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아뢰야식과 5가지 심소[오변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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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10 월 [통권 제78호] / / 작성일20-06-28 16:28 / 조회8,217회 / 댓글0건본문
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심왕[아뢰야식, 말나식, 의식, 전오식]과 언제나 함께 작용하는 51개의 심소[마음작용]가 있습니다. 51개의 심소 중에 아뢰야식과 작용하는 것은 5가지 변행 심소뿐입니다. 5가지 심소는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주1)입니다. 변행(遍行, sarvatragā)이란 변遍은 ‘두루’라는 의미로 ‘언제 어디서나’라는 뜻입니다. ‘행行’은 여기서는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즉 마음[인식작용]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함께 작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변행은 ‘마음[아뢰야식, 말나식, 의식]이 작용하면, 반드시 동반해서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5가지 변행심소는 아뢰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유일한 심소입니다. 오직 아뢰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5가지 변행은 어떤 심소인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알아봅시다.(주2) 이번 호에서는 ‘촉’과 ‘수’의 심소만 설명하겠습니다. 나머지 심소[작의, 상, 사]는 다음 호에 기술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촉(觸, sparśa)
보통 ‘촉’이라고 하면, ‘피부에 접촉하다’ 또는 물건을 손으로 만지거나 하는 ‘터치touch’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촉이라는 심소는 단순히 물리적인 ‘접촉’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물이 보이는 것을 ‘눈에 띄다’ 또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누구와 ‘접촉하다’라고 표현하는데, 촉이란 이런 뉘앙스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관련 논서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먼저 세친 보살은 <대승오온론>(한역)에서 “세 가지[근, 경, 식]가 화합하여 분별[판별]하는 것을 본성[자성]으로 한다.”(주3)라고 하였고, 범본에서는 “<감각기관[根], 인식대상[境], 인식작용[識]의> 세 가지가 결합하여trikasamavāye 판별(判別, pariccheda)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즉 촉이란 ‘감각기관, 인식대상, 인식작용[마음]의 3자가 만나[결합] 무엇을 알게 하는 것[판별]’이라고 정의합니다.(주4)
또한 성철 스님이 <백일법문>에서 존경을 표한 명나라 시대 지욱 스님은 <대승백법명문론직해>에서 촉 심소를 “근 ‧ 경 ‧ 식의 삼화가 일어날 때, 심과 심소를 대상에 접촉시키는 것을 본성[體性]으로 삼고, 수 ‧ 상 ‧ 사 등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주5)라고 주석합니다. 그리고 호법보살의 저작이자 법상종[중국에서 성립한 유식종파]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대정장 31, P.11b16)에서는 “촉이란 삼이 화합하여[三和] 변이變異로 분별한다. 심과 심소를 대상에 접촉하게 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고, 수 ‧ 상 ‧ 사 등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작용으로 한다.”(주6)라고 정의합니다.
촉에 대한 주석 내용을 살펴보면, 지욱 스님은 호법보살의 주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호법 보살은 세친 보살의 주석을 보다 자세하게 풀어서 주석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장 잘 정리한 <성유식론>에 등장하는 용어를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삼화三和’라는 것은 감각기관(indriya, 根), 인식대상(viṣaya, 境), 인식작용(vijñāna, 識)의 3가지 조건[三]을 가리키며, 이 3가지의 조건이 접촉하는 것[和]을 말합니다. 그리고 ‘변이’란 감각기관[根]이 대상으로 향할 때 본래의 모습이 변화한다는 의미입니다. ‘분별’이란 ‘닮다’〔상사相似〕라는 의미로 인식작용[식識]이 감각기관[根]의 변화와 닮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증탕에 들어가면 더운 열기[인식대상]가 피부[감각기관]에 닿아 피부가 열기를 감지합니다. 그리고 피부의 변화에 따라 덥다는 것[인식작용]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이 어떤 것을 안다[인식]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根, 피부) ‧ 인식대상(境, 열기) ‧ 인식작용(識, 덥다)의 3가지 조건이 만나는 것[접촉]에 의해 처음으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감각기관[根], 인식대상[境], 인식작용[識]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으면 우리들의 앎[인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식대상[境]은 감각기관[根] ‧ 인식작용[識]’과 만나는 것에 의해 변합니다. 예들 들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산속에서 피는 한 송이 들국화[인식대상]도 누군가의 감각기관[根], 인식작용[識]과 만나는 것에 의해 들국화가 됩니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하였는지 모릅니다. 즉 이와 같이 변화하는 것을 <성유식론>에서는 “변이變異로 분별하다”라고 주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受 ‧ 상想 ‧ 사思 등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란 나머지 모든 심소가 발생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삼십송>에서는 촉 심소를 가장 먼저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촉은 앎[인식]을 생기게 하는 근거가 되는 중요한 심소입니다.
