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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와 조론]
승조와 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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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18 년 7 월 [통권 제6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4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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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전쟁의 개막

승조(僧肇. 384∼414)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된다. 한 사람의 사상은 앞 시대의 유산과 동 시대의 역사적·문화적·사상적·정치적 영향 속에서 잉태·성숙되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분열과 전쟁의 시대였던 십육국 시대의 한 단락에 해당된다. 흉노(凶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다섯 민족이 번갈아 십육국을 세웠다는 십육국시대(304∼439)는 산서성에 거주하던 흉노족 맹주 유연(劉淵. ?∼304∼310)이 이석(離石) 지금의 산서성 이석(離石)에서 자립해 한왕(漢王)이라 칭한 서진(西晉. 265∼316) 건무(建武) 원년(304)으로부터 북위(386∼534) 세조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 408∼423∼452)가 화북지방을 통일한 439년까지의 약 135년 동안을 가리킨다.

 

사실 이들 ‘다섯 민족’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오호(五胡)’라는 말이 없었다. 이 말은 4세기 중반 무렵 등장해 6세기 전반 즈음에 용법이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십육’이라는 숫자 역시 정확한 것이 아니다. 북위 말의 역사가 최홍(崔鴻. ?∼525)이 자신의 저서 『십육국춘추』에서 사용해 고착화 된 숫자일 뿐, 실은 더 많은 나라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오랑캐’[胡]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사용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한족(漢族)과 55개의 소수민족 즉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중화민족, 단결된 중화민족”를 강조하다 보니 중국정부가 오랑캐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아무튼, 구심력 보다 원심력이 아주 강하게 작용했던 이 시대의 중심 무대는 장안(長安. 섬서성 서안) 일대의 관중(關中)지방과 업(하북성 임장현)·중산(中山. 하북성 定縣부근)·양국(襄國. 하북성 邢台市)을 중심으로 한 관동(關東)지방 등 두 곳이었다. 두 곳에서 다섯 민족의 영웅·호걸들이 변화무쌍한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일어나 화북지방의 패권을 다투었다. 흉노족 유(劉)씨의 한(漢. 304∼318)·전조(前趙. 318∼329), 흉노계인 갈족 석(石)씨의 후조(後趙. 319∼351), 선비족 모용(慕容)씨의 전연(前燕. 337∼370)·후연(後燕. 384∼407)·서연(西燕. 384∼394)·남연(南燕. 398∼410), 선비족 탁발(拓跋)씨의 대국(代國. 315∼376), 선비족 걸복(乞伏)씨의 서진(西秦. 385∼431), 티벳계 저족 부(苻)씨의 전진(前秦. 350∼394), 강족 요(姚)씨의 후진(後秦. 384∼417) 등 이름도 다 기억하기 힘든 많은 나라들이 관중·관동 지방을 중심으로 명멸했다. 이들 가운데 불교와 관련해 기억할 필요가 있는 국가는 갈족 석(石)씨의 후조(後趙. 319∼351), 티벳계 저족 부(苻)씨의 전진(前秦. 350∼394), 강족 요(姚)씨의 후진(後秦. 384∼417), 흉노족 저거(沮渠)씨의 북량(北凉. 401∼439) 등 네 나라다.

 

정치적 부패가 불러온 민란

 

주지하다시피 분열과 혼란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근원을 좇아가면 후한(25∼220) 말의 정치적 부패와 여기서 파생된 민란(民亂)에 연결 된다. 그 위에 여러 원인들이 더덕더덕 붙어 삼국시대(220∼280)부터 589년에 이뤄진 수의 통일 이전까지 약 369년간의 분열을 불러 왔다.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인 서기 184년, 거록(鉅鹿. 하북성 邢台) 땅의 장각(張角)이 부적과 주문으로 10년간 병을 치료하며 모은 무리들을 이끌고 감연히 봉기했다. 자신들을 정부군과 구별하기 위해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둘렀기에 이들을 황건적(黃巾賊)이라 부른다. 민란을 평정하는 과정에 시대의 영웅들이 속속 등장했다. 원소, 조조, 유비, 손견(孫堅) 등이 그들이다. 난이 평정된 뒤, 영제에 이어 14살의 황자 변(弁)이 즉위하자 하태후와 오빠 하진(何進)이 정무를 보살폈다. 우유부단한 하진을 십상시(十常侍) 등 환관들이 궁중에서 암살하자, 격분한 원소 등이 궁중에 들어가 2천여 명의 환관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때가 서기 189년. 하진의 부름을 받고 때마침 낙양에 도착한 동탁(董卓)이 환관과 대장군이 빠진 그 틈을 낚아채 권력을 장악하고 휘둘렀다.

