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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음미하는 부처님 말씀]
‘고귀한 축복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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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2018 년 6 월 [통권 제6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7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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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 때 어떤 천인이 깊은 밤이 지나자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따 숲을 두루 비추며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세존께 다가온 그 사람은 시로써 이와 같이 말했다.

 


 

 

(천인)
“많은 천인과 사람들, 최상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행복에 관해 생각하오니, 최상의 축복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소서.”

 

(세존)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고, 슬기로운 님을 섬기며
존경할 만한 님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많이 배우고 익히고, 절제하고 훈련하여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베풀고 정의롭게 살며, 친지를 보호하고,
비난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악을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가르침 받기에 게으르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존경과 겸손, 만족과 감사의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들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인내와 온화함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에 대해 의론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감관을 제어하여 청정하게 살고,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실현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세사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여
슬픔 없고 티끌 없이 안온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이와 같이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않고
어디서든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주: 『숫타니파타』(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원문을 인용했으며, 낱말과 구절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如是我讀 - 기복(祈福) 불교를 위한 변명

 

감히 ‘기복 불교’를 옹호하려 합니다. ‘감히’라고 말문을 연 까닭은,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병폐로 수없이 지탄 받아 온 것이 ‘기복 불교’라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기복 불교에 대한 지탄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던 때는 사회 변혁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던 민주화운동 시기였다고 봐야 할 같습니다. 불교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힐난으로써 기복 불교 비판이 드셌습니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반성적 성찰이 일었습니다. 대승을 표방하는 한국 불교로서는, “일체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들었다.”(『유마경』「문수사리문질품」)는 유마의 선언을 스스로를 향한 채찍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중불교운동이 일어났고,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떠맡았습니다. 조계종단 개혁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운동, 특히 환경 운동 분야에서는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기여함으로써 ‘기복 불교’에 대한 비판도 잦아들었습니다. 한때 조계사 마당은 첨예한 사회적 갈등의 완충 지대이기도 했습니다.

 

변죽이 길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복 불교’에 따른 사회적 부채감을 털었으니 부담 없이 ‘기복’을 하자? 설마하니 제정신으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도 지나치면 뻔뻔이겠지요. 그럼 새로 ‘발명’이라도 한 우아한 기복 같은 것이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 논의의 진전을 위해 현 정부 이전의 정부에 대해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이명박은 ‘부자 되세요’라는 마법의 주문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후 박근혜 정부의 ‘규제 완화’와 ‘창조 경제’의 불행한 파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탄식입니다. 냉정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성급하고도 패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뒷걸음질한 민주주의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정당화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시장 권력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건 아니었으니까요. 현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에서 정부의 역할이 강화된 것도 시장 권력이 절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시장으로 넘어간 어떤 권력을 되찾아왔느냐, 혹은 되찾아 올 것인가? 경제에 문외한으로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난망해 보입니다. 왜냐? 시장은 험상궂은 전제 군주의 모습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얼굴로 ‘행복’을 ‘상품화’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그것도 아주 헐값으로도 판다는 데 누가 시장에 반역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경제가 아닙니다. ‘행복’입니다.

 

행복이 넘치는 세상, 불행한 사람들

 

지금 우리 사회 ― 아니, 소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어떤 곳에서든 ― 불행한 사람은 지독히도 운이 나쁘거나 게으른 사람입니다. 도처에 행복이 넘쳐흐릅니다. 은행, 백화점, 대형 마트에서는 간곡하게 우리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고객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행복한 쇼핑 되세요!’(이런 말들이 어법에 어긋나는 점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서 씨름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프랜차이즈 빵집의 물류 차량에는 ‘맛과 행복을 배달 합니다.’하고 써 붙여 놓았더군요. (고맙기도 하셔라.) 심지어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까지 ‘행복하게 자란’ 것을 먹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아침마다 TV에서는 진시황은 구경도 못했을 100세 건강 불로초를 캐다 바칩니다. ‘긍정 심리학’으로 무장한 행복 전도사들은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페이스북과 기업이 마음만 먹고 손을 잡는다면, 실시간으로 개개인에게 ‘행복 레시피’를 전달해 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일상을 낱낱이 스캔하고 있으니까요. 실연당한 날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와인, 시험 보기 전날 먹으면 두뇌가 활성화되는 알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식이겠지요. 물론 이에 대한 반격이 없는 건 아닙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 올리버 버크먼의 『행복 중독자』, 윌리엄 데이비스 『행복산업』과 같은 책들은 긍정 심리학자와 기업, 정부가 어떻게 결탁하여 행복을 팔고, 강요하며 행복을 이데올로기화 했는지를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하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길을 택했다. 난관도 있었지만….”하고 몇 마디만 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의 마법에 걸립니다.

