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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와 조론]
‘자성自性’과 ‘공空사상’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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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18 년 10 월 [통권 제66호]  /     /  작성일20-07-24 10:43  /   조회7,4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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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活仁黔 | 자유기고가 

 

승조가 『부진공론』에서 논구論究한 ‘사물은 본성상 공하다’는 성공性空은 불교사상의 특색 가운데 하나다. 붓다가 가르침을 펼 당시 공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심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붓다의 교설敎說이 보다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 공사상의 외연外延도 점차 확대됐고, 내포內包 또한 더욱 깊어졌다. 공의 영향력도 점점 커졌다. 결국 붓다를 공왕空王, 불교를 공문空門으로 부를 정도에 이르렀다. 대승이든 부파불교든, 유有를 주창하든 무無를 내세우든 공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공과 공성空性은 붓다 가르침의 중요한 술어 가운데 하나로 정착됐다.

 


붓가가야 대보리사의 붓다.

 

특히 교리가 발전하는 과정에 자성自性이라는 말이 부각되자 공도 자연히 강조되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공사상의 탄생은 자성 개념의 정립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자립할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자성은 자기 안에 자기의 존립 근거를 모두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인因과 연緣의 결합에 의해 출현한 세간의 모든 존재는 항상 변화 속에 있을 뿐 불멸하는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 존재의 본질本質을 결정하는 자기自己’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의 하나다. 불변하는 존재인 아트만을 반대한 불교에 자성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떤 과정을 거쳐 자성이라는 개념이 정립됐을까? 자성 개념은 불교 성경聖經의 집성集成과 부파部波의 분열, 부파의 독자적인 교설 해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경 율의 본모와 법상

 

보리수 밑에서 증득한 깨달음에 토대를 둔 ‘교설敎說[경經]’과 필요에 따라 제정된 ‘행동 규칙[율律]’은 붓다 당시에 이미 상당한 분량에 달했다. 출가자 개개인이 모두를 암송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출가자들이 들은 내용과 외우고 있는 부분이 서로 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붓다가 입적하기 전부터, 어쩔 수 없는 상황과 필요에 의해 경과 율 암송에 분업방식이 도입됐다. 기억력이 뛰어난 제자인 다문자多聞者, 교설을 암송하고 그 의미를 잘 이해한 지법자持法者·지경자持經者, 계율 항목을 잘 외우고 있는 지율자持律者 등이 출현했다. 지혜제일 사리불, 다문제일 아난 등은 이 사실을 알려주는 칭호라 할 수 있다. 『중아함경』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아난아! 함께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비구 가운데 경을 아는 비구, 율 조항을 외우는 비구, 본모를 암송하고 있는 비구가 있다면, 그 비구들이 사는 곳에 가 다투는 이 일을 이야기하라.” 붓다가 열반하기 이전부터 경·율 암송에 분업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의할 것은 ‘본모를 암송하고 있는 비구’라는 부분이다. 본모本母는 경과 율의 ‘대강과 세목[강목綱目]’ 즉 목차·제목을 말한다. 연구주제로 선정된 것, 연구제목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논모論母라 하기도 하며 산스크리트어는 mātŗkā이다. 마달리가摩呾履迦·마질리가摩窒里迦·마다라가摩多羅迦·마득륵가摩得勒伽 등으로 음역됐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권제40에 본모에 대한 설명이 있다.

 

“마질리가는 … 소위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보리분, 팔성도분, 사무외, 사무애해, 사문사과 … 이 모든 것을 마질리가라고 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가 설명한 본모가 숫자와 결합됐을 때는 법수法數로, 숫자가 붙지 않았을 때는 법상法相으로 각각 불려 지기도 한다. 본모는 “경과 율의 모체母體”라는 뜻이며, 붓다의 제자들은 경모經母와 율모律母에 의거해 경과 율의 내용을 암송했다. ‘사념처’라고 말하면 사념처와 관련된 경의 내용을 머리에 떠올리며 읊조렸다. 본모는 대개 낮은 숫자에서 높은 숫자로 - 즉 1, 2, 3, 4, 5, 6 … - 정리됐기에 외우기가 편했다. 그래서 제목·목차의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붓다가 입적한 그 해(기원전 486년경)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위치한 칠엽굴에서 마하가섭이 주도해 제1차 결집이 이뤄졌다. 오백비구가 참여해 경과 율을 묶었다. 경모經母(경의 목차)와 율모律母(율의 목차)도 확정했다. 물론 문자로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 방식으로, 결집된 경과 율이 불교도 사이에 전파됐다. 아쇼카왕(기원전 268년 즉위. 기원전 264년 관정灌頂. 기원전 230년 타계)이 통치하던 시기 이후부터 경과 율이 점차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붓다가 입멸한 지 110년 정도 지난 뒤인 기원전 370년 무렵, 제2차 결집이 진행됐다. 남전南傳불교 자료인 『도사島史』·『대사大史』·『논사論事』 등에 의하면 바이샬리 비구들이 신도들로부터 금과 은을 직접 받는 등 ‘계율과 맞지 않는 열 가지 일’이 문제가 되어 비구 칠백인이 바이샬리에 모여 경과 율의 내용을 결집했다. 당시 열 가지 일이 법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상좌부, 이들의 결정에 반대한 사람들은 대중부를 형성했다. 이를 계기로 ‘조화로운 하나의 맛[一味和合]’을 유지하던 교단은 점차 분열되기 시작했다. 불전北傳불교 자료인 『아비달마대비바사론』(권제99)·『이부종륜론』등에 따르면, 대천大天이라는 이름을 가진 비구가 주장한 ‘다섯 가지 일’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교단은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기원전 370년 무렵부터 기원후 150년 경 대승불교가 유행할 때까지 18부(남전 자료) 내지 20부(북전 자료) 정도의 부파가 생겼다. 이 시기 불교를 부파불교部波佛敎라 부른다.

 

각 부파는 독자적인 경·율·론 삼장을 가졌다. 모든 부파가 삼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경이든 율이든 논이든)은 갖고 있었다. 현장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올 때 각 부파의 삼장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부파가 정력을 쏟은 대상은 본모本母 즉 법상法相의 연구였다. 특히 상좌부와 여기서 갈라져 나온 설일체유부는 ‘법상 연구’를 아비달마라 불렀다. 붓다의 교설을 담은 경은 ‘법法’이며, 이를 연구하는 것을 ‘대법對法’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비달마로 명명했다. 아함경이 집성되기 전부터 아비달마라는 용어는 이미 불교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비달마라는 말은 원래 “경과 율을 찬탄한다.” 혹은 “찬탄할 만한 최고의 구경법究竟法”이라는 의미였다.

