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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공公’과 ‘사私’의 윤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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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5 년 2 월 [통권 제142호]  /     /  작성일25-02-04 10:25  /   조회33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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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낀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가 불러온 국내외적 후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국민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또 겪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고통이기 때문에 더욱 울화통이 터진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윤석열 대통령의 영장 집행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사기관과 대통령 경호처 사이의 물리적 실랑이는 나라 안팎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국가공권력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대통령 경호처의 조직적 저항은 윤석열 개인 사병화私兵化 논란까지 불러왔다. 여기서 우리는 인공지능(AI)의 시대인 21세기에도 한국사회가 여전히 ‘공公’적 가치와 ‘사私’적 친분(의리)의 관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도덕적 자괴감을 떨칠 수 없다. 이번 비상계엄령사태의 발생과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과정에서 이런 ‘사’적 윤리의식의 시대적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다.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며칠째 추운 겨울밤을 꼬박 새운 20대 여성 청년들의 너무나 올곧은 외침 소리를 듣고 우리 기성세대는 정말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미래세대의 건강한 정의감을 함께 공유하고 확산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공’과 ‘사’의 인식문제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라는 말은 칭찬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반드시 그런 의미만 담고 있지 않은, 다소 중의적인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는 말인 것 같다. 이 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그(녀)가 합리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는 공평무사한 사람’이라는 뜻에 가까운 반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그(녀)가 인간적인 면모가 다소 부족한 어딘가 모난 사람’임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더러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편의에 따라 이 말을 이율배반적으로 쓰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는 우리나라 부모들은 때때로 매우 독특한 행태를 보인다.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놀다 싸우고 들어오면 ‘맞고 들어 왔는지, 때리고 들어 왔는지’를 꼭 확인하려고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한바탕 난리가 난다. 이때는 반드시 잘잘못을 가려 어떻게든 상대방 아이의 잘못을 입증하고 그 부모의 사과나 보상을 받아 내려고 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애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과 함께 마음속으로는 자기 아이를 대견스럽게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모습은 사소한 일 같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어린아이들이 도덕적인 ‘옳고(right)’ ‘그름(wrong)’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그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말하자면 ‘공/사’의 구분 및 판단능력을 제대로 함양할 기회를 제공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발견되는 도덕정서는 영어권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차등적 관심을 보이는 태도인 ‘partiality’ 개념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서구문명권에서는 자신과의 친소親疏 정도와 관계없이 가능하면 공평하게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비차별적 사고, 즉 ‘impartiality’의 관념이 비교적 일찍부터 발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산물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 윤리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s)’를 중시하는 태도와 공적인 보편성을 지향하는 ‘도덕(morality)’ 사이에는 인간적 현실과 윤리적 이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유가 윤리의 ‘사私’적 윤리전통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며, 그다음으로 친지, 이웃, 그리고 자국민의 순서로 도덕적 관심을 확장해 왔다. 공동체 일반에 대한 평등적 대우에 앞서 나와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배려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 결과일 것이다. 유가 윤리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를 이와 같은 차등적 사랑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나의 부모 형제를 남의 부모 형제와 똑같이 친하게 대할 수 없듯이, 나의 처자식을 남의 처자식과 동등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곧 도덕주체로서의 인간은 누구나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에 있는 대상을 가지게 마련이며, 이에 따른 ‘특별한 의무(special obligations)’의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부모 자식 간의 의무, 혼인에서 비롯되는 의무, 친구 사이의 의무, 직장 동료로서의 의무 등이 그와 같은 영역에 속한다.(주1)

 

사진 1. 양주楊朱.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초기의 사상가(좌). 사진 2. 묵자墨子.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양주楊朱와 묵자墨子가 각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것과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유가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맹자는 이들의 입장을 “내 부모도 모르고 임금도 몰라보는 것은 새나 짐승의 무리와 같은 것”(주2)이라고 꾸짖고 이단으로 단정, 철저하게 배격한다. 

 

군자의 길을 가는 사람의 도리가 그럴 수는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덕德에 어긋나는 것이고, 그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자는 예禮에 어긋나는 것”(주3)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본말이 뒤바뀐 것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어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도 좋은 일이 있으며, 후厚하게 대해 주어야 할 사람과 상대적으로 박薄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이런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억지이자 사물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 논리이다.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사회생물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혈연이타성(kin altruism)’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보이는 것은 후손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영구히 보존하려는 생존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주4)

 

사진 3. 피터 알버트 데이비드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 1946∼).

