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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음미하는 부처님 말씀]
'별일 없음의 일'을 간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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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2019 년 2 월 [통권 제70호]  /     /  작성일20-06-19 10:35  /   조회6,75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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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작가·자유기고가

 

“별고 없으신지요?” “별일 없지?” 

안부를 주고받을 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앞에 쓴 문장에 ‘물음표’를 붙이긴 했지만, 실제로 발화될 때의 말끝은 마침표와 물음표 사이 어디쯤일 겁니다. 진짜 ‘별고’나 ‘별일’이 궁금해서 묻는 말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너나없이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넋두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개의 입장에서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싶어 생각해 봤습니다. ‘그럼 당신이 개 하시든가.’ 개가 이렇게 말한다면, 저는 그 개와 눈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본심이 탄로 날 테니까요.

 

어떤 죽음 앞에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하고 애도할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간난신고의 삶을 이어온 사람의 저승길을 배웅할 때 터져 나오게 되는 탄식입니다. 어쩌면 그 말은 망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개 팔자를 부러워하면서 개똥밭을 구르는 일이 세상살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마음먹는 게 속이라도 편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가 죽지만 사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그놈의 ‘라면’ 때문에 굶어죽기도 힘든 세상 아닙니까.

 

다들 알듯이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사바娑婆’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sabhā’의 음사인데,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 번역합니다. 더 솔직하게는 잡회雜會·잡잡雜雜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상은 ‘참고 견뎌야 할 곳’이라는 얘깁니다.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뒤섞인 곳’이기 때문이겠지요.

 

왜, 이 세상은 ‘참고 견뎌야 할 곳’인가

 

이 세상은 참고 또 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무자비한 곳이지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까닭입니다. 굳이 부처님 말씀을 빌릴 것도 없이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봐도 이 세상은 고해苦海입니다. 업력業力이 부딪치는 곳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업(業, karma)’을 전생―현생―내생의 순환 즉 윤회와 결부시키거나, 행위의 결과로 남되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추상화 하면서 그 실체를 외면합니다. 흔히들 당장의 고달픈 현실을 한탄할 때 ‘전생에 무슨 업을 지어서…’ 하고 한숨짓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업력의 작용이겠지만, 당장의 생각과 행동을 업이라고 인식하는 데는 투철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업을 짓는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동어반복입니다. ‘업=지음’, 업이 곧 행위 자체인데, 업과 행위를 분리시킴으로써 업을 추상화시키는 것이지요.

 

 

2018년 12월 31일 새벽 3시부터 2019년 1월 1일 새벽 3시까지 해인사 백련암에서 거행된 일만배 기도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고심원에서 절을 하고 있다.

 

 

업을 일으키는 것은 욕망입니다. 사바가 고해인 까닭입니다. 온갖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이겠지요. 가치중립적으로 보자면 욕망은 세상을 굴리는 힘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 벌거벗고 세상을 활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사태입니다.

누구도 벌거벗은 욕망을 두 눈 뜨고 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꾀를 냈습니다. 욕망 없이는 살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니 그럴 듯한 옷을 입히기로 한 것이지요. 그 옷이 바로 ‘행복’입니다. 가히 환상적인 옷입니다.

 

행복이라는 옷을 걸친 욕망은 도무지 거칠 것이 없어졌습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욕망에 ‘행복’이라는 옷을 입힘으로써 ‘무한 경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고, 탐욕에 따르는 도덕적 부담감도 덜어 주었습니다. 행복 또는 행복을 느끼는 상태는 아무리 뜯어 봐도 욕망의 충족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행복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지고한 목표가 되었고 세속 종교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 종교는 어떤 종류의 헌신이나 희생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행복 추구’라는 권리만 보장할 뿐입니다. 또한 그것은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불행한 사람은 외도이거나 이단자입니다.

 

행복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세상살이는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럴수록 행복 전도사들은 ‘긍정 마인드’를 독려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신앙 간증도 꾸준히 이어집니다. ‘행복교’에 의해 숭앙되는 욕망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공기처럼 스며들었습니다. 행복 전도사들은 당장의 불행조차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행복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속삭입니다. 갈애는 더 강해지고 도처에 신기루가 출몰합니다. 행복 전도사의 말대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욕망의 충족을 행복으로 여기는 한 세상살이는, 지장보살의 안인부동安忍不動한 경지로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행복은 해탈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상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인 까닭이 업의 충돌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는 물론 장성을 해도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매순간 닥치는 경계에 ‘인욕바라밀’로 대처하더라도, 무시로 자신의 의지나 행위와 무관한 새로운 장애가 나타납니다.

삶 자체가 연기의 산물인 것입니다.

 

존재 양식으로서의 인욕

 

도道가 높아서 마魔가 성하다기보다는, 행복으로 이름을 바꾼 욕망의 무한 추구로 하여 마가 성한 세상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인욕바라밀은 수행의 방편이 아니라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존재 양식으로서 인욕의 길을 밝혀 주는 가르침으로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을 다시 읽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옳고 또 옳은 말씀으로만 알고, 도덕적 훈계만로 읽었었는데, 다시 보니 그 동안은 머리로만 읽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든든한 의지처입니다. ‘다라니陀羅尼’로 여기렵니다.

 

불자라면 수없이 보고 들었을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 명나라 초기의 어지러운 세상을 산 묘협 스님이 저술한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에 수록된 22편의 글 가운데 제17 ‘십대애행十大碍行’, 즉 ‘세상살이에 닥치게 될 장애에 걸리지 않게 할 10가지 지침’ 가운데서 요긴한 부분만 간추린 것입니다.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지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

 

2.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지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교만한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해탈하라” 하셨느니.

 

3.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지니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바가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장애속에서 소요하라” 하셨느니.

 

4.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지니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마군을 도반으로 삼으라” 하셨느니.

 

5.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지니라. 일이 쉽게 되면 마음이 가볍고 오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일의 어려움을 안락으로 여기라” 하셨느니.

 

6. 사람을 사귈 때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지니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도의를 잃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순박함을 친교의 바탕으로 삼으라” 하셨느니.

 

7. 남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지 말지니라. 남이 내 뜻에 순종하면 마음이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즐거이 거닐 뜰로 삼으라” 하셨느니.

 

8.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지니라. 의도한 바가 있으면 베풂이 아니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덕 베풀기를 헌신짝 버리듯하라” 하셨느니.

 

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지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발동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이익을 멀리 하는 것으로 부귀로 삼으라” 하셨느니.

 

10. 억울함을 당했더라도 해명하려 하지 말지니라. 해명하려 할수록 억울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나니,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행의 문으로 삼으라” 하셨느니.

무사인無事人의 경지는 꿈에도 떠올릴 형편이 아닙니다. 다만 ‘별일 없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그것인들 어찌 쉽겠습니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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