 

부파 가운데 대중부는 붓다가 말한 모든 교설은 요의了義라고 판단해, 모든 경을 아비달마라고 불렀다. 반면 여러 부파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녔던 설일체유부는 어떤 경은 요의경이지만 어떤 경은 불요의경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찬탄할 가치가 있는 최고의 구경법을 설한 경”(『아비달마대비바사론』 권제1)을 아비달마라고 명명했다. 설일체유부는 특히 깨달음에 이르는 가르침을 설명한 법을 아비달마로 지칭했다. 사념처·사정근·사신족·오근·오력·칠각지·팔정도(37도품道品) 등 성도聖道의 실천을 위주로 한 것이 그것이다. 아비달마의 또 다른 특징은 붓다의 교설을 간단하게 해설하던 것에서 점차 내용이 깊어지고 상세한 분석으로 나아간 것이다. 붓다가 말한 연기에 대해 설일체유부가 육인六因·사연四緣·오과五果 등으로 상세하게 분석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면 설일체유부는 법상法相을 어떤 방식으로 연구했을까?

 

일체설과 분별설로 현상 관찰해 진리 파악

 

불학佛學이 현상을 관찰해 진리를 파악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체설一切說’이다. 분석을 통하지 않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요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반야계경전이 주창하는 성공性空이 대표적이다. 하나하나 분석하지 않는다. 직관으로 파악한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 나오듯이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곧바로’ 철견徹見한다. 다른 하나는 ‘분별설分別說’이다. 현상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분별한 뒤 진리에 접근한다. 분석공分析空이 예다. 오온·십이처·십팔계 하나하나를 나누어 분석한 뒤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주장한다. 그런데 붓다는 분석하고 분별하는 방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양 극단을 분석한 뒤 중도의 관점을 결택決擇했다. 『아함경』에 직관 보다는 분석적인 방식으로 가르침을 설하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설일체유부도 분석적인 방식으로 법상을 연구했다. 법상을 하나하나 분별해 연구하는 것을 ‘법상분별法相分別’이라 하며, 이 과정에서 실체實體를 가진 자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실유론實有論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제는 ‘설일체유부가 분석한 법상(범주範疇라고 불러도 좋다)이 무엇’이며, ‘무엇에 근거해 이들 법상을 도출 했는가’이다. 이 문제는 결국 붓다의 원음을 전하는 가장 원초적인 경전이 무엇인가로 연결된다. 그 성전聖典에서 부파불교가 분석한 법상을 찾아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가장 일찍 결집된 성전은 『잡아함경』이며, 네 종류의 아함경 가운데 『잡아함경』이 근본이다. 이는 『유가사지론(섭사분攝事分)』 권제85에서 증명된다.

 

“「법상에 들어맞고 합당한 경전」은 네 가지 『아함경』을 가리킨다. 첫 번째는 『잡아함경』, 두 번째는 『중아함경』, 세 번째는 『장아함경』, 네 번째는 『증일아함경』이다. 이 가운데 『잡아함경』은 붓다가 중생들을 교화할 때 널리 설법한 것으로, ‘붓다가 말한 것’과 ‘제자들이 말한 것’을 종류별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온·계·처에 따라 분류한 것, 연기·식·제에 따라 분류한 것, 사염주·사정단·사신족·오근·오력·칠각지·팔정도·들숨과 날숨·학처·깨끗함을 증득함 등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팔중설에 따라 분류한 것 …… 즉 저 일체의 법상을 가르침에 따라 분류한 것, 차례대로 분류했기에 『잡아함경』이라 한다. 법상에 따라 분류한 가르침 가운데 중간 길이에 해당 하는 것을 『중아함경』; 법상에 따라 분류한 가르침 가운데 긴 길이에 해당하는 것을 『장아함경』; 법상에 따라 분류한 가르침 가운데 일·이·삼 등 점차 숫자가 증가하는 방식으로 설명했기에 『증일아함경』이라 한다. 스승과 제자가 네 종류를 서로 전하고 전해 지금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로 이를 『아함경』이라 하고, 「법상에 들어맞고 합당한 경전」이라 말한다.” 

 

설일체유부의 송본誦本인 『잡아함경』의 ‘잡雜’은 ‘잡되다’ ‘혼합되다’는 의미가 아니다. ‘법상에 따라 분류했다’ ‘차례대로 분류했다’는 뜻이다. 『잡아함경』이 현존하는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입증된 이상 남은 문제는 ‘『잡아함경』의 본모는 무엇인가’이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학자 가운데 한 명인 뤼청(呂澄. 1896∼1989)은 1924년 『내학內學』 제1집에 발표한 「잡아함경간정기雜阿含經刊定記」에서 『유가사지론(섭사분攝事分)』 권제85와 『잡아함경』을 비교해 본모를 찾아냈다. 대만의 인순스님(印順. 1906∼2005)이 이를 토대로 연구해 “『잡아함경』이 능설能說·소설所說·소위설所爲說의 세 부분으로 편집됐음”을 『원시불교성전집성原始佛敎聖典之集成』에서 구체적으로 밝혔다.

 

남은 문제는 본모(법상)를 밝혀내는 것이다. 앞의 『유가사지론』 인용문에서 ‘법상에 들어맞고 합당한 경전[事契經]’이 네 가지 『아함경』임을 알았다. 그러면 『아함경』이 말하는 법상[사事]은 무엇을 가리킬까? 『유가사지론(본지분本地分)』 권제3에 해답이 있다. 

 

“마땅히 알아라! 모든 붓다의 말씀은 아홉 가지 법상에 포함된다. 아홉 가지 법상이란 무엇인가? 첫 째는 유정 법상; 둘째는 수용 법상; 셋째는 생기 법상; 넷째는 안주 법상; 다섯째는 염정 법상; 여섯째는 차별 법상; 일곱째는 설자 법상; 여덟째는 소설 법상; 아홉째는 중회 법상이다. 유정 법상은 오온을 말하며, 수용 법상은 십이처다. 생기 법상은 십이인연과 연생이며, 안주 법상은 사식을 가리킨다. 염정 법상은 사성제이며, 차별 법상은 무량계를 말함이다. 설자 법상은 붓다와 그 제자를 가리키며, 소설사는 사념처 등 보리분법을 가리킨다. 중회 법상은 소위 8중을 말함이다. 8중은 찰제리, 바라문 장자, 사문, 4대천왕, 33천, 염마천, 범천 등 여덟을 가리킨다.”

 

『잡아함경』의 내용은 모두 아홉 가지로 분류됨을 알 수 있다. 아홉 가지 내용은 다시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가사지론(섭사분攝事分)』 권제85에 분류 방식이 전한다. 