 

한나라 조정(朝廷)이 동요하고 불안하자 군웅들이 각 지역을 나눠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전쟁과 소용돌이 끝에, 하북성 기주(冀州)에 웅거한 원소의 10만 대군과 산동성 연주(兖州)와 하남성 허창(許昌)을 기반으로 한 조조의 2만 군대가 화북지방의 패권을 놓고 200년 하남성 관도(官渡)에서 맞붙었다. 패퇴한 원소와 그 후계자들을 몰아친 조조는 204년 원소의 근거지 업성(鄴城. 하북성 임장현)을 장악하고, 207년엔 요동 유역까지 정복해 화북지방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건안(建安) 13년(208) 유비·손권 연합군이 지금의 호북성 가어현(嘉魚懸) 부근의 적벽(赤壁)에서 조조 군을 격파하자, 후한은 결국 위·촉·오로 갈라진다. 세 나라 지도자들은 앞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뒤로는 흑심·뻔뻔함·권모술수를 무기(武器)삼아, 축록(逐鹿. 사슴몰이 → 황제 자리 차지하기)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서기 220년 “잘 다스려진 시대에는 간사한 도적,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라는 인물평을 받았던 조조가 병으로 죽자, 아들 조비(曺丕. 187∼220∼226)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 유협(劉協. 181∼189∼220. 234년死)을 핍박해 같은 해 음력 12월29일 황제 자리에 올랐다. 조위(曺魏. 220∼265)의 출발이다. 찬탈이나 다름없지만 요순(堯舜)의 고사를 본 떠 표면을 아름답게 살짝 바꾸었기에 선양(禪讓)이라 부른다. “왕위 양보”라는 의미의 선양은 전한 말의 왕망(王莽. 기원전45∼기원후8∼23)이 시작했지만, 정형화된 것은 조비 때부터였다. 이후 선양은 7백 수 십 년 동안 왕조교체에 필요불가결한 형식으로 준수되었다. 960년 송(宋. 960∼1279) 태조 조광윤이 7세에 즉위한 후주(後周. 951∼960)의 마지막 왕 공제(恭帝)의 양보로 제위에 오른 것을 끝으로 선양은 중국 역사에서 사라진다.

 

한편, 서기 234년 음력8월23일 촉의 승상 제갈량(181∼234)이 한중(漢中)의 오장원에서 병사하고, 249년 위나라 장수 사마의(179∼251)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뒤 그의 아들 사마사(209∼255)·사마소(211∼265)가 연이어 입지를 강화하자 삼국의 정치 판도는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인 263년 촉이 망하고, 265년 서진(西晉. 265∼316)이 위를 대체했다. 마침내 280년 서진이 오를 평정하자 삼국은 다시금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통합은 분열의 새로운 서막에 불과했다.

 

무제 사마염(司馬炎. 236∼265∼290)이 병으로 죽고 적자(嫡子)인 혜제 사마충(司馬衷. 259∼290∼306)이 즉위한 뒤인 원강(元康) 원년(291), 대신 가충(賈充. 217∼282)의 딸이자 “역사상 가장 못생긴 황후”로 유명한 황후 가남풍(賈南豊)이, 당시의 권력자 양준을 척살하고 권력을 잡았다. 여기서 촉발된 권력투쟁은 광희(光熙) 원년(306) 동해왕 사마월(司馬越. ?∼311)이 하간왕 사마옹(司馬顒)을 죽이고 그해 즉위한 회제 사마치(司馬熾. 284∼306∼313)의 보정(補政)이 되어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단 끝난다. 사마(司馬)씨 여덟 왕들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소위 ‘팔왕의 난’(291∼306)이라 부른다.

 

'팔왕의 난'과 여러 국가의 등장

 

여덟 왕이 목숨을 걸고 한발 짝도 물러설 수 없는 극한적인 대립을 벌였기에, 각 진영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으려 노력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싸움과 전쟁은 힘 즉 군사력을 필요로 한다. 군사력의 기초는 병졸이다. 당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병력 자원이 가장 많은 곳은 흉노(凶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다섯 민족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흉노족 -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부른다 - 이 가장 많았다.