그런데 감산스님은<백법논의>에서 “촉은 마음을 이끌어 대상[境]에 향하게 하는 것[趣]이다.”(觸則引心趣境)라고 주석합니다. 또한 성철스님도 <성유식론(중)>(p.313)에서 촉을 “마음을 끌어당겨 경계[대상]에 나아간다.”(引心趣境)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촉을 ‘마음을 대상에 접촉시키는 마음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각기관, 인식대상, 마음이 만나는 것[접촉하는 것]을 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이 구절을 풀이하기를 “마음을 끌어서 경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능 ‧ 소가 벌어집니다. 촉은 능能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고, 소所의 입장에서 말하면 수受입니다. 수는 대상의 모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능소가 떨어진 무분별지에서 하는 설명이기 때문에 보통 중생이 말하는 능 · 소나 촉 ‧ 수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여무분별지가 아니고, 제8 아뢰야식의 미세식입니다.”라고 하여 촉과 수를 능소관계로 설명합니다. 성철스님의 설명을 간단하게 말하면, 촉에서 일어나는 감각기관의 변이[변화[의 결과로써 ‘수’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삼십송>의 순서와는 맞지 않지만, 먼저 ‘수’의 심소를 설명하겠습니다.
2. 수(受, vedanā)
‘수’란 받을 수受 자이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대상을 감수하는[받아들이는] 마음작용[심소]’입니다. 그렇지만 대상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단순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논서에서는 ‘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수受’에 대해 세친 보살의 저작인 <대승오온론>(한역)에서는 “무엇을 수온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세 가지의 ‘영납(領納, anubhava)’이다. 첫째는 괴로움이고, 둘째는 즐거움이고, 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이른바 즐거움이란 <즐거움이> 소멸할 때에 화합[지속]의 바람[欲]이 있는 것이다. 괴로움이란 <괴로움이> 생겨날 때에 괴리[乖離, 서로 어그러져 떨어짐]의 바람[欲]이 있는 것이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란 둘[화합과 괴리]의 바람[欲]이 없는 것이다.”(주7)라고 하였고, 범본에서는 “<다섯 가지의 집적(오온) 중에 두 번째의> 감수작용[受蘊, vedanā]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세 가지 종류의 받아들임(領納)이다. <그 세 가지 중에> 첫 번째는 고뇌苦惱, 두 번째는 안락安樂, 세 번째는 고뇌도 아니고 안락도 아닌 것[불고불락不苦不樂]이다. 안락이란 <그것이> 소멸할 때에 결합이라는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뇌란 <그것이> 생기할 때 괴리[벗어남]라는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불고불락이란 <그것이> 생기할 때 <결합과 괴리라는> 둘의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주8)라고 주석합니다.
여기서 ‘욕欲’은 범어 ‘찬다chanda’의 번역입니다. 필자는 찬다를 ‘바람, 희망, 의욕, 의지’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욕합欲合’이란 ‘안락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이고, ‘욕리欲離’란 ‘고뇌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납領納’이란 독자들께서 들어보지 못한 용어라고 생각하는데, 영수증領收證이라고 할 때의 영領, 납품서納品書라고 할 때의 납納 자이므로, 둘 다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받아들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유식론>(『대정장』 31, p.11c11)에서는 “순(順, 좋아함)과 위(違, 싫어함)와 구비[俱非,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아닌 것]의 대상[境]을 ‘영납領納하는 것’을 본질[性]로 하고, 애(愛)를 일으키는 것을 구체적인 작용으로 삼는다.”(주9)고 주석하였습니다.