 

“마땅히 알아라! 이처럼 내용에 따라 분류한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대략 세 가지 모습[삼상三相]으로 나눌 수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능설能說; 두 번째는 소설所說; 세 번째는 소위설所爲說이 그것이다. 붓다와 붓다의 제자들은 ‘능히 설법할 수 있기에’ 붓다가 설법한 것과 제자들이 설명한 것이 능설이다; 이해 한 것과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소설所說인데, 예를 들면 오온·육처·인연에 관한 내용과 37도품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만약 비구·천·마귀 등이 말한 것이 소위설이다. 이런 내용으로 『잡아함경』을 결집했다.”

 

이런 내용에 근거해 대만의 인순印順스님이 법상의 순서에 따라 『잡아함경』을 새롭게 편집한 『잡아함경회편雜阿含經會編』을 펴냈다. 『잡아함경회편雜阿含經會編』의 목차가 바로 법상法相이다. 

 

“오음송 제1[1상응] : (1)음상응 178경.

육입처송 제2[1상응] : (2)입처상응 285경.

집인연송 제3[4상응] : (3)인연상응 78경, (4)제상응 150경, (5)계상응 37경, (6)수상응 31경.

 

도품송 제4[10상응] : (7)염처상응 54경, (8)정단상응(전하지 않음), (9)여의족상응(전하지 않음), (10)근상응 27경, (11)력상응 60경, (12)각지상응 67경, (13)성도분상응 114경, (14)안나반나염상응 22경, (15)학상응 32경, (16)불괴정상응 29경.

 

팔중송 제5[11상응] : (17)비구상응 22경, (18)마상응 20경, (19)제석상응 22경, (20)찰리상응 21경, (21)바라문상응 38경, (22)범천상응 10경, (23)비구니상응 10경, (24)파자사상응 16경, (25)제천상응 108경, (26)야차상응 12경, (27)림상응 32경.

 

제자소설송 제6[6상응] : (28)사리불상응 81경, (29)목건련상응 53경, (30)아나율상응 11경, (31)대가전연상응 10경, (32)아난상응 11경, (33)질다라상응 10경.

 

여래소설송 제7[18상응]: (34)라타상응 133경, (35)견상응 93경, (36)단지상응 10996경, (37)천상응 48경, (38)수증상응 70경, (39)입계음상응 182경, (40)불괴정상응 62경, (41)대가섭상응 11경, (42)취락주상응 10경, (43)마상응 10경, (44)마하남상응 10경, (45)무시상응 20경, (46)파차출가상응 9경, (47)외도출가상응 15경, (48)잡상응 18경, (49)비유상응 19경, (50)병상응 20경, (51)업보상응 35경.”

 

그래도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다. 『잡아함경』의 법상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간직하고 있느냐가 그것이다. 현존하는 『잡아함경』은 설일체유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용이 어느 정도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때문에, 『잡아함경회편雜阿含經會編』과 남전불교의 『상응부경전』을 비교해 원형을 추측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음상응, 입처상응, 인연상응, 제상응, 계상응, 수상응, 염처상응, 정단상응, 여의족상응, 근상응, 력상응, 각지상응, 성도분상응 등은 『상응부경전』에도 들어있다. 따라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삼수, 사념처, 사정단,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의 본모(本母. 법수, 법상)는 초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면 이들 본모와 관련된 『잡아함경』의 경문을 분석해 설일체유부의 ‘실유론實有論’이 등장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잡아함경>의 여실관 여실지 수행법

 

주지하듯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수행이다. 사변적인 논의가 결코 불교의 목표는 아니다. 그래서 초기불교 이래 수행이 중시됐다. 여실관如實觀은 당시 불교의 특색을 보여주는 수행법인데, 여실如實하게 일체법을 관찰해나가는 과정에서 관찰 대상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점차 생겨났다. 오온 가운데 색온과 관련된 『잡아함경』의 여실관을 보자.

 

“붓다가 여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하기에 괴로움이다, 괴로움이기에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즉 나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정관眞實正觀이라고 한다. 이처럼 수·상·행·식도 무상하며, 무상하기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에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니기에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정관이라고 한다. 이렇게 관찰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은 색을 멀리하고, 수·상·행·식도 멀리한다. 멀리하기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에 해탈을 얻는다. 해탈을 얻었기에 「나의 생(윤회)은 이미 다했다, 수행을 이미 성취했기에 해야 할 바를 이미 마쳤다.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달아 안다.」는 진실지가 생긴다.’ 그 때 여러 비구들이 붓다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모셨다.” (『잡아함경』 권제1)

 

“나는 이처럼 들었다. 어느 때 붓다가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붓다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칠처선七處善·삼종관의三種觀義가 있다. … 무엇이 칠처선인가? 비구들이여! 여실히 색을 알고, 색이 생겨나는 원인을 알며, 색의 멸함을 알며, 색이 멸한 길을 알며, 색이 주는 맛·색이 주는 근심·색에서 벗어남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如實知]. 이처럼 수·상·행·식, 수·상·행·식의 원인, 수·상·행·식의 멸함, 수·상·행·식이 멸한 길을 알며, 수·상·행·식의 맛을 알고, 수·상·행·식이 주는 근심을 알며, 수·상·행·식에서 벗어남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如實知]. … 무엇을 삼종관의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한적한 곳, 나무 밑, 탁 트인 곳 등에서 음陰·계界·입入 등을 관찰해 올바른 방편을 사용해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을 삼종관의라 부른다.’” (『잡아함경』 권제2)

 

“무엇이 색여실지色如實知인가? 모든 색은 지·수·화·풍 사대와 사대가 만들어낸 것으로 이를 색이라 한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은 색여실지라 부른다. 무엇을 색집여실지色集如實知라 하는가? 애욕이 색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렇게 색집色集을 관찰하는 것을 색집여실지라 부른다. …… ” (『잡아함경』 권제2)

 