 

진(秦)나라부터 한나라 무제 유철(劉徹. 기원전 156∼기원전 141∼기원전 87) 이전까지 중국 변방의 역사는 흉노와의 대결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무제 때 곽거병 등의 공격에 결정적 타격을 받은 흉노는 후한 시대 접어들어 남·북 흉노로 분열된다. 남흉노는 친한파(親漢派), 북흉노는 반한파(反漢派)였다. 내부 알력의 결과 남흉노는 후한에 항복했다.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 유수(劉秀. 기원전 6∼기원후 25∼57)는 이들을 산서성 북쪽 병주(幷州)에 살도록 했다. 후한 조정은 이들에게 변경방위의 의무를 맡기고, 사흉노중랑장(使凶奴中郞將)을 파견해 그들을 감독·감시했다. 그러던 서기 89년 후한과 남흉노가 연합해 북흉노를 공격했고, 패퇴한 북흉노는 서방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유럽 민족이동의 원인이 된 훈족의 선조라고 학자들은 주장하기도 한다.

 

흉노가 괴멸되자 흉노와 연계되어 있었던 강(羌)족도 자연스레 하나 둘 정복돼 관중지방(섬서성 일대. 중심지는 서안)에 강제로 이주됐다. 저(氐)족의 상황도 비슷했다. 감숙성 일대에 머물던 저·강족들은 당시 조정의 이주정책에 점차 관중으로 들어왔다. 관중 인구 100만 가운데 절반이 융적(戎賊)이라고 할 정도로 그 수가 점차 늘어났다.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된 소수민족의 사회적 위치는 열악했다. 노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후한·위나라·서진 등 한족(漢族) 정부가 강성할 땐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집권세력의 권력투쟁이 격화돼 소수민족들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서서히 변했다.

 

팔왕의 난은 이런 변화의 불[火]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성도왕 사마영(司馬潁. 279∼306)의 근거지는 하북성 임장현 즉 업성(鄴城) 부근이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흉노 부락이 있었다. 사마영은 흉노의 힘을 빌리기 위해 좌현왕(左賢王)이라 칭하는 흉노족 유연(劉淵. ?∼304∼310)을 장군으로 임명한 후 업성에 억류하고는 흉노 병사를 징발하는 임무를 맡겼다. 우여곡절 끝에 업을 탈출해 304년 음력8월 산서성의 흉노 부락으로 돌아온 유연은 자립할 뜻을 굳혔다. 대선우가 된 그는 304년 음력10월 산서성 이석(離石)에서 독립국 한(漢)을 세웠다. 한(漢)국 성립은 저족(氐族) 이씨가 사천성 성도에서 성국(成國. 304∼347)을 세운 것과 더불어 십육국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팔왕의 난이 진행됨에 따라 유연을 따르는 무리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유연은 309년 포자(浦子. 산서성 濕縣)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309년 음력1월 산서성 평양(平陽)으로 천도했으나 310년 음력7월 그곳에서 병사했다.

 

유연의 건국을 시작으로 소수민족 자립의 분위기는 날로 고양되어 갔다. 서진 회제 사마치(司馬熾. 284∼306∼313)가 즉위할 무렵 유연을 중심으로 한 흉노 세력은 더 커졌다. 게다가 요서 지방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우문씨(宇文氏)·단씨(段氏) 등도 자립할 뜻을 품고 있었다. 유연에 이어 아들 유총(劉聰. ?∼310∼318)이 즉위했다. 그는 유요(劉曜. ?∼318∼329)와 흉노계인 갈족 석륵(石勒. 274∼319∼333)에게 서진을 더욱 거세게 공격하도록 명했다. 동해왕 사마월은 이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간신히 사방에서 4만여 명을 긁어모아 허창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마월이 멋대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에 화가 난 회제는 그를 토벌하라는 밀조를 내렸다. 이를 들은 사마월은 흥분한 나머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져 죽었다. 죽기 전 청담(淸談)을 논하던 당대의 명사(名士) 태위 왕연(王衍. 256∼311)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공리공론을 즐기던 왕연은 서진 왕조를 지킬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만 찾았다. 동해왕 사마월이 죽자 그의 시체를 귀장(歸葬)시킨다는 명목으로 황제를 남겨둔 채 귀족 등 10만 여명을 이끌고 수도 낙양을 떠났다. 소식을 들은 석륵이 이들을 급습해 큰 힘 들이지 않고 승리했다. 왕연 등 서진 종실 48명을 모두 사로잡았다. 311년 음력4월에 벌어진 일이다.

