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청빈과 무소유의 삶으로 생태학자의 수호성인이 된 성 프란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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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5 년 7 월 [통권 제147호] / / 작성일25-07-05 12:55 / 조회15회 / 댓글0건본문
심층 종교의 길을 밝혀준 사람들 7
주여,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시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뿌리게 하시고,
상함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그리고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되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줌으로 받게 되고,
용서함으로 용서받고,
우리 스스로에게 죽음으로 영원한 삶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기도를 쓴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1182~1226)는 본명이 지오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로서, 1182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포목상으로 자수성가한 부자 아버지의 덕택으로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걱정 없이 자랐습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기사騎士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상의 여인을 그리며 지어 부르던 낭만적인 음유시吟遊詩들이었습니다. 어린 프란체스코도 프랑스 음유시인들의 시를 좋아하여 열심히 읽고, 부자 아버지의 돈으로 화려하고 멋있는 프랑스식 옷을 사 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프란체스코’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그가 태어날 때 받은 본명보다 더 유명해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도 이 성인의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난과 결혼해 고행자의 길로 가다
프란체스코도 기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웃 도시 국가인 페루지아 원정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 1년간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나폴리를 침공하는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 병에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기가 할 일이 군인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전장의 기사가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줄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는 것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를 애써 외면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시시 외곽 언덕 위 다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노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예수의 입상이 그에게 친히 “프란체스코야,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보수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교회 건물을 보수하는 일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보수 공사비를 마련하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몰래 아버지의 포목점에서 포목을 잔뜩 내다 팔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대노하면서 부자간의 연을 끊고 유산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주교가 관장하는 재판에서 아버지의 돈을 되돌려 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명령대로 돈뭉치를 건네고, 그 위에 자기의 화려했던 옷도 벗어 던지면서, 이제 ‘가난 양孃’과 결혼하여 고행자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나이 26세였습니다.

프란체스코와 같이 놀던 친구들 중 몇 명도 그에게 합류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신의 광대’로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광대가 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삶이 지금보다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권리를 추구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지만, 청빈과 무소유의 삶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이런 태도와 생활방식을 채택하기로 한 자기나 자기 친구들이 많은 사람의 눈에는 바보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왕이면 신을 위해 참된 바보가 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러고는 예수의 삶을 본받아 거지들과 나병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돈 많은 부자나 추종자들이 자기를 후원하겠다고 제안해 와도, 그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나병환자 수용소 옆 오두막에서 살았습니다. 모두 그를 정말로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출가하고 3년이 지난 1210년, 그는 11명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수도회 창설 승인을 받기 위해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를 알현하러 갔습니다. 남루한 행색을 하고 나타난 이들을 보고 교황이 처음에는 청원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교황은 꿈에서 어느 촌사람이 교회를 떠받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남루한 갈색 수도복을 걸치고 새끼 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채 나타났던 프란체스코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황은 프란체스코의 수도회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단서를 내걸고 순회 설교 수도회로서의 창설을 허가했습니다. 수도회 창설로부터 10년 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상징이 된 거친 갈색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숫자는 1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갈색 수도복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고, 한국에서도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프란체스코회’에 가면 이런 수도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체스코의 갸륵한 뜻과 정열에 감동을 받고 그에게로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한동네에 살던 클라라(1194~1253)라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처럼 부유한 가정의 딸이었지만, 프란체스코의 열정적인 외침을 듣고 자기도 청빈과 정절과 순복의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클라라를 일단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보내 그녀를 보호했습니다.
1212년 클라라는 자기 여동생 아그네스, 그리고 다른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프란체스코가 보수한 성 다미아노 교회에서 그의 지도를 받으며 ‘프란체스코 빈자 클라라’ 수녀회를 창립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죽기까지 클라라는 프란체스코 주변에서 그를 위해 지극 정성을 다했습니다. 클라라는 1255년 성인聖人으로 추대되어 ‘성 클라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라라와 프란체스코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 남녀 간의 사랑이었을까, 혹은 단순히 천상의 사랑이었을까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둘 사이의 이 지고지순한 사랑은 두 사람 모두 신에 대해 함께 가지고 있던 절대적 사랑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프란체스코가 1224년 라베르나 산 위에서 단식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의 몸에 성흔聖痕(stigmata)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양손, 양발, 옆구리 등 다섯 군데를 찔려 피를 흘렸는데, 프란체스코의 몸에서도 똑같은 곳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성흔은 아물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에게 계속 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226년 10월 3일 해 질 무렵에 프란체스코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기고 45세의 나이로 ‘죽음 자매’를 맞았습니다. 죽은 지 2년 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고, 성 조르지오 성당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230년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청빈과 무소유의 헌신
프란체스코가 청빈을 강조하고 이를 스스로 실천했지만 결코 ‘음울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단 그 행복을 찾는 데 보통 삶과 다른 방법을 썼을 뿐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사물을 얻는 데서 즐거움을 얻으려 했지만 프란체스코는 우리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자유로워져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한때 불신자들을 개종시키겠다고 성지로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행에서 이슬람교도에게 사로잡혀 술탄 앞에까지 끌려갔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대신 프란체스코에게 후한 선물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는 그 선물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처형되지 않고 이렇게 대접까지 받으며 무사히 석방된 것은 그가 너무나 유쾌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비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 평전을 쓴 체스터튼에 의하면 프란체스코의 특징은 ‘교황에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자기 궁전에 좌정하고 있는 시리아의 술탄에서부터 숲에서 기어 나온 누더기 강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불타는 듯한 갈색 눈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가 정말로 세상에서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계급과 명예가 중시되던 중세 시대에 사람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거나 가치 있다, 없다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보통 사람들을 모두 왕처럼 취급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사실 사람들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연도 함께 사랑했습니다. 막연히 자연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꽃 혹은 동물을 사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치 친동생을 대하듯 당나귀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여동생에게 말하듯 참새에게도 말을 건넬 수 있었습니다. 그가 행한 기적들 중에는 새소리로 교향곡을 연주하게 했다든가, 이리를 길들였다는 것 등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사랑은 사람이나 동식물에 대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말년에 눈이 멀 지경에 이르러 자원해서 자기 눈을 뜨거운 송곳으로 지지게 했는데, ‘불 형제’를 초청하여 그 일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달 자매, 해 형제, 물 자매 등을 노래했고, 그의 노래는 아직도 이탈리아 어린이들이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계와의 완전한 동질성을 느꼈던 셈입니다.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할까.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그는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것 이외에,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나의 집을 보수하라’는 신의 명령에 따라 그전까지 권력을 축적하고 지반을 굳히는 데 여념이 없던 교회를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세상에 사랑을 나누어주는 교회로 바꾸는 데 혼신을 다한 셈입니다. 이런 혁명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미움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성자로 칭송받고 있는 그는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우리에게 심층 종교의 길을 밝혀준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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