 

하지만 유엔이 최근에 발표한 ‘2018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156개국 가운데 우리나라는 57위였습니다. 이 정도라면 그리 행복한 것 같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급기야 ‘탕진잼’, ‘소확행’입니다.

 

자발적으로 행복 제국주의에 식민화하는 삶입니다. ‘행복’이라는, 원가에 포함되지도 않는 자원이 있는 한 시장은 권력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행복할 것인가, 하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마주해야 할 현실의 고통을 인정하고 차라리 ‘복을 비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는 부처님의 통찰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온갖 업과 욕망이 충돌하는 곳이니까요. 그럴 수밖에요. 그렇지 않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지요. 설사 경천동지할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의 목숨 부지에 따르는 고통은 감내해야 합니다. 다만 감수의 방식에서 깨달은 이와 범부의 차이는 있겠지요. 저 같은 속세의 범부는 ‘복을 비는 것’ 말고는, 달리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행복이란?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➀복된 좋은 운수 ⓶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입니다.(『표준국어대사전』) 동의할 만합니다. 내친김에 제가 가진 『조선어사전』에서 행복을 찾아 봤습니다. 『조선어사전』은 1938년에 초판이 나왔고, 문세영(1895~1952) 선생이 편집한 것인데, 최초의 우리말 사전으로 평가 받습니다.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➀다행한 운수. ⓶경사스러운 일. 좋은 일. ⓷팔자가 좋은 것. 이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행복의 실체에 더 다가간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기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복을 빎.”(『표준국어대사전』) 아주 간단합니다. ‘복을 빈다’는 것. 그 자체로 무엇이 그리 나쁠 게 있습니까.

 

최근에 제가 접한 행복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서은국 교수의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삶의 최종적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행복의 기원』 71쪽) 행복을 하나의 생존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좋아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192쪽)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이때의 행복감이 생존에 유리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지요.

 

한편 서은국 교수는,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를 ‘행복의 정신적 교주’로 지칭하며, 그의 ‘가치 있는 삶이 곧 행복’이라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행복을 지나치게 거창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진화 심리학에 입각한 자신의 논지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건 행복 그 자체보다는 ‘좋은 삶’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읽지 않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리스는 “행복한 사람에게는 … ‘행운의 선물’이 필요하다.”(『니코마스코 윤리학』,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85쪽)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쾌락이 최고선”이라고도 했습니다.(위 책, 286쪽)

 

기복을 옹호함

 

이제 법정에서 최후 변론을 하는 심정으로 ‘기복’을 옹호해 보겠습니다. ‘좋은 삶이 가져다 준 행운의 선물이 행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기복’과 좀 닮아 보이지 않습니까?

 

비판적이든 중립적이든 기복을 말할 때 등장시키는 대표적 그림 하나를 보겠습니다. 수능시험장 앞, 굳게 닫힌 철문을 보며 기도하는 어머니. 그 어머니는 자신의 그 행위 덕분에 아들이 ‘서울대’ 갈 것이라고 믿을까요? 그 춥고 지루하고 긴 시간 동안 다른 생각을 더 많이 하지는 않았을까요? 잘 먹이지 못한 후회, 아이 앞에서 부부 싸움 한 후회, 비록 공부는 잘 못 했어도 커 가는 동안 행복을 안겨 줬던 아이에 대한 고마움, 시험을 망쳤다면 어떻게 안아 줘야 할까 하는 고민…. 그랬을 겁니다.

 

아이를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의 준비도 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불자들이 말하는 가피가 아닐까요. 설사 나만 잘 먹고 잘 살자고 복을 빈다 할지라도, 행위 그 자체는 사회적으로 무해무득입니다. 간절하다면 ‘밥’과 ‘돈’ 너머의 것도 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리이타의 실마리는 찾은 게 아니겠습니까.

 

앞서 읽은 ‘고귀한 축복의 경’에 대해서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 빠알리어 지명이나 인명 말고는 누구나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원형에 대한 이해나 문헌학적 공부가 필요하신 분들은 전재성 박사의 주석서를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만 제가 한 마디 보탠다면 이 경의 천인(天人)이 바라는 ‘축복’이야 말로, ‘바른 삶’이 선물 받을 ‘복’, 달리 말하면 ‘가피’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어떻게 행복을 바라겠습니까. 순간순간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이 사바에서. “복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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