 

한 달 뒤인 서기 311년 음력5월, 유요는 낙양을 함락시켰다. 영가(永嘉) 6년(312) 포로가 된 회제와 황후 양씨는 평양으로 압송됐고, 낙양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 영가(307∼313) 연간에 벌어진 이 사건을 “영가의 난(亂)”이라 부른다. 평양으로 압송된 회제는 313년 정월 베풀어진 연회에서 흉노 황제에게 술을 따라야만 했다. 이런저런 치욕을 당하다 결국 그 해 2월1일 회제는 살해됐다. 낙양에서 간신히 장안으로 도망친 사마업(司馬鄴)이 313년 음력4월27일 장안에서 즉위했다.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 300∼313∼317)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 유요의 군대가 들이 닥쳤다. 316년 11월11일 민제는 결국 항복했다. 18일 민제는 유총 앞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온갖 치욕을 겪던 민제 역시 317년 12월20일 18세의 나이로 살해되었다. 흉노족들은 그동안 한족에게 당했던 설움을 이런 식으로 되갚았다.

 

흉노계 국가의 소멸

 

이런저런 상황이 전개되던 318년 유연이 세운 한(漢)국에 변란이 일어났다. 동요 끝에 한국은 분열됐다. 그해 10월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국호도 조(趙)로 고쳤다. 석륵 역시 319년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독립해 조(趙)를 세웠다. 전자를 전조(318∼329), 후자를 후조(319∼351)라 불러 구별한다. 두 영웅이 대립하던 와중에 328년 석륵이 유요를 패사(敗死)시키고, 328년 전조를 무너뜨렸다. 석륵에 이어 등극한 석홍(石弘. 314∼333∼335)을 제압한 석호(石虎. 295∼334∼349)는 스스로를 천왕이라 칭했다. 그러나 빠르게 쇠망의 조짐이 나타났다. 349년 석호가 병사한 뒤 내분이 일어나 서로 싸우다 351년 후조는 망하고 말았다. 감숙성 일대의 하서 회랑 지역에 흉노족 저거(沮渠)씨가 세운 북량(北凉. 401∼439)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중원의 흉노계 국가들은 내분으로 4세기 중엽 스스로 소멸되고 말았다.

 


부견왕을 도와 전진을 강국으로 만든 재상 왕맹. <맨 얼굴의 중국사2>(서울: 도서출판 창해(2005), p.371에서 전재)

 

노예적 상태에서 탈출해 국가를 건립하며 승승장구하던 흉노족이 불과 반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한 까닭은 무엇일까? 종족의 종실·왕족들이 군사권을 나눠 갖는 ‘종실적(宗室的) 군사봉건제(軍事封建制)’가 흉노족 멸망의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있을 때 이 제도는 힘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격렬한 내분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한(漢)·전조·후조의 분열과 쇠망을 보면 하나같이 종족 내부의 분란이 주요한 원인 이었다. 한(漢)의 경우 황제 유화(형)와 대선우 유총(동생) 형제간의 갈등, 유총의 아들 유찬과 유총의 아우 대선우 유예 사이의 다툼; 후조의 경우 황태자 석홍과 실력자 석호 간의 갈등 역시 종실적 군사봉건제 때문에 생긴 구조적 갈등이었다. 실력과 능력 보다는 ‘종족적 혈연주의’에 기초를 둔 이런 구조 아래에선 황제 권력이 불안정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다른 원인은 ‘종족중심주의’(宗族中心主義)다. 흉노족들이 나라를 세웠어도 인구의 대다수는 한족(漢族)일 수밖에 없다. 흉노족 등은 소수인데다 게다가 여러 소수민족들로 나눠졌기에, 그들의 통치기반이 탄탄해지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중국화를 지향하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어설픈 한화정책은 종족간의 분열을 불러오고, 분열은 곧바로 종실 실력자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으로 연결된다. 자연히 국력을 한 곳에 모을 여력이 없어진다. 그 틈을 노리고 다른 민족이 치고 들어오면 나라는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설익은 한화정책도 문제지만, 흉노족 등이 세운 국가들은 대개 한화정책에 소극적이었다. 한화정책은 지배세력이 장악할 수 있는 권한과 이권의 일부를 한족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공적인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들의 대체적인 속성. 특히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민족이 나라를 세우면 권력과 이권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보통이다.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영광을 함께 하기는 힘든 법. 통치 경험이 거의 없고 문화적 소양이 그렇게 높지 않은 흉노족 등 소수민족들이 먼 앞날을 내다보고 다른 민족에게 권력과 이권을 나눠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특히 하루아침에 귀족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왕이 되는 분열과 전쟁의 시대에,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멀리 내다보며 ‘종족중심주의’를 극복하자고 소리칠 사람의 숫자는 매우 적을 것이다. 십육국 시대의 여러 나라들이 단명했던 주된 이유는 ‘종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과 ‘갈등의 소지가 있는 군사제도’ 이 두 가지 때문 이었다고 판단된다. 물론 종족중심주의 혹은 ‘자기민족 중심주의’를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것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흥기하는 저족 부견의 전진

