라고 하는 내용이다. 사헌부에서 여러 죄목 가운데 불교 신봉에 관해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종은 사헌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정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 대에도 요승에 관한 기사가 한 번 등장한다.

 

요승을 양주楊州의 옥獄에 가두었다. 어떤 승려가 대궐에 나와서 고하기를, “양주에 금정金井이 있습니다. 제가 꿈에서 보고 그곳을 팠더니 과연 금정이 있었습니다. 금정 옆에 나무를 심어 표시를 한 지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내관 이용李龍을 시켜 그 승려와 함께 역마驛馬를 타고 가서 찾았지만 헛일이었다. 

- 『태종실록』 3년(1403) 8월 18일.

 

위 기록은 일반적 의미의 요승이라고 표현하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어떤 승려가 주장하는 내용을 검증하여 사실이 아니라 거짓임을 확인한 후에 감옥에 가둔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거짓을 퍼뜨린 승려에게 엄벌을 가함으로써 함부로 세상을 현혹하려는 승려가 있으면 언제든지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돈의 예에서 보았듯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요승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승려에 대해서도 요승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 1. 복천암 신미대사탑. 사진: 국가유산청.

 

문종 즉위년에 신하들이 여러 간언을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는다고 항의하였다. 문종이 어떤 내용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인지 말해 보라고 하자, 대사헌 안완경安完慶이 대답하는 가운데 신미信眉 스님에 대해 언급하면서 요승이라고 표현하였다. 

 

안완경이 대답하기를, “… 요승 신미의 작호爵號를 고치자는 따위의 일은 전번에 두세 번 굳이 청하였으나 한 번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 『문종실록』 즉위년(1450) 10월 28일.

 

신미대사는 판선종사判禪宗事를 역임한 당시 최고의 고승이었다.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했으며 세종의 한글 창제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평가되는 승려이다. 그의 속가 동생인 김수온은 세종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집현전에 뽑혔으며, 세조 대에는 간경도감에서 불서 번역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미대사에게 문종이 1450년(문종 1)에 선왕인 세종의 뜻을 따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리자, 대사헌 안완경이 요승이라며 항의하였던 것이다.

 

성종 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요승

 

요승이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성종 대부터이다. 이때는 조선 건국 이후 정치 사회적으로 유교적 질서가 점차 정착되어 가면서 전통적으로 불교를 신봉하던 왕실의 비빈과 주자성리학을 정치에 구현하고자 했던 조정 대신들 사이에 이념적 갈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낭관郎官이 보고하기를, “요즈음 어리석은 백성들이 때로는 요승들에게 속임을 당하여 장사葬事 비용을 아끼려고 어버이의 시체를 불로 화장을 하며, 심한 자는 자신의 병이 죽은 자의 빌미[祟] 때문이라 하여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태워버리는 자까지 있습니다. 풍속과 교화가 이렇게 퇴폐되었으니, 바라건대 엄격하게 금지시키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5년(1474) 4월 25일.

 

성종은 낭관의 보고 내용에 대해 예조에 검토를 지시하였다. 예조에서는 낭관의 보고대로 금지시킬 것을 주청하였고,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이로써 민간의 화장하는 풍습이 사라졌다. 고대 무덤을 발굴해 보면 대체로 관곽이 나오는데, 이는 관곽 속에 시체를 넣어 땅속에 묻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사망하면 화장하였고, 그 풍습이 민간에도 전해져 고려시대에는 많은 백성들이 시체를 화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풍습이 성종 대에 이르러 시체의 화장이 금지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물론 불교의 오랜 전통인 사찰 승려의 다비의식까지 금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위 기록의 요승이라는 표현은 민간에서 행해지던 화장을 금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성종 대에 요승이라는 칭호를 얻은 승려로 도천道泉과 학능學能·학전學專·설의雪誼 등이 있다. 도천스님은 1477년(성종 8)에 경엄사鯨嚴寺를 창건하려고 파천부원군 윤사흔尹士昕이 지은 권선문勸善文을 가지고 다니며 여러 양반들로부터 시주를 받았다. 이에 대해 사헌부에서 백성의 전답田畓을 빼앗아 절을 지으려는 것은 장杖 80대에 해당한다며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다.

 

가난한 백성의 밭을 억지로 빼앗아 옛 절터라고 칭탁하여 직접 땅을 골라 마음대로 사찰을 세우려고 권선문勸善文을 만들어서, 요승 도천으로 하여금 서명할 것을 권유하게 하고 보시하여 땅을 널리 차지하였습니다. 

- 『성종실록』 8년(1477) 3월 25일.

 

사진 2.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전경. 사진: 서재영.

 

권선문에 서명하거나 시주를 한 양반들은 한명회, 노사신, 정현조 등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신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성종은 사헌부의 요구를 무시하고 문제 삼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른 문헌에서 경엄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사찰이 창건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학능스님은 흥덕사興德寺를, 학전스님은 흥천사興天寺를, 설의스님은 원각사圓覺寺를 중창하였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성균관 생원生員들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 생원 김경충金敬忠 등 406명이 상소하기를, “… 지난번에 승려 학능이 흥덕사를 중창하는 것으로 명목을 삼아 양반들에에게 아부하고 민간의 백성을 유혹하여 요망하고 허탄한 말이 임금에게까지 도달하였습니다. … 학능의 술책이 한 번 이루어지자 요승 학전이 이어서 화답하여 흥천사를 중창한다는 명목으로 또한 요망하고 허탄한 말이 임금에게 도달하였습니다. … 원각사의 요승 설의 등이 널리 놀고먹는 승려들을 모아, 안거安居한다는 명분으로 재齋 올리고 밥 먹이는 비용이 수만 금을 헤아렸습니다. … 요승 설의 등이 원각사 대광명전에서 손으로 불상을 끌어 몰래 자리를 돌려 앉히고 떠들어대기를, ‘부처가 영험하여 스스로 돌아앉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다투어서 떠들어대어 도성과 저잣거리에 전파되고 양반가와 궁궐에 전해져서, 어떤 이는 떡을, 어떤 이는 비단을, 어떤 이는 채소와 과일을, 어떤 이는 콩과 밤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서 길에 서로 잇따랐으며, 경도京都의 남녀는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서 손을 모으고 이마를 조아려 임금에게 절하듯 하니, 이것은 온 나라의 백성이 모두 술책에 빠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11년(1480) 5월 28일.

