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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말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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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4 월 [통권 제72호]  /     /  작성일20-06-20 13:55  /   조회6,77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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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저번 호에서는 의식은 어떤 작용을 하는 마음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심층의 마음인 말나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친 보살의 『유식삼십송』에 따르면 말나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말나식은 모든 일에 ‘언제나 집요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항심사량심]’이다. 

말나식은 ‘나[자신]’라는 생각에 ‘더럽혀진 마음[염오의]’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하고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삼는 마음이다. 

말나식은 가치론적으로 선도 불선[악]도 아닌 무기이다. 특히 유부무기이다. 

말나식은 4가지 번뇌[아치, 아견, 아만, 아애]와 언제나 함께 작용하는 마음이다. 

말나식은 자신이 생존하는 장소에 구속되게 하는 마음이다. 

말나식은 깊은 수면이나 기절해도 사라지지 않고 작용하지만, 아라한과 멸진정의 단계에서 사라지는 마음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말나식은 무엇 때문에 항심사량하는 마음이고, 왜 더러운 마음인지를 기술하겠습니다. 또한 무엇 때문에 말나식은 가치론적으로 선도, 불선[악]도 아닌 무기에만 작용하는 마음인지 알아봅시다.

 

말나식manas-vijñāna에서 ‘말나’란 범어 √man(사량하다·생각하다)’에서 파생한 명사 ‘마나스manas’를 음사한 것이며, 식이란 마음[심]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말나식이란 ‘사량[생각]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면 말나식은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사량하는 마음’입니다.

 

말나식 - ‘항심사량’하는 마음

 

『유식삼십송』의 주석서인 『성유식론』에서 ‘말나식은 어떻게 자기[자신]를 사량하는가?’라는 물음에 “항심사량하는 것이 나머지 식[마음]보다 뛰어나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항이란 항상 항자이기 때문에 ‘언제나·항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말나식은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착한 일 하거나 나쁜 일을 하거나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사량하는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심이란 ‘매사에 집요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을 하던 깊고 깊은 심층에서 ‘언제나 집요하게 자아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나식은 ‘언제나 집요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마음[항심사량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도 산치대탑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

 

 

우리는 사랑하는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모두 자신을 사랑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기에게 얽매이고 자기중심으로만 사량[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마음이 말나식입니다. 이런 말나식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사량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음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내가 지금하고 있는 봉사가 정말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기쁨 때문이지 헷갈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 꽤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위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도와주고 나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왜 기분이 좋고 뿌듯할까요? 바로 깊은 내면에 자기만족, 자신의 기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의식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지만 착한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매사에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마음이 말나식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느 날 육교를 건너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때 마침 초라한 노숙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 노숙자에게 천원을 보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노숙자가 불쌍해서 천원을 보시했다는 것은 표층의 마음 작용인 의식의 활동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의식으로 생각하면 노숙자가 불쌍했기 때문에 천원을 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심층의 마음 깊은 곳에서 말나식이 은밀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 노숙자가 불쌍해서 보시를 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기쁨을 위해 보시를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내 의식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지만 심층의 어딘가에서 ‘내 자신의 기쁨,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실은 보시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은[유가행파] 심층에서 언제나 집요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발견하여 그것을 말나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나식은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만 말나식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 특히 유부무기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더러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말나식을 더러운 마음이라는 뜻의 ‘염오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 중에 더티 플레이dirty-play를 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관중이 야유를 보내지만 심판은 휘슬을 불지 않습니다. 더티 플레이지만 반칙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나식은 운동 경기로 치면 일종의 ‘더티 플레이’라고 할까요!