이처럼 객관세계나 관찰하는 대상을 진실하게 인지하는 것을 여실지如實知 혹은 여실관如實觀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구들이 ‘생각을 없애는 방식[무사무려無思無慮]’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실제 모습을 자세하게 분석하는 태도로 관법觀法을 진행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된다. 색을 하나하나 분석해 지·수·화·풍으로 구성된 것을 색이라 한다거나 색집色集·색멸色滅·색리色離 등을 상세하게 구별해 관찰하는 점 등은 모든 법法을 하나하나 분별해 논구하는 아비달마의 분석법과 비슷하다. 주의할 것은 『잡아함경』의 본모는 여전히 목차 정도의 역할, 즉 경문을 암송할 때 편리함을 제공하는 제목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어찌됐던, 『잡아함경』에 보이는 여실관如實觀 수행법은 “짐승들은 숲과 늪으로 모여들고 새는 허공으로 날아가듯이, 성스러움은 열반에 귀착되고 법法은 분별分別에 돌아간다.”는 붓다의 말씀과 함께 부파불교시기에 두드러지는 법상분별法相分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모를 하나하나 분별해 법상을 연구하는 방식은 당연히 ‘아미달마 논서’의 발달로 연결됐다. 부파들 가운데 상좌부와 거기서 분파된 설일체유부가 특히 논서論書를 중시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남전南傳불교 상좌부에 7부 논서가 있다. 『법집론』, 『분별론』, 『계론』, 『인시설론』, 『쌍론』, 『발취론』, 『논사』가 그것이다. 북전北傳불교 설일체유부에도 ‘육신일족론六身一足論’이라는 7부 논서가 있다. 『아비달마법온족론』,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아비달마시설족론』, 『아비달마품류족론』, 『아비달마계신족론』, 『아비달마식신족론』, 『아비달마발지론』 등이다. 남전 상좌부와 북전 설일체유부는 서로 관계없이 발전했지만, 모두 7부 아비달마론으로 자파의 교의를 확립했다. 이것은 우연히 아니다. 남·북전 공통의 연원인 『사리불아비담심론』을 저본으로 자파自派 논서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는 본래 붓다가 말씀하신 내용 즉 경을 해석한 것이다. 붓다도 자신이 말한 법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제자들 중에서는 사리불·목건련·가전연 등 세 사람이 주로 해설했다. 사리불이나 목건련의 해석이 특히 각광을 받았다. 두 사람이 붓다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도 사리불이나 목건련에게 붓다가 설한 법의 의미를 묻곤 했다. 『사리불아비담심론』이 사리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논서로 추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좌부와 설일체유부 뿐만 아니라 독자부·정량부·밀림산부·현주부·법상부·법장부·설산부 등도 모두 『사리불아비담심론』을 토대로 자파의 논서를 정립했다. 따라서 『사리불아비담심론』이 법상을 연구한 방법을 파악하면 각 부파 논서들의 방법론도 자연히 알 수 있다. 이 책이 사용한 방법도 분별법이다. 법상(본모)을 하나하나 구별해 관찰·분석하는 『잡아함경』의 여실관如實觀 수행법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법法’은 당연히 붓다가 말씀하신 ‘가르침’ 즉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삼수, 사념처, 사정단,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의 본모(本母. 법수, 법상)를 말한다. 이들(법수·법상·본모)을 분별해 논구하는 방법이 분별법이다. 분별법은 아비달마 논서가 주류를 이룬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보다 자세하게 세분됐다. 법상 혹은 법수의 하나하나를 자상自相·공상共相·상섭相攝·상응相應·인연因緣 등으로 나누어 깊이 논구했다. 다섯 가지는 아비달마의 근본적인 논제論題였고, 이것에 통달해야 진정한 아비달마논사로 대접 받았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연구하는 것이 분별법인가? 『사리불아비담심론』 권제3을 보자.

 

“무엇이 색음(色陰. 색온)인가? 만약 색법이라면 그것을 색온이라 한다. 무엇을 색음이라 하는가? 지·수·화·풍과 그것이 만들어낸 색色을 색음이라 한다. … 무엇이 사대인가? 지대·풍대·화대·풍대를 사대라 한다. 무엇을 ‘사대가 만들어낸 색’이라 부르는가? 눈·귀·코·혀·몸·색깔·소리·향기·맛, 몸과 입으로 지으며 계율에 어긋나는 무표색, 유루의 몸과 입으로 지으며 계율에 어긋나지 않은 무표색, 유루신이 발달하는 것, 유루신이 사라지는 것, 정어, 정업, 정명, 몸이 성장하는 것, 몸이 사라지는 것 등을 사대가 만들어낸 색이라 부른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아비달마 논서의 분별법은 주제별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연구법이다. 색온을 이야기 하고, 이어서 지·수·화·풍을 분석하고, 계속해 사대가 만들어낸 색을 분석한다. 매우 엄밀한 방법으로 하나씩 하나씩 분석한다. 색온이 끝나면 수·상·행·식온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분별·분석한다. 이런 방법으로 오음·십이처·십팔계 각각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경계 지은 뒤, 법상과 법상 사이의 상섭相攝·상응相應 관계를 천착한다. 그래도, 법상(본모)은 여전히 분석대상이지 ‘실체를 가진 존재’는 아니다. 

 


토론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고 있는 티벳의 학인 스님들

 

“만약 포섭하는 방식을 세우면 일체를 포섭하고 포섭하지 않는 법을 당연히 안다. 오음·십이처·십팔계로 일체법을 포섭하는 것, 오음·십이처·십팔계로 일체법을 포섭하지 않는 것, 오음·십이처·십팔계 같은 법상으로 일체법의 작은 부분을 포섭하는 것, 오음·십이처·십팔계 같은 법상으로 일체법의 작은 부분도 포섭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성은 자성을 포섭하나 자성이 타성을 포섭하지는 못한다. 자성이 자성에 연계될 수는 있으나 자성이 타성에 연계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포섭하는 것, 포섭하지 못하는 것, 포섭하는 것이 아닌 것, 포섭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 등이 있다.”

(강조는 필자)

 

인용문에 나오는 ‘자성自性’은 ‘자상自相’을 가리킨다. 불학에서 사용하는 상相과 성性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특성[성性]’은 ‘그에 상응하는 모습[상相]’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우牛]의 특성을 가진 생물체는 암소든 수소든 얼룩소든 젖소든 소의 성질을 가진 모습을 띈다. 사람의 성질·본성을 가진 존재가 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없다. 자상은 자성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다.

 

분별법으로 법상을 세밀하게 논구하고 분석하는 과정에 마침내 자성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물론 『사리불아비담심론』에 보이는 자성이라는 단어는 설일체유부가 주창하는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성은 아니다. 문자만 같을 뿐이다. 『사리불아비담심론』의 자성은 분류학적인 의미가 강하다. ‘저것과 다른 이것’ 혹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성격을 가진 존재’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자성일 따름이다. 반면, 설일체유부의 주요한 논서 가운데 한 권인 『아비달마품류족론』에서, 법상은 ‘실체를 가진 불변하는 존재’를 뜻하는 자성自性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사리불아비담심론』에 등장한 자성

 

『아비달마품류족론·변오사품辨五事品』이 제시하는 5위67법은 5온·12처·18계로 일체법을 포괄하던 이전 시기의 그것보다 더 세밀하고 더욱 정치精緻하게 일체법을 분류했다. 법상(범주) 개념이 보다 세분화됐다. 5위는 색법, 심법, 심소법, 심불상응행법, 무위법 등 다섯이다. 색법에 15법, 심법에 6법, 심소법에 27법, 심불상응행법에 16법, 무위법에 3법이 각각 포함된다. 67법은 이론상 현실에 실존하는 법(존재)이다. 따라서 일대일 대응관계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이들 법상은 『사리불아비담심론』 보다 훨씬 더 ‘실체實體 개념槪念’에 다가갔다고 봐도 된다. 그럼에도 일체법을 구성하는 5위67법에는 여전히 ‘분류학적인 의미’가 농후하며 ‘실체 개념’이 되기에는 2% 정도 부족하다.