 

성균관 생원들의 상소를 받아 본 성종은 “원각사 불상의 자리를 돌렸다는 일은 타당한 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마는, 흥덕사에 대하여서는 태종께서 사전寺田을 혁파하면서도 오히려 폐하지 않았고, 더구나 지금 해당 관청에서 폐사된 자운사慈雲寺의 재목을 승려들에게 운반하여 수리하기를 청하였으니, 국가에 조금도 폐단이 없는데, ‘참람하기가 궁궐에 비길 만하다.’고 상소하고 있어서, 내가 이미 내관 신운申雲과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확인하도록 하였다. 과연 참람하게 궁궐을 모방하였다면 승려에게 죄를 물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유생들에게 죄를 묻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각사 공사를 확인한 후에 김경충 등 생원 여러 명을 붙잡아 국문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이 원각사 설의스님을 요승이라 하며 징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와 건의가 잇따랐다. 이와 관련한 『성종실록』의 1480년 기록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6월 2일: 사헌부 대사헌 정괄鄭佸 등, 사간원 대사간 김작金碏 등, 생원 김경충 등이 원각사 승 설의 등의 징벌에 관해 상소하다.

6월 3일: 장령 구치곤丘致崐이 원각사 승려를 국문하도록 건의하다.

6월 7일: 사간 이세필李世弼이 원각사 승려를 국문하도록 청하다.

6월 12일: 성균관 생원 김경충 등이 원각사 승려를 엄히 징벌할 것을 상소하다.

6월 16일: 성균관 생원 김굉필金宏弼이 원각사 승려를 심문하여 처형할 것을 상소하다.

 

성종은 신하들이나 유생들의 상소와 건의를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설의스님을 비롯한 원각사의 승려들은 성종의 비호에 힘입어 흥덕사와 흥천사처럼 원각사도 중창될 수 있었다.

 

도선과 비보설에 얽힌 사례

 

그 후 실록에 요승에 관한 언급이 1485년(성종 16)에 다시 등장한다. 그해 1월 5일에 병조참지 최호원崔灝元이 임금에게 9가지 내용으로 건의하였고, 그 9가지 건의에 대해 많은 신하들이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서 비판하였다. 이때의 논쟁 가운데 하나가 도선道詵의 비보설裨補說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최호원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곧바로 상소를 올렸다. 

 

최호원이 상소하기를, “… 도선은 식견이 얕은 속된 선비의 무리가 아니고 바로 신통神通하고 명지明智한 승려입니다. 송도와 한양의 두 서울 터를 미리 정하였고, 그가 비보한 군현의 산천은 자못 영험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16년(1485) 1월 8일.

 

사진 3.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

 

최호원의 상소에 대해 여러 신하들이 비판하면서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대사헌 유순柳洵은 도선을 요승이라고 칭하면서 심하게 비판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유순 등이 의논하기를, “… 지리地理를 나누고, 물길과 숲길을 다스리며, 사탑寺塔을 수리하는 일에 비보裨補·진압鎭壓하는 술수로 말하면서 요승 도선의 말을 끌어다 실증하였으니, 그 방자하고 망령됨이 심합니다. …”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16년(1485) 1월 17일.

 

이러한 실록의 기록을 통해 당시에도 신하들 사이에서 논쟁이 될 정도로 도선의 비보설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유학자들은 도선을 요승이라고 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유학자들은 신통하고 지혜로운 승려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에 합천 해인사를 수리하는 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요승이라는 언급이 다시 등장한다. 사헌부 장령 안윤손安潤孫이 해인사의 수리에 국력이 소모되는 것을 비판하며 임금에게 아뢰었다.

 

사진 4. 해인사 장경판전. 사진: 국가유산청.

 

안윤손이 아뢰기를, “신 등이 처음에 해인사를 수리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여 예조에 공문을 보내 물었더니, 임금께서 전지傳旨하신 말씀이 ‘백성의 힘을 쓰지 말고 하찮은 잡다한 물건들을 갖추어 주라.’고 하신 데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봉행해야 하고 털끝만치라도 그사이에 보태어서는 아니되는데, 요승의 삿된 말에 현혹되어 농사철이 한창인데도 백성들을 징발해 기와를 운반하고, 이세좌는 백성들을 시켜서 잡물을 수송해 들여보냈습니다. 이런데도 죄를 주지 않으면, 뒷사람을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하였다. 

- 『성종실록』 20년(1489) 9월 11일.

 

안윤손은 임금의 명령대로 실행해야 할 관리들이 요승의 꾀임에 넘어가 농사철에 백성들을 징발해 일을 시킨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성종은 처음 내린 명령에 착오가 있었을 뿐이지 요승을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며 안윤손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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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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