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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이야기]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의 작용과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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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8 년 8 월 [통권 제6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3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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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논서에 나타나는 낱말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논서의 문장들을 알맞은 뜻을 갖추도록 해석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래서 무엇 좀 얻어 보려고 논서에 접근하는 이들은 십중팔구 중도에 포기하기 마련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아마도 논서의 이해를 위해 전력추구하는 상태가 곧 열반이라고 믿는 이들일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열반을 구할 수 있다는 점[無智亦無得以無所得故]을 아는 이들은 그러한 전력추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논서의 이해가 어렵다는 점은 글을 쓰는 이들과 글을 읽는 이들에게 매 한가지일 것이다.

 


쫑카파가 1409년 창건한 간덴사 모습

 

유식불교를 대표하는 논서는 『성유식론成唯識論』이다. 이 책은 인도에서 4세기에 활동한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대한 십대논사十大論師의 주석서를 6세기의 호법 논사의 학설을 중심으로 통합하여 편찬한 책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논서들을 통합편찬하면서 중국어로 번역한 이는 7세기의 당나라 현장玄奘이었다. 편찬서의 많은 내용이 호법의 견해이기 때문인지,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에서는 아직도 저자가 호법이고, 역자가 현장이라고 표시되고 있다.

 

『성유식론』에는 방대한 논의들이 담겨 있지만, 필자의 관심은 주로 8식설과 심4분설에 대한 논의에 기울어져 있다. 8식설이란 심식을 여덟 가지로, 곧 5감각과 제6의식, 제7자아의식, 제8심층의식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을 말하고, 심4분설이란 마음을 네 부분으로, 곧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현상학적 용어로 풀이하면, 상분은 객관(대상)이고, 견분은 주관(주체)이고, 자증분은 (제7 자아의식과는 구분되는) 자기의식이다. 증자증분에 상응하는 용어는 현상학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데, 필자는 이것을 특별한 종류의 반성의식이라고 보아 ‘관조적 반성의식’이라고 칭하고 있다.

 

논서에서는 심식의 종류와 활동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성유식론』 제1권 초반에서 현장은 세친의 『유식삼십송』에 의거해 자아와 대상이 가상적으로 정립假立된 것이고, 그것들이 심식[識]의 전변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들이며, 스스로 전변할 수 있는 심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만약 오직 심식[識]만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세간의 사람들과 성스런 가르침들은 자아[我]와 제법[法]이 존재한다고 말하는가? 『유식삼십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와 제법을 가상적으로 말함에 의해 [자아와 제법의] 각종의 모습들이 전개된다. 그것들은 심식이 전변된 것들[견분과 상분]에 의지한다. 전변할 수 있는 심식(能變, transforming consciousness)은 세 가지이니, 이숙식[인과응보적인 심식], 사량식[자아를 사유하는 심식], 요별경식[외부경계를 지각하는 심식]이다.”(주1)

 

심식

심식의 전변

전변의 이차적 결과

1) 이숙식

견분과 상분으로의 이원화

`자아와 제법의 전개

2) 사량식

3) 요별경식


 