 

경과 율을 외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제정된 ‘본모’가 부파불교시기를 거치며 존재의 모습을 가리키는 ‘법상法相’으로 개념이 확대되고, 『사리불아비담심론』에서는 5온·12처·18계 대신 세계에 실제로 있는 ‘일체법’을 가리키는 존재로 법상法相은 보다 구체화 된다. 그러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 이르러 법상은 불변하는 실체를 가진 자성自性 개념으로 전화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서序』는 힘주어 말한다. 

 

“질문 한다: 가르침을 잘 설명하시는 분도 역시 모든 존재는 실체·성상性相·아사我事가 있다고 말씀하시나 악견은 아니다. 외도가 아我는 실제로 있다고 말하면 무엇 때문에 악견이 되는가? 답 한다: 아我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법아’이고 다른 하나는 ‘보특가라아我’이다. 가르침을 잘 설명하시는 분은 오직 법아가 있고 법성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제대로 파악하시기에 악견이 아니다. 외도는 보특가라아가 실재한다고 말한다. 보특가라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허망한 견해이기에, 악견이라 말한다.”

 

인용문에 보이는 ‘법아法我’의 ‘법’은 『잡아함경』·『사리불아비담심론』·『아비달마품류족론』이래로 분별·논구의 대상이던 본모 혹은 법상法相을 가리킨다. 여기에 이르러 ‘제법諸法의 실체實體’ 혹은 ‘불변하는 실체實體를 가진 존재’로 의미가 전화轉化됐다. 그래서 “법아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인용문에 나오는 보특가라아 즉 인아人我는 윤회의 주체를 말한다. 법상은 불변하는 실체적인 존재지만, 윤회의 주체인 인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주장이다. 아我는 단지 오온이 집적된 임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서序』에 있는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존재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실물이 있는 것으로 온·계 등이다. 다른 하나는 임시로 존재하는 것으로 남자·여자 등이다.”

 

오온·십이처·십팔계는 실체가 있는 존재이고, 남자·여자는 임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의근·안식·의식 등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몸은 오온이 임시로 합해져 존재하는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잡아함경』에서는 단지 번뇌를 끊는 수행을 위해 일체법을 오온·십이처·십팔계로 나누어 관찰했을 뿐, 오온 자체가 실체적實體的 존재는 아니었다. 부파가 분화되고, 경전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논서가 발달하는 과정 등을 거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 이르러, 오온·십이처·십팔계는 실제로 있는 존재 즉 ‘불변하는 실체’를 가진 자성自性적인 법체法體로 위상位相이 격상되고 말았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因과 연緣도, 열반도, 과거·현재·미래도 실체적인 존재라고 설일체유부는 주창한다.

 

“인과 연은 실유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집착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유론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뜻을 꺾기 위해, 인과 연은 성性에서든 상相에서든 모두 실유實有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어떤 이들이 집착해 말한다: 택멸·비택멸·무상멸은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비유론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집착을 없애주기 위해, 세 가지 멸滅은 모두 실체가 있음을 밝힌다.”

 

“질문 한다: 무엇 때문에 이 논을 지었는가? 답 한다: 다른 종파의 그릇된 견해를 불식시키고 올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어떤 이들은 과거와 미래는 실유적인 존재가 아니며, 현재는 비록 존재하나 찰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견해를 불식시키고, 과거·미래는 실제로 존재하며, 현재 또한 실재함을 밝힌다. 과거·현재·미래 모두 삼세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설일체유부라고 말하면, 과거·미래·현재가 반드시 실제로 있다고 동의해 삼세가 실유實有함을 밝혀야 된다. 설일체유부임을 인정하는 그 사람은, 삼세가 실유함을 말해야만 비로소 설일체유부에 소속된다.”(『아비달마구사론』 권제20)

 

마지막 인용문은 설일체유부가 왜 설일체유부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삼세실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설일체유부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설일체유부가 높이 들고 흔드는 ‘독특한 표지’이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모두 실재하고 과거·현재·미래도 실유實有한다는 설일체유부의 이론에 의하면, 『아비달마품류족론』이 분류한 5위67법은 모두 실존하는 실체적인 존재 즉 ‘실재하는 자성自性’이다. 자성은 ‘일체법의 본체本體’이기에 ‘법체法體’라고도 한다. 이들 5위67법이 화합해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낸다. 5위67법은 ‘불변하는 법체法體’이며, 다른 존재는 이들 법체가 결합해 만들어낸 ‘임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오온이 결합해 출현한 사람의 몸은 임시적이나, 사람의 신체를 만드는 5위67법은 ‘불변하는 내재적 본질本質인 자성’을 가진 법체로 항상 실재實在한다.

 

불변하는 실체인 법체. 극미의 출현

 

법체를 왜 항상 존재할 수 있을까? 인과 연의 결합으로 만들 수 없을까? 극미極微 때문이다. 물질을 분석하다 하다 끝에 이르면 최소단위인 극미極微만 남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를 일一극미라 한다.” “극미는 가장 작은 색色이다. 자를 수 없고, 부술 수 없고, 관통할 수 없다.”고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은 주장한다. 극미란 무엇인가? 설일체유부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미 자성을 말했다. 그래서 지금 말한다. 묻노라: ‘무엇 때문에 온이라고 부르는가?’ 답 한다: ‘온은 모으다, 합하다, 쌓는다는 뜻이다.’ … 묻노라: ‘많이 증대하는 말이 온이 증대한다는 말이라면, 하나의 극미를 색온이라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이는 말한다: ‘하나의 극미로는 색온이 되지 않는다. 만약 색온을 만들려면 많은 극미가 필요하다.’ 또 어떤 이는 말한다: ‘하나하나의 극미가 온의 모습을 갖고 있기에, 하나하나의 극미로 색온의 모습을 만들 수 있다. 만약 하나의 극미가 색온의 모습을 갖지 않으면, 여럿을 모아도 역시 온이 아니다.’ 아비달마 논사가 말한다: ‘만약 가온假蘊을 보면, 하나의 극미는 일계·일처·일온의 작은 부분이라고 말해야 된다; 만약 가온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의 극미가 일계·일처·일온이라고 말해야 된다. 곡식이 많은 무더기에서 어떤 사람[A]이 한 알의 곡식을 잡아 쥐자, 이것을 본 다른 사람[B]이 당신은 무엇을 집었느냐고 물으면, 만약 A가 곡식 무더기를 보았다면 나는 곡식 무더기에서 한 알의 낱알을 집었다고 말하고, 만약 A가 곡식 무더기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곡식을 집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수온·상온·행온·식온도 하나하나 찰나의 심소가 모인 것이 색온과 마찬가지다.”

