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이야기]
칼과 등불의 비유를 넘어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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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8 년 12 월 [통권 제6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006회 / 댓글0건본문
마음은 마음을 보지[看, 見] 못하는가? 일찍이 소승은 칼의 비유를 통해 보지 못한다고 했고, 대승은 등불의 비유를 통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한 대목을 찾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진나의] 『집량론』에서 설명하여, 심과 심소법이 모두 자체를 증득하는 것을 현량[현재적 지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일찍이 본 적이 없어서 응당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4지혜[대원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에 상응하는 심품들 하나하나가 역시 자체를 비추어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세간법[소승의 견해]과 차이가 없겠는가? 칼이 자기를 자르지 못하고 손가락 끝이 손가락 끝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등불 등이 자기를 비출 수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어떻게 등불 등이 자기를 비추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등불에] 어둠이 없음을 [우리가] 현재에 보므로 [등불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자기를 비추지 못한다고 하면, 응당 [등불에] 어둠의 장애가 있어서, 응당 [우리가 등불을] 현재에 보지 못한다. 이로 말미암기 때문에, 등불[과 태양] 등이 자기를 비춘다는 것을 안다.”(주1)
등불에 어둠이 없어서 우리가 등불을 현재에 볼 수 있는 것인데, 등불에 어둠이 없음은 등불이 자기를 비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불교 남종 초조인 혜능은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선불교 북종 초조인 신수의 선법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달마 이래의 선불교에서 제6대 조사는 혜능과 신수로 말해진다. 혜능은 남종의 개조로서 제6조가 되고 신수는 북종의 개조로서 제6조가 된다고 한다. 신수의 선법은 「관심론觀心論」에 나타난다. 「관심론」은 달마의 법문집으로 알려졌던 『소실육문少室六門』 속의 「제2문 파상론第二門破相論」의 다른 이름이다. 이 「관심론」은 나중에 돈황에서 출토된 자료들에 의거해 신수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신수는 견성見性을 강조하는 혜능과 달리 관심觀心을 강조한다. 그는 관심이 불도를 구하는 모든 법의 근본이라고 본다:
“질문: 만약 불도에 뜻을 두고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긴요한가? 답변: 오직 마음 관찰이라는 한 가지 법[觀心一法]이 [수행의]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단하고 요긴한 것이다. 질문: 어째서 한 법이 [수행의] 모든 법을 거두어들인다고 하는가? 답변: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므로, 모든 법은 오직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법을 다 갖추는 것이다.”(주2)
수행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긴요한 수행법은 마음 관찰이라는 한 가지 법, 곧 관심일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혜능은 신수의 관심觀心이 간심간정(看心看淨, 마음을 보고 청정함을 봄)에 해당한다고 보고 이를 비판한다. 간심간정이란 ‘일어난 마음’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청정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일어나는 생각을 반성하면서 청정한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달리 말해, 반성하는 방식으로 대상의식을 지켜보아 청정한 대상의식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에 대한 혜능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선지식이여, 이 법문 가운데 좌선이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음이며, 마음의 청정함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움직임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보는 것[看心]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이란 원래 망령된 것[妄]이고, 망령된 것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므로 볼 대상이 없는 것이다. 마음의 청정함을 보는 것[看淨]에 대하여 말하자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지만 망념 때문에 진여가 가려지는 것이다. 망념을 떠나면 본래 성품은 청정한 것인데, 자기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일어나서 마음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니, 도리어 청정과 망령이 생겨난다. 망령은 있을 곳이 없다. 그러므로 간看하는 자의 간看하는 행위는 도리어 망령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정은 모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정의 모양을 세워 이것을 공부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를 짓는 자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막아 도리어 청정에 속박된다.”(주3)
여기서 혜능은 마음은 망령된 것이고 성품은 청정한 것이라고 하여, 마음과 성품을 대비시킨다. 그는 망령된 마음을 떠나면 청정한 성품이 있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망념심을 제거하여 청정심에 이른다는 것이 아니라, 진여에서 비롯되는 청정심을 유지하여 망념심을 차단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그는 반성심을 일으켜 이것을 통해 청정심을 보려고 하는 것이 망령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혜능의 입장은 현재적 의식, 곧 ‘지금 여기서’ 작용하는 일념심一念心이 바로 청정심이므로 반성의식에 의해 일부러 청정심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혜능의 이 같은 입장은 수행의 과정을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는 일상인의 청정하지 않은 마음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일상심이 곧 청정심이라고 단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신수의 ‘간심간정론’과 혜능의 ‘청정심론’은 서로 배타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서로 호혜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신수의 ‘간심간정론’은 청정심 실현을 위한 수행 과정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혜능의 ‘청정심론’은 수행결과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혜능 자신도 “자성인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밝게 트이게 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주4)라고 말하므로, 사실상 그가 마음 관찰을 전적으로 배척한 것은 아니다.