감산스님은 <백법논의>에서 “이 허망한 대상이 한번 나타나면, 좋아하거나[順] 싫어하거나[違]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俱非] 대상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품어서 버리지 않기 때문에 수受라고 한다.”(주10)라고 주석합니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중)>(p.313)에서 ‘수受’를 “경계[境]의 모습을 받아들인다.”(含受境相)고 설명합니다. 즉 성철스님은 감산스님의 주석인 “즉위순구비경상 함수불사則違順俱非境相. 含受不捨.”라는 구절 중에서 ‘경상함수(境相含受, 경계의 모습을 품어 받아들인다)’를 발취하여 ‘수受’의 심소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욱스님(<대승백법명문론직해>, 『대정장』 48, p.342c9)은 “순順과 위違와 비순비위[非順非違, 순과 위도 아닌 것]의 대상[境]의 상相을 영납領納하는 것을 본질[體性]로 하고, <즐거운 대상과> 결합하기를 바라거나[욕합欲合] <싫어하는 대상에서> 벗어가기를 바라거나[욕리欲離] 결합하기도 벗어나기도 원하지 않는 것[欲不合不離]에 대해 애愛를 일으키는 것을 구체적인 작용으로 삼는다.”(주11)라고 하여 <성유식론>의 주석과 거의 동일합니다.
위 주석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순順이란 심신에 순응하는 대상[樂], 위違란 심신에 대립하는 대상[苦], 구비俱非는 좋지도 싫지도 않은 대상[非苦非樂]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受의 본질적인 작용이고, 이것에 의해 애욕을 일으키는 것이 수受의 구체적인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수(受, vedanā)란 받아들이는 작용, 즉 감수 작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유식론> 등의 주석서에서는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인 ‘영납領納’이라고 주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외부로부터 센스데이터를 받아들이는 경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이나 감정(싫어함, 좋아함, 취미)을 가지고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빠, 엄마, 딸이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아빠는 슬퍼서 울고, 엄마는 담담하게 보고 있고, 딸은 전혀 슬픈 기색이 없다고 합시다. 동일한 현상에 똑같이 반응해야 하는데, 왜 3명의 반응이 다를까요? 왜냐하면 3명 모두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관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의 작용에 의해 인간의 개성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수受를 삼수三受와 오수五受로 나눕니다. 삼수는 고苦 ‧ 락樂 ‧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사捨〕를 말합니다. 한편 오수는 고 ‧ 락 ‧ 우憂 ‧ 희喜 ‧ 괴로움도, 즐거움도, 슬픔도, 기쁨도 아닌 것〔사捨〕입니다. 오수 중에서 고와 락은 감각의 영역이고 우와 희는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식識과의 관계로 말하면 고와 락은 전오식, 우와 희 그리고 사捨는 제6 의식의 활동에 속합니다. 이중에 아뢰야식과 상응하는 것은 오직 사수捨受뿐입니다. 그래서 세친 보살은 <유식삼십송>에서 아뢰야식은 “오직 사수와 상응한다.〔相應唯捨受〕”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수受는 우리들의 인식 성립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amaste
주)
(주1)<유식삼십송>에서는 ‘常與觸 作意受想思(sadā sparśa-manaskāra-vit-saṃjñā-cetanānvitam)’이라고 하였다.
(주2) 지욱스님(<대승백법명문론직해>, 대정장48, 342c4)은 “4개의 일체를 갖추었기 때문에 변행이라고 한다. 이른바 선 ‧ 악 ‧ 무기의 삼성에 두루 <함께 작용하고>, 삼계9지에 두루 <작용하며>, 유루 ‧ 무루 ‧ 세간 ‧ 출세간에 두루 <작용할> 때에 8식의 심왕과 두루 상응한다.”(具四一切. 名為遍行. 謂遍於善惡無記三性. 遍於三界九地. 遍於有漏無漏世出世時. 遍與八識心王相應也)라고 주석한다.
(주3) 謂三和合分別爲性.
(주4) < >의 문장부호는 본문에는 없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삽입한 것이며, [ ]의 문장부호는 앞과 뒤의 발음이 다를 경우에 삽입한 것이다.
(주5) 于根境識三和之時. 令心心所觸境. 以為體性. 受想思等所依. 以為業用.
(주6) 觸謂三和. 分別變異. 令心心所觸境為性. 受想思等所依為業.
(주7) 云何受蘊? 謂三領納. 一苦, 二樂, 三不苦不樂. 樂謂滅時有和合欲. 苦謂生時有乖離欲. 不苦不樂謂無二欲.
(주8) trividho anubhavaḥ/sukho duhkho aduhkhāsukhaś ca sukha yasya nirodhe saṃyogac chando bhavati/dukkho yasyotpādādviyogac chando bhavati/aduhkhāsukho yasyotpādāttadubhayam na bhavati/
(주9) 受謂領納順違俱非境相為性. 起愛為業.
(주10) 此妄境一現. 則違順俱非境相. 含受不捨. 是名為受.
(주11) 領納順違非順非違境相. 以為體性. 起於欲合欲離欲不合不離之愛. 以為業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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