 

“묻노라: ‘푸른색을 띈 하나의 극미가 있는가?’ 답 한다: ‘있다. 다만 눈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볼 수 없다). 만약 하나의 극미가 푸른색이 아니라면 여러 극미가 모여도 푸른색이 아니다. 황색등도 마찬가지다.’ 묻노라: ‘긴 모양의 극미가 있는가?’ 답 한다: ‘있다. 다만 눈으로 식별할 수는 없다. 긴 모양의 극미가 없다면 극미 여럿을 모아도 긴 모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묻노라: ‘극미의 양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답 한다: ‘극미는 가장 작은 색色이다. 자를 수 없고, 부술 수 없고 … 극미라 한다. 가장 작은 극미 7개가 모여 하나의 미세한 먼지[미진微塵]를 만든다. 이것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다.’”

 

“묻노라: ‘무엇 때문에 대종大種(지·수·화·풍의 극미)은 만들어질 수 없는가?’ 답 한다: ‘만들 수 있는 것[능조能造]과 만들어 지는 것[소조所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듯이 「이룰 수 있는 것」과 「이루어지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묻노라: ‘대종과 조색造色은 서로 다른가?’ 존자 세우가 이렇게 말했다: ‘원인의 대종이고, 결과는 조색이다. 만드는 것은 대종이고, 만들어 지는 것은 조색이다. 소의所依는 대종이고, 능의能依는 조색이다. … 능히 건립할 수 있는 것은 대종이고, 건립되어지는 것은 조색이다.’”

 

앞의 여러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감각기관으로 인지할 수 없지만 형태와 색깔을 가진’ 극미가 법체의 실유實有를 보증하며, 일체법의 본체인 법체가 실유實有하기에 자성 역시 불변하는 실체實體적 존재가 된다. 지·수·화·풍[사대四大]의 극미인 사대종四大種은 물질세계나 정신세계(관념. 무표색)의 본체本體이자, 세계를 만들어내는 능조인能造因이다. 다른 어떤 것도 사대의 극미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사대의 극미는 인연의 결합으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세계를 만들어내는 근본 요소 즉 본체인 것이다.

 

결국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 혹은 ‘화합한 것은 가짜고[和合假], 가짜는 실체에 의존한다[假依實]’는 설일체유부의 이론은 여실하게 일체법을 관찰하는 『잡아함경』의 여실관如實觀과 본모를 세밀하게 구별해 연구하는 아비달마의 분석법, 즉 오온·십이처·십팔계·5위67법에 속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획정한 후 법상과 법상 사이의 상섭相攝·상응相應 관계를 천착한 본모의 분별적 연구가 낳은 결과물이다. 경과 율을 암송하기 편하도록 온·처·계로 구분해 만든 ‘본모(법상)’가 일체법을 포괄하는 5온·12처·18계로 의미가 확대되고, 5온·12처·18계는 다시 5위67법으로 법상이 보다 세밀하게 나누어진 뒤, 5위67법 개개는 마침내 항상 실존하는 실체적인 존재 즉 ‘일체법의 본체本體인 법체法體’이자 ‘불변하는 실체를 가진 자성自性’이 되었다.

 

자성의 존재는 붓다의 무아·연기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것인데, 설일체유부는 왜 자성을 이렇게 감쌀까? 자성이 무아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아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과정에 자성이 등장했다. 특히 인무아人無我를 설명하고자 자성·법체·극미를 만들었다. 오온·십이처·십팔계·5위67법 가운데 인아人我에 속하는 주체는 없다. 사람의 현실적인 생명은 단지 5위67법의 조합 혹은 오온의 화합에 지나지 않는다. 오온·십이처·십팔계·5위67법의 실체성實體性을 승인하면 과거·현재·미래도 자성적인 존재로 인정해야 된다. 오온·십이처·십팔계·5위67법가 삼세에 걸쳐 실재實在하는데, 어떻게 과거·현재·미래를 실체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붓다의 가르침인 무아를 설명하고 논증하려다 자성·법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말았다. 설일체유부가 인아人我를 부정하고 법아法我를 극력 인정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선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성의 존재는 연기법과 어긋난다. 무아를 설명하다 자성에 도달하고 말았는데,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때 공사상이 등장한다. 동시에 대승불교도 힘을 발휘한다. 자성을 논파하는 과정에, 부파불교의 유물론적 경향을 완전히 탈색시킨 공사상은 유심론 일변도의 대승불교로 방향을 돌리는 역할도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결정한다.”는 ‘일체유심조’ 혹은 “객관은 없고 주관만 있다.”는 ‘유식무경’ 역시 공사상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공사상의 정립과 유심론으로의 전환

 

공사상이 절대적인 중심어로 등장하는 경전은 『반야경』이다.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출현한 경전은 반야계이며, 반야계 경전은 중에서 가장 일찍 등장한 것은 『도행반야경·도행품』으로 기원전 50년 전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반야경의 공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선양한 중관학파는 기원후 2∼3세기경 성립된다. 때문에, 반야경의 공사상과 중관파의 학설을 구별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공사상의 원천 역시 붓다의 교설이다. ‘공삼매空三昧’에 그 연원이 닿아있다. 『잡아함경』 권제3에 공삼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때 붓다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비구가 공삼매를 얻지 않고도 무상·무소유·교만을 떠난 지견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지마라! 왜 그러냐? 공삼매를 얻지 못한 자가 무상·무소유·교만을 떠난 지견을 얻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어떤 비구가 공삼매를 얻고서 무상·무소유·교만을 떠난 지견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 말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냐? 공삼매를 증득했다면 무상·무소유·교만을 떠난 지견을 능히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다.’”

 

공삼매를 증득해야만 무상삼매, 무소유삼매, 교만을 떠난 지견을 얻는 삼매를 일으킬 수 있다. 공삼매를 얻지 못하면, 다른 삼매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러면 공삼매란 무엇인가? 

 

“만약 비구가 고요한 곳이나 나무 아래에서, 색의 무상·사라짐·애욕의 여읨 등을 제대로 관찰하고, 이처럼 수·상·행·식의 무상·사라짐·애욕을 여읨 등도 잘 관찰하고, 오온의 무상·사라짐·견고하지 않음·변해감 등을 잘 관찰한다면, 마음이 즐겁고 깨끗해지고 해탈된다. 이를 공空이라 한다. 그러나 교만을 떠난 깨끗한 지견을 얻지는 못한다.”