수행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단계는 여럿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1) 일상적 마음은 (마음을 반성하지 않으며) 청정하지 않다. 2) 반성적 마음은 (마음을 반성하면서) 처음에는 청정하지 않은 마음을 본다. 3) 반성적 마음은 (마음을 반성하면서) 점차로 청정한 마음을 본다. 4) 최종적으로 마음은 (마음을 반성하지 않으면서도) 청정한 마음으로 실현된다. 이러한 마음의 네 단계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수행의 단계들로 본 마음의 네 단계(화살표는 관찰방향을 표시함) | ||
1 | 반성하지 않는 마음 | 망념심: 청정하지 않은 마음 |
2 | 반성하는 마음 → | 망념심: 청정하지 않은 마음 |
3 | 반성하는 마음 → | 청정심: 청정한 마음 |
4 | 반성하지 않는 마음 | 청정심: 청정한 마음 |
반성하는 마음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혜능의 말은 여기서 마지막의 네 번째 단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반면에 간심간정을 주장하는 신수의 말은 처음의 세 단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혜능은 반성하지 않는 마음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반성하는 마음 자체도 여전히 하나의 망령심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그런데 반성하는 마음은 단지 기억하는 마음인가? 아니다. 반성하는 마음이 과거의 마음이 아닌 바로 현재의 마음을 반성하는 한, 그것은 기억하는 마음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반성하는 마음은 나중의 기억을 위해 현재의 마음을 저장하는 마음인가? 아니다. 현재의 마음의 저장은 반성 없이도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소개된 ‘자기를 비추는 등불’은 ‘나중의 기억을 위해 현재의 마음을 보면서 저장하는 마음’, 곧 자증분을 비유한다. 소승은 ‘마음을 보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칼이 자기를 자르지 못한다’는 것과 ‘손가락 끝이 손가락 끝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비유로 들었다. 반면에 대승은 ‘대상(상분)을 보는 마음(견분) 자체를 다시 보는 마음(자증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등불과 태양 등이 자기를 비춘다’는 것을 비유로 들었다.
그렇다면, 등불로 비유된 자증분이 반성하는 마음인가? 마음에 오직 3부분(상분, 견분, 자증분)이 있다는 진나의 입장에 따르면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반면 마음에 4부분(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이 있다는 호법의 입장을 따르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다. 신수가 말한 마음 관찰이란 지나간 마음의 관찰이 아니라 현재의 마음의 관찰이므로, 그것은 기억함이 아니라 관조함이다. 현재의 마음의 관찰로서의 관조는 노력하여 일어나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저절로 일어나는 자증분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관조를 자증분이 지닌 (저장 공능과는 다른) 별개의 공능(능력)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필자는 관조가 증자증분의 공능이라고 본다.
형식적으로 말하면,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본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자증분은 자증분이 매순간 저장하는 견분과 상분을 보기 때문이다. 심4분을 현상학의 언어와 함께 표시 해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화살표는 관찰 방향을 표시한다.
의식의 구조 | 반성의식 | 자기의식 | 대상의식 | 대상 |
심4분 | 증자증분→ | ←자증분→ | 견분 → | 상분 |
주)
(주1) 大正新脩大藏經,『佛地經論』(親光等造, 玄奘譯), T1530_.26.0303a26-b03: 集量論説. 諸心心法皆證自體. 名爲現量. 若不爾者. 如不曾見不應憶念. 是故四智相應心品. 一一亦能照知自體. 云何不與世法相違. 刀不自割指端不能觸指端故. 不見燈等能自照耶. 云何得知燈等自照現見無闇分明顯現. 若不自照應有闇障. 應不現見. 由此故知燈等自照.
(주2) 大正新脩大藏經, 『少室六門』, T2009_.48.0366c19-c22: “問曰. 若復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答曰. 唯觀心一法. 總攝諸法. 最爲省要 問曰. 何一法能攝諸法. 答. 心者萬法之根本. 一切諸法唯心所生. 若能了心. 則萬法倶備.”
(주3) 大正新脩大藏經, 敦煌本 『六祖壇經』, T2007_.48.0338c23-c29: “善諸識. 此法門中. 座禪元不著心. 亦不著淨. 亦不言動. 若言看心. 心元是妄. 妄如幻故無所看也. 若言看淨. 人姓本淨. 爲妄念故蓋覆眞如. 離妄念本姓淨. 不見自姓本淨. 心起看淨. 却生淨妄. 妄無處所. 故知看者看却是妄也.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作此見者章自本姓. 却被淨縛.”
(주4) 大正新脩大藏經, 敦煌本 『六祖壇經』, T2007_.48.0340c17-c18: 自性心地. 以智惠觀照. 内外名(=明)徹識自本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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