 

불에 타 버린 바로 그곳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하나가 일어서는 것은 세상의 이치. 후조의 멸망이 그러했다. 흉노계 국가가 사라진 그 터전에 저족과 강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고자 적극적으로 힘을 모았다. 한창 기세를 올릴 당시의 후조는 섬서성을 정복한 뒤 그곳에 있던 저족과 강족을 하남성 북부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349년 후조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이들이 일제히 서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족은 추장인 부홍(苻洪. 285∼350∼350), 강족은 요익중(姚弋仲. 280∼352) 휘하로 모여들어 관중으로 물밀듯이 향했다. 갑작스레 사망한 부홍을 대신해 그의 아들 부건(苻建. 317∼350∼355)이 장안에 들어가 351년 천왕 대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진(大秦)이라 칭하고 다음 해 황제에 등극했다. 관중 지방을 장악한 그가 355년 죽고 그의 셋째 아들 부생(苻生. 334∼355∼357)이 뒤를 이었다. 그는 상상이상의 폭군이었다. 357년 신변의 위협을 느낀 부건의 조카 부견(苻堅. 338∼357∼385)이 정변을 일으켜 부생을 제거하고 천왕에 올라, 전진(前秦. 350∼394)의 국정을 일신했다.

 

부견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해준 바로 그 황제이다. 고려시대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권18에 전하는 기록이다.

 

“(고구려)소수림왕 2년(372) 여름 6월, 진왕 부견이 사신을 파견해 부도와 순도스님, 불상과 경전도 보내왔다.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로 감사를 전했다. … 4년(374) 아도스님이 (고구려에) 왔다. 5년(375)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라는 사찰을 세워 순도스님을 머무르게 했다. 다시 이불란사를 건립해 아도스님을 모셨다.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작이다.” 

 

부견은 또한 십육국의 여러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명군(名君)으로 평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진서(晉書)』권113 「재기(載記)제13 부견(苻堅) 상(上)」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영가(永嘉)의 난 이래 학교를 볼 수 없었다. 부견이 즉위한(及堅之僭) 이후 유학을 매우 중시했다. 왕맹은 풍속을 정돈하고, 정무를 깨끗하게 살폈으며, 학교가 차차 일어났다. 관롱(關隴. 섬서성 일대) 지역은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며, 백성들은 즐거이 생업에 힘쓰게 됐다. 장안에서 여러 지방에 이르기까지 도로 양쪽에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고, 이십 리에 정자를 하나씩, 사십 리에 역참을 하나씩 설치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정자에서 쉬고 물자를 공급받았으며,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길에서 자유롭게 거래했다. 백성들이 찬탄의 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장안의 큰 길에 버드나무와 회화나무를 심었도다! 밑에는 붉은 수레가 달려가고, 위에는 봉황들이 살도다. 영웅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백성들을 인도해 주시네!’”

 

부견이 제위(帝位)에 오른 것에 대해 “분수 넘는 행동을 한다.”는 의미가 담긴 한자 ‘참’(僭)자를 쓴 점에서 다른 민족에 대한 한족 역사가의 편견을 확인 할 수 있지만, 한족이 편찬한 역사서에 다른 민족 출신의 황제를 이렇게 높이 평가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부견이 안으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 화북지방을 통일해 양자강 이북에 만연했던 전란을 잠재운 공을 높이 평가한 탓이리라. “영웅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백성들을 인도해 주시네!”라는 구절 역시 부견의 덕화(德化)를 보여 준다. 영웅은 부견과 그의 군대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견의 성공과 화려함 뒤에는 한족 재상 왕맹(王猛. 325∼375)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분열의 시대에 부견을 도와 전진을 강국으로 만든 그는 중국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어떤 학자는 그를 관중(管仲)·공손앙(公孫鞅)·제갈량(諸葛亮)·왕안석(王安石)·장거정(張居正)과 같은 반열의 재상으로 평가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시절을 보낸 왕맹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총명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병법서를 탐독하며 부지런히 실력을 키웠다. 전진 정부에 발탁된 뒤 부견을 도와 저족(氐族)의 족벌과 종실의 권한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했으며, 현명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널리 발탁했다. 농업과 양잠도 발전시켜 백성들을 편안케 했다. 부견이 화북지방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정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종 직전의 그가 부견에게 남긴 말은 동진 정벌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부견은 남진정책을 실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는 것이 바로 역사이기도 하다. 한족 이외 다른 민족도 성군(聖君)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 입증한 부견이었지만 역사의 이런 법칙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화북지방을 통일할 때 가는 곳 마다 큰 승리를 거뒀던 그 기억이, 바로 그 승리감이 부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와 관련해 기억할 가치가 있는 평론이 있다. 송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1084년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권제106 진기(晉紀)28에 있는 부견의 멸망에 대한 사마광의 평가가 그것이다.