 

공삼매를 증득하면 마음이 즐겁고 깨끗해지지만, ‘교만을 떠난 지견’을 얻지는 못한다. 무상삼매·무소유삼매도 마찬가지로 ‘교만을 떠난 지견’을 깨닫지는 못한다. 무아、무아소無我、無我所[내가 없고 나의 것도 없다]삼매를 얻어야만 ‘교만을 떠난 깨끗한 지견知見’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오온의 무상無常을 증득하는 공삼매, 색·성·향·미·촉·법 등 육경六境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무상삼매, 탐·진·치 등 삼독을 완전히 떨쳐버린 무소유삼매, 나아가 인식작용의 무상을 통해 ‘나’와 ‘내 것’이 없음을 증득하는 무아、무아소삼매 등은 사실 무상·고·무아를 깨닫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모든 것의 토대가 공삼매를 증득하는 것이다. 공이 수행에서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잡아함경』이 말하는 공삼매는 ‘오온의 무상을 증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행·주·좌·와 즉 수행의 모든 과정에서 ‘나와 나의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계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집착을 없애는 것’에까지 나아간다.

 

공삼매·무상삼매·무소유삼매는 나중에 공삼매·무상삼매·무원無願삼매[삼해탈문. 삼삼매]로 변한다. 무소유 대신 무원삼매가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세간의 일체 유위법에 집착하는 것은 괴로움에 연결된다. 유위법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고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것’, 즉 ‘후유後有가 없음을 증득하는 것’은 초기불교 당시 모든 수행자들의 목표였다. 때문에, 세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리심厭離心’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무원은 바로 염리를 나타낸다. 세간에 대해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무원이다.

 

삼삼매三三昧 가운데 제일 중요한 공삼매는 『반야경』에 이르러 의미가 더욱 크게 발양된다. 『마하반야바라밀경』 권제1은 말한다.

 

“보살은 처음 마음을 내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공·무상·무작법無作法에 머문다.”

“여러 상응[수미일관 되고 있는 것. 이치에 맞는 것] 가운데, 반야바라밀상응이 최고이며, 제일 존귀하고, 제일 뛰어나며, 제일 신묘하고, 위없는 상응이다. 왜 그런가? 보살이 반야바라밀상응을 행하는 것은 소위 공·무상·무작無作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의 여러 상응 가운데 제일 존귀하고 제일 첫째가는 상응은 공상응이다. 그래서 공상응은 다른 여타의 상응보다 뛰어나다.”

 

공상응(空相應. 공삼매)이 바로 반야바라밀상응이다. 이것이 여러 상응 가운데 최고며, 제일 존귀하다. 공삼매를 수행하는 수행자는 『잡아함경』이 강조한 대로 행·주·좌·와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외경外境에 대해 좋아함·물듦·집착하는 마음 등을 내서는 당연히 안 된다. 『반야경』을 이것을 부주不住사상[집착하지 않음]으로 승화시켰다. 『마하반야바라밀경』 권제7은 강조한다.

 

“그때,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집착하지 않는 것 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 보살을 마땅히 색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하면 얻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상·행·식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얻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안眼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意에도 마땅히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 아라한과·벽지불과·보살도·불도佛道·일체종지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근·육경·육식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아라한과·벽지불과·보살도·불도佛道·일체종지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사상은 『잡아함경』과 다르다. 『잡아함경』은 육근·육경·육식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라한과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펴지는 않았다. 반면 대중부가 편집한 『증일아함경』에는 『마하반야바라밀경』과 비슷한 사상이 들어있다. “열반에도 집착하지 말고, 열반에 대한 생각도 내지마라.”가 그것이다. 윤회에도 머물지 말고, 열반에도 집착하지 마라는  무주열반無住涅槃사상을 반야경이 계승한 것이다. “불도에도 집착하지 마라”는 부주不住사상은 결국 “마땅히 공에 머물러야 된다.”는 사상으로 연결된다.

 

“교시가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마땅히 이처럼 머물러야 한다. 보시바라밀부터 반야바라밀, 내공부터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이다. 사념처, 십팔불공법, 일체삼매문, 일체 다라니문, 성문승, 벽지불승, 불승, 성문, 벽지불, 보살, 불 역시 이와 같이 공하다. 일체종지도 공이며, 보살도 공이며, 일체종지공과 보살공은 둘이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교시가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마땅히 이처럼 머물러야 한다.”

 

일체법이 공함을 증득할 주체는 보살이며, 일체법을 통해 공함을 증득하기에 객체는 제법諸法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주체인 보살도 공하고, 관조 대상인 객체 즉 육근·육경 등이 모두 공하다. 주관과 객관이 모두 공하기에, 둘은 결코 둘이 아니며 다르지도 않다. 성공이라는 본성에서 본다면 물物과 아我는 결코 다르지 않다. 공空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태어난 것처럼, ‘본성적으로 공하다’는 점에서 둘은 전혀 차이가 없다. 물아동근物我同根이다. 이처럼, 『잡아함경』의 공삼매에서 시작된 공사상은 『반야경』에 이르러 완전히 탈태 환골했다. 『잡아함경』의 공삼매는 무상을 관찰해 애욕·집착에서 벗어나 청정함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를 계승한 『반야경』은 단순히 무상을 관조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일체제법의 실상實相을 곧바로 직관直觀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법상을 하나하나 분석하다 불변하는 실체實體인 법체·자성·극미를 찾았으나 거기에 걸리고 만 부파불교시기의 ‘분석공分析空 방식’이 아니라, 찰나의 지혜로 일체법의 본성을 전체적으로 통찰해 실체實體가 성공性空임을 한 순간에 파악하는 ‘일체설一切說 방식’으로 공성空性을 증득했다.

 

따라서, 『반야경』은 지혜로 분석해 공을 파악하라고 하지 않고, 일체제법이 본래 공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자성공自性空· 본성공本性空이다. 『대반야바라밀경』을 보자.

 

직관으로 일체 제법의 자성공 본성공 체득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자기의 본성이 모두 공하다.”

 

“그렇다! 그렇다! 일체법이 모두 평등하며, 평등한 본성은 바로 본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본성이 공하다는 이것은 능히 만들어 낼 수 없고, 만들어 질 수도 없다.”

 

일체법이 공함은 만들어진 것도, 만들어 낼 수도 없다. 본성상 공하기 때문이다. 일체법 자신의 본성이 공하다는 자성공自性空이 바로 공성이다. 깊고 미묘한 의미를 지닌 공성은 적멸·법성·열반과 서로 통한다. 일체법이 공한 것이 바로 열반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은 강조한다.