언급된 세 가지 심식 유형들, 곧 이숙식, 사량식, 요별경식은 다른 말로 제8아뢰야식(심층의식), 제7말라식(자아의식), 전前6식(5감각과 제6의식)이라고 불린다. 이숙식이란 상이하게 성숙된 심식, 곧 과거의 선악의 업보로 생겨났으나 그 자신의 선악은 정해져 있지 않은 심식이라는 의미로서, 유루 아뢰야식을 가리킨다. 어쨌든 8식 모두가 견분과 상분으로 이원화될 수 있다는 설명은 8식 모두에서 심4분이 성립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이것은 8식의 심4분의 상호적 관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매우 복잡한 논의를 숨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성유식론』 제2권에서는 제8아뢰야식의 작용과 대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심식[아뢰야식]의 행상[작용, 활동 양상, 출현 형식](주2)과 소연[대상]은 어떠한가? [「삼십송」의 제3 게송에서 말하기를 그 심식이] 붙잡아 유지하는 것(집수), 그것의 처소, 그것의 요별은 알 수가 없다[不可知].(주3) 요별은 명료한 분별을 이른다. 이것이 곧 행상인데, 심식은 요별을 행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처소는 거처하는 곳, 곧 주위세계(기세간)인데, 이것은 모든 유정이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그 심식이] 붙잡아 유지하는 것(집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종자들과 유근신이다. 종자들이란 형상, 이름, 분별습기이다.(주4) 유근신이란 모든 감각능력들과 이것들의 의지처[감각기관]를 말한다. 이 두 가지[종자들과 유근신]는 모두 심식에 의해 붙잡혀 유지되고, 자체自體 속에 포섭되는데, 그것들은 자체와 더불어 안위[안락함과 위태함]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붙잡혀 유지되는 것들과 처소는 모두 심식의 대상이다.”(주5)

이에 따르면, 아뢰야식에서 견분(주관)은 요별작용이고, 상분(객관)은 종자들(형상, 이름, 분별습기), 유근신, 처소이다. 상분들 중에서 종자들(형상, 이 름, 분별습기)과 유근신은 자체自體에 포섭되고, 처소는 포섭되지 않는다. 종자들 중에서 ‘형상과 이름’은 자기와 세계가 지각된 것인 분별내용이고, ‘분별습기’는 자기와 세계를 지각하는 분별능력의 종자이다. 요컨대 이숙식은 자기와 세계를 분별하면서, 분별내용(형상, 이름)과 분별능력(분별습기)을 종자들로 저장한다. 인용문에서의 ‘자체自體’를 아뢰야식의 내부라고 해석할 경우, 종자들과 유근신은 아뢰야식의 내부에 있고, 처소는 아뢰야식의 외부에 있다는 말이 된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인용문의 내용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아뢰야식의 행상과 소연

행상(견분의 작용)

요별(명료한 분별) 작용

소연(견분의 대상)

상분: 집수(종자들[형상, 이름, 분별습기]과 유근신), 처소(주위세계)

견분의 상분요별의 결과

종자들(형상, 이름, 분별습기)


 

그렇다면, 인용문에서는 왜 아뢰야식의 집수와 처소와 요별에 대해 “알 수 없다[不可知]”고 말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답변은 아뢰야식이란 반성적인 주의가 기울여지기 이전의 선반성적인-수동적인 지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동적인 지각작용은 능동적인 반성이 개입하기 이 전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현장은 세 개의 심식 중 아뢰야식의 발생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뢰야식이 인연들의 힘에 의해 자체自體로 발생할 때, 내부는 종자들과 유근신으로 변화하고, 외부는 기세간[주위세계]으로 변화한다. 곧 변화된 것을 자신의 심식의 대상으로 삼는데, 변화된 것에 의지해서 행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 중에서 요별이란 이숙식이 자기의 심식의 대상에 대해 요별작용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 요별작용은 견분에 포섭된다.”(주6)

   

1) 아뢰야식이 종자로부터 자체(자증분)로서 발생

2) 자체의 이원화

견분

요별작용

상분

내부: 종자들과 유근신

외부: 기세간


 

이 인용문의 첫 구절은 “아뢰야식이 인연들의 힘에 의해 발생할 때”라고 되어 있지 않고, “아뢰야식이 인연들의 힘에 의해 자체自體로 발생할 때”라고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여기서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앞 대목에서 필자는 자체를 ‘내부’로 해석했는데, 여기서는 ‘자증분’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현장은 뒤에서 “상분과 견분이 거기에 의지하는 있는 자체自體를 사체[事]라고 부르는데, 곧 자증분이다”(주7)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종자로부터 자증분이 생겨난 후에는, 견분과 상분의 이원화가 일어난다. 상분은 위 인용문에서 ‘내부’(종자와 유근신)와 ‘외부’(기 세간)로 분화된다고 말해졌다.