 

이처럼 유가 윤리는 사람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도덕적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지켜야 할 소박한 의무, 즉 가족에 대한 차별적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유가 윤리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도덕적 잠재의식도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불평등 내지는 차이성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내면화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해본다. 이는 효도와 어른 공경 등 유교문화의 긍정적 영향 못지않게 혈연이나 지연을 앞세워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전근대적인 ‘사’적 관념을 조장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말이기도 하다.

 

서양철학의 ‘사私’적 윤리전통

 

이러한 ‘사’적 ‘차등성(partiality)’의 정서가 동양의 유가 윤리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헨리 시즈윅(Henry Sidgwick)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아이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다른 혈족에게는 이보다 상대적으로 덜 친절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주5) 그런 다음에 우리는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지 및 이웃사촌과 자기 나라 국민의 차례로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게 된다. 

 

사진 4. 헨리 시즈윅(Henry Sidgwick, 1838∼1900).

 

동양의 유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서구인들에게도 ‘차등적 사랑’ 또는 ‘우선적 관심’이란 도덕정서는 하나의 인간적 상식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역시 자신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이들과의 독특한 유대감은 삶의 활력소일 뿐만 아니라 ‘자기인식(self-knowledge)’의 원천으로 파악되어 왔다.(주6) 

 

이와 같은 사적인 관심의 상호교환과 그 밑바탕에 놓여 있는 친밀한 감정의 공유는 인생의 일부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존재 이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그들이 사랑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고,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도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싶다.(주7)

 

나아가 그와 같은 특별한 관심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정도나 보여주어야 하는가?”(주8)는 상대방과의 개인적 관계 및 친분 정도에 좌우되는 일종의 관계함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인격체에 대한 평등한 관심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공평하게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규범윤리학의 ‘공’적 사고, 즉 ‘impartiality’ 관념은 “도덕이론으로 하여금 특수한 관계, 즉 개인의 정체성이나 통합성 그리고 인생의 성취감 등에 없어서는 안 될 관계들의 가치를 소홀하게 다루거나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주9) 것으로 비춰지게 마련이다. 이는 유가의 맹자가 묵가의 겸애사상을 비판하는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측면에서 평등할 수 없는 차등적 사랑의 대표적인 예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다. 부모는 어린아이 일반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최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을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의학적인 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등 일일이 셀 수 없는 많은 의무를 다하고 있다.

 

이는 낯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보편적인 자선의 의무와는 달리 자신의 아들, 딸들을 위한 보다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특수 의무의 성격을 띤다. 부모들의 이런 태도를 누가 도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자식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지 않는 부모를 뭔가 잘못된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본능은 유가 윤리의 가르침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도덕성(morality)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성은 다른 어떤 기준보다도 공평성(impartiality)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동양의 묵자와 서양의 공리주의 사상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라고 본다. 이어서 불교의 무분별적 윤리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과 ‘사’의 관념에 대해서도 살펴볼 예정이다. 

 

<각주>

(주1) David O. Brink, “Impartiality and Associative Duties”, Utilitas, vol.13, no.2(2001), p.159.

(주2) 『孟子』 滕文公 章句下, “楊氏 爲我 是無君也 墨氏 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 禽獸也.”

(주3) 『孝經』 孝優劣章, “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

(주4)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사회생물학과 윤리』(서울; 인간사랑, 1999), pp.17-53 참조. 이런 입장을 보이는 대표적인 사회생물학자는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이다.

(주5) Henry Sidgwick, The Methods of Ethics, seventh edition(Indianapolis, Indiana: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81), p.246.

(주6) William H. Shaw, Contemporary Ethics; Taking Account of Utilitarianism(Oxford: Blackwell Publishers Ltd., 1999), p.268.

(주7) John Cottingham, “impartiality”, ed., Edward Craig, Encyclopedia of Philosophy(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1998), vol.4, p.714. 

(주8) David O. Brink, op cit., p.169.

(주9) Marilyn Friedman, “partiality”, eds., Lawrence C. Becker and Charlotte B. Becker, Encyclopedia of Ethics(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2001), vol. III, p.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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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동국대 국민윤리학과 졸업(문학박사). 영국 더럼 대학교 철학과 방문학자 및 동국대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다. 역저서로는 『불교윤리학 입문』, 『자비결과
주의』,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 윤리』 등이 있고, 공리주의와 불교윤리의 접점을 모색하는 다수의 논문이 있다.
hnk@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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