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햄릿증후군과 의疑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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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0:48 / 조회7,891회 / 댓글0건본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우리에게 잘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대사의 한 소절이다. 우리의 삶은 오늘 점심 때 무엇을 먹을 것인지 같은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진로나 배우자의 선택은 물론 때로는 생사를 걸고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선택은 점심 메뉴 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우리를 고심하게 만든다. 햄릿의 대사는 선택의 순간에 주저하고 망설이는 우리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
햄릿을 쓴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1616년)
현대인의 결정장애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이 숙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복수라는 짐을 짊어지게 된다. 하지만 왕위 찬탈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숙부를 상대로 복수하려면 굳건한 용기와 단호한 결단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결심이 옳다는 자기 확신이 필요했고,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윤리적 당위도 요구되었다.
하지만 햄릿은 자신의 각오를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 수많은 번민에 시달린다. 결단을 내려야할 할 순간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소용돌이친다. 때로는 복수하기 좋은 순간을 맞기도 하지만 번민 끝에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때마침 원수는 기도 중이었고, 기도 중인 원수를 죽이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라는 엉뚱한 번민이 결행을 가로막는다.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스스로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의 결이 분산될수록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거악과 마주한 햄릿을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햄릿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 “포악한 운명의 화살이 꽂혀도 죽은 듯 참는 것이 장한 일인지” 아니면 “창칼을 들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두고 갈등하는 사이 비극은 커져 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감내할 것인지 아니면 차라리 익숙한 이승의 번뇌를 감내할 것인지를 두고 고뇌하는 것은 모두 죽음의 두려움 때문이다. 햄릿은 이와 같은 분별심 때문에 사람들은 겁쟁이가 되고, 타오르던 웅지는 잡념에 사로잡혀 힘을 잃고, 결국 실천으로 옮기지 못함을 한탄한다.
햄릿처럼 선택의 상황 앞에 주저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햄릿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생각이 많거나, 보고 듣는 정보가 많을수록 이와 같은 결정장애는 심해진다. 외부로부터 접하는 정보는 많은데 정작 자기주관의 결핍이 초래하는 문제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네트워크의 비약적 발달과 이에 따른 정보의 홍수로 인해 고려해야할 사항이 늘어나면서 결정장애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산다는 것은 매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따라서 분명한 주관의 결핍은 순간순간 다가오는 선택에 있어 주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정신적 나약함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정신적 나약함은 주저하다 때를 놓치고, 결국 상황에 쫓겨 최악의 선택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결정장애는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기업경영이나 국가의 리더십에 있어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햄릿처럼 결단의 순간에 우유부단하고 결정장애를 겪는 것과 관련된 불교 교리가 바로 유식학의 ‘의疑’ 심소이다.
의疑, 망설임과 확신의 부재
‘의(疑, vicikitsa)’ 심소는 여섯 가지 근본번뇌 중에서 다섯 번째 심소에 해당한다. ‘의’는 사성제와 같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과 불법의 진리에 대해 그 진실성을 확고하게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류하는 마음을 말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은 의심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모든 진리[諦]와 이치[理]에 대해서 결정을 미루는 것을 본성으로 삼고[於諸諦理猶豫為性] 능히 불의不疑의 선품을 장애함을 업으로 삼는다[能障不疑善品為業]. 결정을 미루는 곳에서는 선善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謂猶豫者善不生故].”
『성유식론』에서는 의심소의 본성과 작용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라는 세 가지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의심소의 본성은 불교에서 설하는 진리[諦]와 교리 등의 이치[理]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유예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서 유예猶豫란 불법의 진리에 대해 옳다는 확신이 서지 못해 주저하며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아무리 많은 법문을 듣고, 아무리 많은 경전을 읽어도 그것이 내적 성숙으로 연결될 수 없다. 마치 쇠귀에 경 읽기와 같아서 스스로 진리를 내면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의심소의 작용은 의심 없이 확신하는 선품[善品]을 방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듣고 배운 가르침에 대해 믿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굳건한 믿음이 싹트게 된다. 그런 믿음에서 정신적 에너지가 생겨나고, 믿음의 힘에 의해 강력한 종교적 실천이 추동되고, 그런 실천에 의해 업이 바뀌고 마침내 삶과 운명이 바뀌게 된다. 이런 선순환의 고리를 확립하는 것이 ‘좋은 품성[善品]’이다. 그런데 주저하고 망설이는 의심소는 그런 선순환으로 가는 흐름을 방해한다.
셋째, 진리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면 선순환의 고리가 작동하지 못하는[善不生]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저런 의혹에 골몰하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주저하면 당연히 바른 믿음이 생겨날 수 없다. 내적으로 믿음이 부재하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도 뒤따르지 않는다. 실천이라는 업業이 없으면 삶이 바뀌지 않음으로 결과적으로 의심소는 선순환을 가로막아 윤회전생하는 고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유의할 점은 의심소는 사성제나 불교의 진리에 대해 거부하는 불신不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분명하게 ‘이것은 아니야!’라고 불신한다면 이미 불자의 범주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의심소는 불법의 테두리 속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지만 그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서지 못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하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바른 이해와 신심견고信心堅固
종교는 신념체계이므로 모든 종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확고한 믿음과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은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신심견고나 말뚝신심 등을 강조하며 불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있다.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도의 으뜸이며 모든 공덕의 어머니[信爲道源功德母]”라고 했다. 바른 믿음이 있어야 바른 길로 가는 도를 닦을 수 있고, 바른 믿음이 서야 모든 공덕을 실천할 수 있다. 믿음이 불러일으키는 이런 작용에 의해 일체 모든 선한 법이 자라나게 된다[長養一切諸善法].
그런데 의심소는 이와 같은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라는 확신을 유예하고 결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저하고 망설이는 ‘의疑’가 믿음을 방해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무조건적 믿음이 아니라 바른 이해와 믿음을 결부시킨다. 신해행증信解行證에서 믿음을 나타내는 ‘신信’과 바른 이해를 의미하는 ‘해解’는 서로 쌍을 이루고 있다. 바르게 이해해야 의혹이 사라지고, 그때 비로소 굳건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덮어 놓고 믿는 맹신은 무지의 산물이며, 그런 믿음은 무지가 깨지는 순간 믿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의심소를 다스리는 것은 무조건 믿는 맹신이 아니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른 이해가 있을 때 결정을 유예하는 ‘의’가 사라지고, 굳건한 믿음이 생겨난다.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생기는 믿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음으로 신심견고가 되고 말뚝신심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이란 ‘와서 보라는 것’이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와서 직접 보고 분명하게 이해할 비로소 법에 대한 깊은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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