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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불해不害,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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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0 년 11 월 [통권 제91호]  /     /  작성일20-11-25 10:49  /   조회8,14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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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 중에 하나는 선善과 악惡의 문제일 것이다. 종교는 물론 윤리와 도덕의 기본적인 준칙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 각 종교와 철학자들은 저마다 선악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는 어디서나 선악을 강조하지만 선악을 가르는 불변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선과 악의 기준

 

선악은 시간과 공간, 상황에 따라서 서로 역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살인은 일반적으로 가장 나쁜 악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을 죽이는 살인행위는 영웅적 행위로 찬양받기까지 한다. 이를 보면 인간이 정한 선악은 자기 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중심으로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기준 또한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가 아니면 이익을 주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대상은 선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괴롭히고 해악을 끼치는 대상은 악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기를 중심으로 설정한 선악은 나와 남을 구분 짓는 분별적 인식을 강화하고,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육조혜능 대사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不思善, 不思惡].”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악이라는 생각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구이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할수록 대립은 격화되고, 갈등은 깊어지기 때문이다.

 

불교사상의 핵심은 연기緣起와 무아無我이다. 나와 너를 비롯해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라는 독자적 실체란 없다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 역시 자기중심적 집착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나’라는 자기중심의 울타리를 넘어서 에고에 대한 집착을 극복해야만 모두가 행복해 진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불교에서 선악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된다. 나를 중심으로 선악을 구분 지으면 대립과 갈등이 깊어지지만 상대를 중심으로 선악의 기준을 설정하면 각자 자아의 울타리를 해체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화합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유식학에서 말하는 선심소善心所, 즉 착한 마음작용 역시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그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선한 마음이며, 자비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실천윤리는 자비慈悲의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자비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다른 생명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이타적 마음이다.

 

이와 같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불교의 계율은 첫 번째 조항으로 불살생不殺生을 제시한다. 불살생계는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자비로 보살피고 존중하는 실천이다.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이타적 실천이며 불교적 선善이기 때문이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11가지 선심소 중에 마지막 항목인 불해不害 역시 이런 맥락을 담고 있는 교설이다.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보살피는 것이 ‘착한 마음[善心所]’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불살생 전통은 인도의 ‘아힘사ahiṃsā’ 사상에서 유래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아힘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자이나교를 비롯해 인도의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가르침으로 신봉하고 있다. 불교에서 아힘사는 ‘불해’와 ‘불살생’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번역된다. 정신적 측면에서 선심소를 지칭할 때는 ‘불해不害’로 번역되고, 행위윤리인 계율로 제시될 때는 ‘불살생不殺生’으로 번역되었다. 불해가 생명존중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라면 불살생은 구체적 실천을 의미한다.

 

불해는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서 모두 선심소로 분류되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10가지 대선지법大善地法 중에 하나였고, 유식학과 법상종에서는 11가지 선심소의 하나로 분류되었다. 『대승오온론』에 따르면 불해란 “해치려는 마음을 잘 다스리고 연민의 마음을 갖는 성품[謂害對治, 以悲為性]”이라고 정의했다. 중생들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의 마음 때문에 자기중심적 욕심에 물들어 간다. 그런 욕심으로 인해 남의 것을 탐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가하게 된다.

 

돌아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불해는 타자를 해치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뭇 생명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삶 속에서 실천토록하기 위해 모든 계율의 첫 번째 조항으로 불살생을 제시한다.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살림에 동참하는 것이 불해의 적극적인 의미임을 보여준다.

 

불해不害와 무진無瞋

 

불해가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마음이라면 불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와야 한다. 그래서 『성유식론』에서는 불해를 무진無瞋이라는 심소와 결부하여 설명한다. 즉 “모든 유정有情에 대해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不為損惱] 무진을 본성으로 삼는다[無瞋為性]. 해치려는 마음을 잘 다스리고[能對治害] 함께 슬퍼하는 연민을 업으로 삼는다[悲愍為業].”라고 정의했다.

 

첫째, 불해는 ‘무진을 본성[性]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불해의 근본은 다른 생명을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무진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무진이란 ‘화내지 않음’, ‘분노 없음’을 말한다.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차 있으면 자연히 폭력적이 되고, 그런 폭력적 에너지 때문에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따라서 그와 같은 분노의 에너지가 사라지고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해야 해침을 막고 다른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

 

둘째, 불해는 ‘연민의 마음을 작용[業]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분노의 에너지를 잘 다스려서 마음이 평화로워야 해침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能對治害]. 이를 바탕으로 모든 생명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 불해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논서 에서는 ‘비민悲愍’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타자의 고통에 대해 함께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공감이 불해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불해의 핵심은 마음에 분노가 없는 무진임을 알 수 있다. 『성유식론』에서는 “무진심소가 유정에 대해 위해를 가하거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不為損惱]을 가칭으로 불해라고 한다[假名不害].”고 했다. 분노가 사라진 평온한 마음으로 생명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는 것이 불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해는 어떤 실체적 심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분노를 제거하고, 다른 생명에게 위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분노가 사라진 무진이 실재적 작용이라면 불해는 무진에 의지해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무진과 불해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분해 설명한다. 즉, “무진은 생명의 목숨을 끊는 진瞋의 반대이고[無瞋翻對斷物命瞋], 불해는 생명에게 손해를 입히고 괴롭히는 해害의 반대이다[不害正違損惱物害]. 무진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無瞋與樂], 불해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不害拔苦].”이라고 했다.

 

무진이란 생명을 죽게 하는 에너지인 분노[瞋]의 반대 개념으로 다른 생명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與樂]’이라고 했다. 화내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른 생명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무진이라는 것이다. 반면 불해란 생명을 괴롭히고 해를 입히는 것의 반대 개념으로 다른 생명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拔苦]’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유신론』은 무진과 불해를 자비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무진과 불해는 “자와 비의 서로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것[慈悲二相別].”으로 설명하고 있다. 보통 자비慈悲를 한 글자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자와 비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불해란 자비의 덕목 중에서 생명에 대한 연민 즉 ‘비悲’를 근본적 성질로 한다.

 

세친의 『대승오온론』에서는 불해에 대해 “해 끼침을 다스리고 연민의 마음(悲)을 본성으로 한다[謂害對治, 以悲為性].”고 했다. 불해의 특성이 되는 연민[悲]은 고통을 제거해 주는 발고拔苦의 의미로 연결 짓고 있다. 즉 중생의 괴로움[苦]에 대해 공감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는 것이 불해라는 것이다. 반면 무진에 대해서는 “분노를 다스리고 자애를 성품으로 한다[謂瞋對治, 以慈為性]”고 정의했다. 무진에 해당하는 자慈는 여락與樂, 즉 중생에 대한 사랑[慈愛]으로서 안락과 즐거움[樂]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불해와 무진, 자와 비의 관계를 정리하면 불해는 자비의 덕목 중에서 생명에 대한 연민 즉 ‘비悲’를 본질적 성질로 하여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발고拔苦를 말하며, 반면 무진은 자애[慈]가 근본적 성질로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여락餘樂이 본질임을 알 수 있다.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 삼존입상. 보물 제530호. 고려 시대. 경남 거창군 위천면 금원산길 404-118. 박우현 거사 2020년 5월 1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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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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