 

“신 사마광 아룁니다: 역사를 평가하는 논평자들은 선비족 모용수와 강족 요장을 죽이지 않아 전진의 부견왕이 망했다고들 합니다. 신은 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 허소(150∼195)가 위무제 조조에 대해 ‘잘 다스려진 시대에는 간사한 도적,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부견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면, 모용수와 요장은 모두 진국의 유능한 신하가 됐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어찌 감히 나라를 어지럽혔겠습니까? 부견이 망한 이유는 신속하게 승리를 쟁취해 오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옛날 위문제 조비가 이극에게 오나라가 망한 원인을 물었습니다. 이극이 대답했습니다. ‘자주 전쟁을 일으키고 자주 승리하는 것이 멸망의 길입니다.’ 위문제가 말했습니다. ‘자주 전쟁을 일으키고 자주 승리 하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닌가? 왜 망국의 이유가 되는가?’ 이극이 말하기를 ‘자주 전쟁을 일으키면 백성들이 피폐해지고, 자주 승리하면 임금은 교만해집니다. 교만한 군주가 피폐한 백성들을 다스리면 망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진왕 부견의 경우가 이와 비슷합니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견은 결국 동진(東晉. 317∼420)을 병합해 천하를 통일하려는 결심을 확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강남 정벌을 준비하던 379년 전진(前秦)의 10만 대군이 양양을 공략하고 68세의 명승이자 고승인 도안 스님(道安. 312∼385)을 장안으로 초치(招置)했다. 그 때부터 도안은 부견에게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도안조차 동진 정벌을 만류했다. 지극히 도안을 존중한 부견이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동진 정벌을 반대하는 도안의 권고만은 듣지 않았다.

 

명승 도안의 권고

 

부견이 도안을 얼마만큼 존중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진서(晉書)』권114 「재기(載記)제14 부견(苻堅) 하(下)」에 실려 있다.

 

“동쪽 정원에 놀러갈 때, (부견이) 도안을 마차에 태우도록 했다. 그러자 신하 권익(權翼)이 간언했다. ‘천자의 어가(御駕)에 시중(대신)이 탈 수 있고, 길을 갈 때엔 도로의 사람들을 흩어지게 한 후 가며, 나아감과 물러섬에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신은 들었습니다. 고대 삼대(하·은·주)의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들은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들을 지키지 않고, 일시적인 감정을 만족시킨 자들입니다. 그래서 나쁜 행동이 사서에 기록돼 후세의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반면 반희는 어가에 타지 않아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도안은 머리를 깎고 출가자의 옷을 입은 자입니다. 감히 어가에 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견이 얼굴색을 바꾸고 말했다. ‘도안 스님의 정신은 최고의 신묘한 경지에 도달했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의 덕행을 존경한다. 짐이 천하를 중시하는 것보다 더 도안 스님을 무겁게 여긴다. 마차를 타는 것은 도안 스님에겐 영광이 아니다. 오히려 (도안 스님을 태움으로써) 짐의 덕행이 드러나게 된다.’”

 

부견이 이처럼 존중했던 도안도 동진 정벌을 반대했다. 『진서(晉書)』권114 「재기(載記)제14 부견(苻堅) 하(下)」에 관련 문답이 있다.

 

“(부견이) 권익에게 도안을 부축해 마차에 오르게 하도록 시켰다. 부견이 고개를 도안 스님 쪽으로 돌려 말했다: ‘짐은 스님과 더불어 강남의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거닐 생각이오. 여섯 군대를 정돈해 천하를 순시할 생각이오. 의령(지명)에서 우릉을 참배하고, 회계에 도착해 대우가 머물렀던 곳을 우러러 보고 싶소. 장강에 배를 띄워 곧바로 바다에 이르고 싶은데, 이것이 어찌 즐겁지 않겠소!’ 도안스님이 말했다: ‘폐하! 마땅히 하늘에 응해 세상을 다스리고, 관중에 머무르며 사방을 통제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편안히 하면서 시절 인연의 운수를 얻어, 성스러운 예법을 통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움직인즉 왕이 타는 수레의 방울을 울려 도로를 깨끗이 하고, 멈춘즉 함이 없음으로 깨끗이 하며, 양손을 공손히 하고 단정히 앉은 채 큰 가르침을 널리 편다면, 그 융성함은 가히 요임금 순임금과 서로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굳이 신체를 움직이고 말을 달려 몸을 피로하게 하고, 입과 혀로 음모를 꾸며 기진맥진하고자 하며, 바람을 맞고 먼지를 마시며 들판에 머무르고자 하십니까? 게다가 동남쪽은 땅의 형세가 낮아 전염병의 기운이 가득해 우순이 가서 돌아올 수 없었고, 대우 역시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말을 타고 어가를 몰아 힘들게 할 가치가 있습니까? 백성들을 피폐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시경』에 ‘중원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 사방의 모든 사람을 어루만진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처럼 만약 인의예지의 가르침으로 먼 지방의 사람들을 품는다면, 작은 병사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모든 곳의 사람들을 귀순해오게 할 수 있습니다.’”