 

말나식 - 아뢰야식에 의지해 생기는 마음

 

말나식은 ‘심층에서 언제나 집요하게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말나식은 어디에서 생기한 것인가? 저번 호에서 전오식과 의식은 아뢰야식을 의지에서 생긴다고 설명했습니다만, 말나식도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기합니다. 유식에서 자아에 집착하는 것[아집我執]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전변한 것, 즉 인간의 번뇌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생기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기성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생겼다는 입장입니다. 반면 여래장사상에서는 유식사상과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합니다. 여래장사상에서는 인간을 본래 청정한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번뇌와 아집 같은 오염된 성질은 외부로부터 날아들어 온 먼지와 같은 우연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것을 ‘심성본정 객진번뇌’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 합니다. 그러나 객진번뇌, 즉 손님[객客]과 같이 먼지[진塵]처럼 날아들어와 번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지[번뇌]를 불어서 날려 버리면 청정한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래장사상은 중국에 전해져 중국 선종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당연히 대한불교조계종도 선종이기 때문에 여래장사상을 토대로 성립하였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탐구하는 유식[마음공부]도 선종의 사상적 토대입니다.

 

말나식 - 대상은 아뢰야식이다

 

유식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이든 반드시 무언가를 대상으로 삼아 작용합니다. 마음이라면 반드시 마음의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상이 없는 마음은 없습니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안식은 색경, 이식은 성경, 비식은 향경, 설식은 미경, 신식은 촉경, 의식은 법경을 각각 대상으로 삼아 작용합니다. 반면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하여 작용하고,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의지처로 하며, 게다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삼아 아뢰야식을 자아로 생각하고, 아뢰야식에 애착을 가지고 계속하여 집착합니다. 다시 말해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말나식 - 유부무기이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비선비악]입니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무기인 이유에 대해서는 아뢰야식을 설명할 때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그 중에 말나식은 무기중에서도 유부무기입니다. 유부란 있을 유, 덮을 ‘부’자이기 때문에 무색한 마음을 덮거나 깨달음에로 나아가는데 방해나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만, 아뢰야식은 무기 중에서도 무부무기입니다. 무부란 없을 무, 덮을 부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덮는 것이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무색한 마음을 덮거나 깨달음에로 나아가는데 장애나 방해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 의식은 선·불선·무기 모두에 작용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가치론적으로 분류하였을 때 아뢰야식, 말나식, 의식은 어디에 속하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유식에서 말하는 선·불선·무기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아봅시다. 먼저 선이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이익을 주는 마음이나 행위’를 말합니다. 반대로 불선이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손해를 초래하는 마음이나 행위’를 말합니다. 무기는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이익도 손해도 가져다주지 않는 마음이나 행위’입니다. 그래서 호법 보살은 『성유식론』에서 무기를 “선과 불선의 이롭고 해로운 뜻 중에서 기별, 즉 선인지 악인지 별도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무기] 무기라고 이름 한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행위는 선, 불선[악]의 이분법적으로 구별되기 보다는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걸어가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다면 불선[악]이지만, 그냥 걷고 있는 행위는 선인가요, 불선인가요? 그냥 걷는 행위는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위는 선, 불선보다는 무기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현재 자기가 아무리 행복[즐거움]하거나 불행[괴로움]하더라도 이 행복과 불행은 지금 세상[현세]에만 영향을 미치지만, 선·불선·무기는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미래세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재산이 많아 현세에서 행복하더라도 또는 재산이 없어 불행하더라도 그 행복이나 불행은 미래세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현세에서 돈이 많아 행복하게 살았지만 미래세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현세에서 돈이 없어 불행한 삶을 살았더라도 미래세에서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행복과 불행은 현세에 끝납니다.

 

그러나 ‘착한 일[선]’을 하거나 혹은 ‘나쁜 짓[불선]’을 하면 그것은 현재세뿐만 아니라 미래세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 선한 일은 많이 하고 악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 서는 수선단악(선을 닦고 악을 끊는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지면 관계상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호에는 말나식과 함께하는 심소[마음작용], 특히 4가지 번뇌[아치, 아견, 아만, 아애]와 말나식은 어느 단계에서 소멸하는지를 기술하겠습니다. 나마스테nama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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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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