 

“붓다가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제법은 평등하다. 이는 성문이 만든 것도 아니고,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보살마하살이 만든 것도 아니고, 여러 붓다들이 만든 것도 아니다. 붓다가 게시건 계시지 않건, 제법의 본성은 항상 공하며, 본성상 공함[성공性空]이 바로 열반이다.”

 

“수보리여! 깊고 미묘한 것은 공의 뜻이다. 모습이 없고 만들 수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물듦도 없고, 적멸하며, 모든 것을 떠나 있으며, 그러함이며, 법성이며, 실제이며, 열반이다. 이러한 것들이 공의 깊고 미묘한 의미다.”

 

열반은 붓다가 스스로 증득한 자내증自內證의 경계다. 『반야경』의 가르침대로 제법실상이 열반이라면, 일체법의 실상이 붓다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경』 권제22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법의 실제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 붓다다. 또한 제법의 본모습을 얻는 것이 붓다다. 제법의 실제 의미를 통달하는 것이 붓다다. 일체 법을 제대로 아는 것을 붓다라 한다. … 공의 의미가 깨달음의 뜻이다. ‘그러함’의 의미와 법성·실제의 의미가 깨달음의 뜻이다. … 제법실상은 속이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므로 깨달음이라 명명한다. 수보리여! 이 깨달음과 이 제불이 있으므로 깨달음이라 이름 짓는다. 수보리여! 제불이 두루 바르게 알기에 깨달음이라 부른다.”

 

제법의 실상을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실상이 아니고,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다만 가르침을 위해 임시로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이다. 그래서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고 설명한다. 『마하반야바라밀경』 권제2에 관련 설명이 있다.

 

“반야바라밀은 단지 이름만 있다. 이름 붙여서 반야바라밀이라 부른다. 보살도 단지 이름만 있다. … 예를 들어 ‘나’라는 이름은 여러 인연들의 화합으로 있다. 그래서 ‘나’라는 이름은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다. 다만 세간의 이름이기에 말할 뿐이다. … 반야바라밀, 보살, 보살이라는 이름 역시 이와 같다. 모든 인연의 화합으로 있다. 이것들은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고, 단지 세간의 이름으로서 말할 뿐이다. … 예를 들어 색·수·상·행·식 역시 인연들의 화합으로 존재하며,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고, 단지 세간의 이름으로서 말할 따름이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 보살, 보살이라는 글자 역시 이와 같다. 모두 인연의 화합으로 존재하며,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다. 단지 세간의 이름으로서 말한다.” 

 

인용문을 통해 ‘제법이 왜 모두 공空’한지 알 수 있다. 인연들의 화합으로 잠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다. 다만 세간의 이름으로 그렇게 말할 따름이다. 여러 인연들이 화합해 있기에 일체 법은 공상空相이다. 여러 인연들이 화합해 존재하기에 공이고, 단지 이름만 있고, 임시로 설치된 존재들이다. 임시로 설치된 존재물이기에, 꿈과 같고 영사기가 보여주는 그림[영화]과 같다. 제법의 이름 이면에 법체라든가 극미極微라든가 자성이라든가 하는 실체는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일체는 단지 이름만 있고 실체實體는 없다.”는 이 사실이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지, 인연들이 화합해 공이라고만 말할 뿐 공인 이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용수가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대지도론』과 『중론』은 그래서 중요하다. 『마하반야바라밀경』은 “인연의 화합으로 존재하기에 제법이 공하며, 단지 이름만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 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은 제법이 공한 이유를 뭐라고 설명할까? 

 

"연기이기에 공하며, 공이기에 자성이 없다"

 

“마치 건달바성처럼, 해가 뜨면 성문과 누각이 보이고, 행인들이 성문으로 출입한다. 해가 점점 높아지면 누각과 성과 행인들은 사라지고 없다. 건달바성은 눈으로 볼 수는 있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건달바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건달바성을 보지 못하다가 새벽에 동쪽으로 향하면 건달바성을 보게 된다. 그러면 생각하기를 저 성은 정말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해 그곳으로 질주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건달바성이 없어진다. 해가 높이 뜨면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배는 한층 더 고프고, 갈증에 목은 더욱 탄다. … 지혜가 없는 사람도 이와 같다. 공空한 5온·12처·18계에서 나[我]와 제법諸法을 본다. … 만약 지혜로 무아를 깨닫고 실체가 없음을 안다면, 이때 (신기루 같은 건달바성 보고 그곳에서 물을 마시겠다는) 잘못된 희망도 사라진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거울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거울의 면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거울을 잡고 있는 사람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 제법도 이와 같다.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다른 무엇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자기와 다른 그 무엇이 함께 만드는 것도 아니고, 원인 없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참다운 공空은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지만 중생들의 눈을 속이고 미혹시킨다. 일체제법이 이와 같이 실체가 없다.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지만 중생들의 눈을 속이고 미혹시킨다. … 제법은 인연에서 생기기에 자성이 없다[무자성無自性]. 마치 거울 속의 모습처럼.” (강조는 필자)

 

“여러 가지 원인들에 의해 나타난 사물·현상을 나는 공성이라 말한다. 그것은 임시로 지은 이름이며, 그와 같은 것이 중도이다.”(『중론·관사제품』 제18게송)

 

“원인들에 의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현상은 공 아닌 것이 없다.”(『중론·관사제품』 제19게송)

 

인용문에서 보듯이 제법이 공한 것은 연기 때문이다. 조건들에 의해 생겼기에 일체의 사물과 현상은 공하며, 실체를 가진 자성이 없다. 설일체유부가 건립한 자성·법체의 허상虛像은 여기서 완전히 깨져버렸다. 용수보살이 “연기이기에 공하며, 공이기에 자성이 없다.”는 무기로 제법에 자성·타성이 있다는 주장을 논파하고, 나아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실유實有와 ‘아무 것도 없다’는 진공眞空마저 깨트리고 나자, 비로소 일체법이 제대로 성립하게 됐다. 용수보살의 논리적 공격을 받은 설일체유부의 교세는 점점 약해졌다. 설일체유부와 여기서 분파된 경량부의 영향을 받은 한 무리의 학승들이 그 공간을 비집고 성공性空에 토대를 둔 새로운 유종有宗, 즉 유식학파를 5∼6세기경 건립한다. 유물론적 경향을 가진 부파불교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고, 유심론적인 대승불교가 주류가 된 것이다. 『반야경』과 중관학파의 출현은 불교사상사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그들은 불교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으며, 주관과 객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철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중관학파의 관점과 불교해석은 구마라집의 역경과 승조의 『조론』을 통해 동아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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