 


전성기 시절의 전진. <맨얼굴의 중국사2>(서울:도서출판 창해, 2005) p.374에서 전재

 

그러나 도안의 충심어린 충고 역시 부견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부견은 끝내 전쟁을 감행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383년 음력8월 안휘성 비수(淝水) 부근에서 벌어진 동진과의 전투에서 부견의 90만 대군은 마치 썩은 짚단이 무너지듯 넘어 졌다. 패배의 여파로 비수대전이 끝난 지 2년만인 385년 음력7월 부견은 부하였던 강족(羌族) 요장(姚萇)에게 사로잡혀, 신평(新平. 섬서성 彬縣)에 위치한 석불사(石佛寺)로 압송됐다. 8월 요장은 부견에게 사람을 보내 옥새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부견은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요장은 석불사에서 부견의 목을 매달아 죽여 버렸다. 권모술수와 배신이 넘쳐 났던 분열과 전란의 시대, 한 때의 주군을 죽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장이 죽을 운명에 처했을 때 부견이 구해준 것을 아는 요장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영웅의 비극적 결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인의와 신의로 적들을 감화시키고자 노력했던 명군 부견은 가슴에 회한(悔恨)만 가득 품은 채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 그가 사라지자 화북지방은 다시금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하 통일에 대한 부견의 꿈과 저족(氐族)의 희망도 흙먼지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부홍(苻洪. 285∼350∼350)이 350년 장안에 건립한 전진이라는 나라는 후세 사람들에게 숱한 아쉬움을 남기며 394년 역사의 전면에서 허무하게 물러나고 요장의 후진(後秦. 384∼417)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후진은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 366∼394∼416)이 즉위한 뒤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부견처럼 요흥 역시 불교를 진흥시켰다.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과 승조(僧肇. 384∼414)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시기도 바로 이 때다. 그러나 후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요흥이 죽은 후 내부분열이 일어나 숨만 헐떡이는 환자로 변했다. 동진의 거기장군 유유(劉裕. 363∼420∼422)가 그 틈을 비집고 장안에 치고 들어와 후진을 멸망시켰다. 유유가 겨우 주둔군만 남겨놓고 남경으로 돌아가 버리자, 북쪽에서 장안을 노리고 있던 흉노와 선비의 혼혈족 출신인 혁련발발(赫連勃勃. 381∼407∼425)이 남하하여 동진의 주둔군을 몰아내고 장안을 점령했다.

 


전진이 멸망한 후의 지도. <맨얼굴의 중국사2>(서울:도서출판 창해, 2005) p.389에서 전재

 

북위의 화북지방 통일

 

한편, 비수대전 후 하북으로 돌아간 모용수(慕容垂. 326∼384∼396)는 384년 중산(中山. 하북성 定縣)을 근거로 독립해 후연(後燕. 384∼407)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전연(前燕. 337∼370)의 후손인 모용씨들이 잇따라 서연(西燕. 384∼394), 남연(南燕. 398∼410), 북연(北燕. 407∼436)을 세웠다. 이 가운데 북연은 후일 한인인 풍발(馮跋. ?∼409∼430)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이들 나라의 명운도 길지는 못했다.

 

그 즈음 전진의 부견에게 376년 멸망당한 대국(代國)의 왕 탁발십익건(拓跋什翼健. 318∼338∼376)의 손자 탁발규(拓跋圭. 371∼386∼409)가 386년 대동(大同)과 호화호특(呼和浩特)의 중간에 있는 우천(牛川)에서 대왕(代王)으로 추대되었다. 얼마 뒤 국호를 위(魏)-북위(北魏. 386∼534)가 이것이다-로 고쳤다. 당시 힘이 약했던 북위는 후연에 복속되었으나, 세력을 키워 396∼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접수하는 등 황하 이북의 화북평원 대부분을 정복했다. 398년 탁발규는 수도를 평성(산서성 大同)으로 옮기고 황제에 올랐다. 이가 바로 북위 태조 도무제(道武帝)다. 도무제에 이어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명원제(明元帝. 392∼409∼423)는 착실히 국력을 키웠다. 탁발도가 태무제(太武帝. 408∼423∼452)로 제위를 계승하면서 북위는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속시켜 나갔다. 하(夏. 407∼431), 북연(北燕. 407∼436), 북량(北凉. 401∼439) 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439년 화북을 완전히 통일해 십육귝 시대를 종결지었다.