 

비유하면,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아뢰야식의 종자들도 잠들어 있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는 자기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만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는데, 이는 종자가 자증분으로 현행한 해당한다. 그 다음 순간에는 자기가 넓은 거실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는 견분과 상분의 이원화가 이뤄진 단계이다. ‘자기가 넓은 거실에 누워있다’라는 표현에서, ‘자기’는 유근신을, ‘넓은’은 형상을, ‘거실’은 이름을, ‘누워있다’는 형상을 가리키므로, 견분(종자로서의 분별습기가 현행한 요별작용)이 상분(유근신, 형상, 이름)을 분별한 것이다.

 

거실에서 일어나 앉아, 거실에서 잠을 잔 이유를 잠시 생각해볼 수 있다. 어제 밤에 비좁은 침실을 보면서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넓은 거실에서 잠자기로 생각했었다는 점이 기억난다. 그런데 이렇게 어제의 생각을 지금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제의 나의 생각이 마음 어딘가에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장의 기능을 갖는 것이 자증분(자기의식)인데, 이것은 견분의 상분 요별작용을 매순간 동시적으로 저장한다. 마치 타이핑되는 원고를 컴퓨터가 매순간 동시적으로 저장하는 것과 같다. 자증분은 우리에게 기억에 토대로 한 앞뒤로 일관된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반면에 일관된 삶을 붕괴시키는 것은 제7말라식(자아의식, 에고의식)이다. 아뢰야식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건 잠을 자고 있을 때건 늘 활동한다고 한다. 우리가 잠을 잘 때에도 살아 있고 신진대사작용이 이뤄지듯이 말이다. 그러나 잠 속에서도 아뢰야식이 인식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다.

주)
(주1) 『成唯識論』, T1585_.31.0001a18-a22: 若唯有識. 云何世間及諸聖敎. 說有我法. 頌曰‘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성유식론 외』, 김묘주 역주, 동국역경원, 2008, 70-71쪽 참고; 「Fransis H. Cook, Three Texts on Consciousness Only, Berkeley: Numata Center for Buddhist Translation, 1999, p.9: “retribution, thought, and perception of the external realm”
(주2) Fransis H. Cook, 앞의 책, p.60: “mode of activity”; Erich Frauwallner, Philosophie des Buddhismus , Del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2010, p.430, “appearing form”.
(주3) Fransis H. Cook, 앞의 책, p.60: “That which it grasps and holds, its location, and its perception are imperceptible.”; Erich Frauwallner, 앞의 책, p.430: “It recognizes, in an unconscious form, the appropriation and the site.”
(주4) Fransis H. Cook, 앞의 책, p.60: “images, names(or words), and the perfuming of imagination”
(주5) 『成唯識論』, T1585_.31.0010a11-a17: 此識行相所緣云何. 謂不可知執受處了. 了謂了別. 卽是行相. 識以了別爲行相故處謂處所. 卽器世間. 是諸有情所依處故. 執受有二. 謂諸種子及有根身. 諸種子者謂諸相名分別習氣. 有根身者謂諸色根及根依處. 此二皆是識所執受. 攝爲自體同安危故. 執受及處俱是所緣. 『성유식론 외』, 김묘주 역주, 170-71쪽 참고.
(주6) 『成唯識論』, T1585_.31.0010a17-a21: 阿賴耶識因緣力故自體生時. 內變爲種及有根身. 外變爲器. 卽以所變爲自所緣. 行相仗之而得起故. 此中了者謂異熟識於自所緣有了別用. 此了別用見分所攝. 『성유식론 외』, 김묘주 역주, 171쪽 참고.
(주7) 『成唯識論』, T1585_.31.0010b07: 相見所依自體名事. 卽自證分. 『성유식론 외』, 김묘주 역주, 173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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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성균관대 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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