 

북위가 십육국 시대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화북지방을 제패하고 비교적 긴 시간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성 밖에 같은 유목민족 집단이 있어 끊임없이 인원과 말 등을 보급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소수였던 흉노족·저족·강족과 달리 동족의 인구가 많아 병졸로 충당할 수 있는 가용자원이 그만큼 풍부했다. 물론 태조 도무제 이래 북위의 선대 지도자들이 ‘부락제’를 해체하고, ‘세습 부락장 제도’를 폐지하는 등의 체제 개혁을 단행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습 부락장 제도’가 해체됨으로써 부족의 우두머리가 군권을 장악하는 ‘종실적 군사봉건제’가 더 이상 발붙이기 힘들어졌고, 흉노족·저족·강족 등이 겪어야 했던 격렬한 내부분열의 원인 또한 사라졌다.

 


구름과 학이 새겨진 거울.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런 노력의 결과 북위는 상대적으로 긴 역사를 후대에 남길 수 있게 됐다. 어릴 때 “기주의 신동”(冀州神童)으로 불렸던 최굉(崔宏. ?∼418) 같은 유능한 한인 관료들의 보좌도 북위의 화북 제패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부견의 옆에 왕맹이 있었던 것처럼 최굉 같은 한인 사대부들이 도무제 곁을 지켰다. 이들이 북위의 관제·예악·제도 등을 정비해 내정(內政)을 다졌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서기 439년 태무제가 135년간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마침내 화북지방을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 이름 , 기 간,  개국 군주,  민족,  수도,  멸망국.

한(漢)·전조(前趙), 304∼329, 유연(劉淵), 흉노, 평양(산서성 임분), 후조.
성(成), 304∼347, 이웅(李雄), 저족, 성도(사천성 성도), 동진.
전량(前凉), 314∼376, 장식(張寔), 한족, 고장(감숙성 무위), 전진.
후조(後趙), 319∼351, 석륵(石勒), 갈족, 양국(하북성 형대), 염위.
염위(冉魏), 350∼352, 염민(冉閔), 한족, 업성(하북성 임장), 전연.
전연(前燕), 337∼370, 모용황(慕容皝), 선비, 업성(하북성 임장), 전진.
전진(前秦), 350∼394, 부홍(苻洪), 저족, 장안(섬서성 서안), 서진.
후진(後秦), 384∼417, 요장(姚萇), 강족, 장안(섬서성 서안), 동진.
후연(後燕), 384∼407, 모용수(慕容垂), 선비, 중산(하북성 정현), 북연.
서연(西燕), 384∼394, 모용홍(慕容泓), 선비, 장자(산서성 장자), 후연.
서진(西秦), 385∼431, 걸복국인(乞伏國仁), 선비, 금성(감숙성 난주), 하.
후량(後凉), 386∼403, 여광(呂光), 저족, 고장(감숙성 무위), 후진.
남량(南凉), 397∼414, 독발오고(禿發烏孤), 선비, 악도(청해성 악도), 서진.
남연(南燕), 398∼410, 모용덕(慕容德), 선비, 광고(산동성 청주), 동진.
서량(西凉), 400∼421, 이고(李暠), 한족, 돈황(감숙성 돈황), 북량.
하(夏), 407∼431, 혁련발발(赫連勃勃), 흉노, 통만(섬서성 정변), 토욕혼.
북연(北燕), 407∼436, 고운(高雲)→ 풍발(馮跋), 고구려 → 한족, 화룡(요녕성 조양), 북위.
북량(北凉), 401∼439, 저거몽손(沮渠蒙遜), 흉노, 장액(감숙성 장액), 북위.

 

* 십육국 시대에 명멸했던 국가들 도표를 만드는 과정에 다음의 책들을 참조했다. 『중국역사대사전-위진남북조사』, 上海:上海辭書出版社, 2000; 杜建民 編著,『중국역대제왕세계연표』, 濟南:濟魯書社, 2007; 柏楊 著·김영수 옮김, 『맨 얼굴의 중국사 2』, 서울:도서출판 창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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