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아뢰야식과 5가지 심소[오변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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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11 월 [통권 제79호] / / 작성일20-06-28 17:16 / 조회7,916회 / 댓글0건본문
허암 / 불교학자 ‧ 유식
독자들께서는 지난 호의 내용을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제8 아뢰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5가지 심소[오변행] 중에서 촉觸과 수受에 대해 기술하였습니다. 계속해 이번 호에도 나머지 심소인 작의, 상, 사에 대해 설명하고자합니다. 그런데 <유식삼십송>에서는 오변행을 촉, 작의, 수, 상, 사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필자는 그 순서를 바꾸어 ‘작의’보다 ‘수’를 먼저 설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지난 호에서 간단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1. 작의(作意, manaskāra)
작의란 어떤 작용을 하는 심소일까요? 작의란 간단하게 말하면 ‘마음을 처음으로 움직여서 대상에 향하도록 하여 집중하게 하는 심소[마음작용]’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작의를 이렇게 정의한 근거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논서의 내용을 인용하기 때문에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먼저 세친보살의 <유식삼십송>에 대해 호법보살이 주석한 <성유식론>에서는 작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음을 경각警覺시키는 것[警心](주1)을 본성으로 하고, 마음을 대상에 이끄는 것을 작용[業](주2)으로 한다. 이것은 마땅히 일으켜야 할 마음의 종자를 경각시키고 이끌어서 대상으로 가게하기 때문에 작의라고 한다.”(주3)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욱스님도 “마음의 종자를 경각시켜 현행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체성]으로 하며, 마음을 이끌어 현기시켜 대상의 조건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작용으로 한다.”(주4)라고 주석합니다. 두 주석을 요약하자면, 작의란 ‘아뢰야식 내지 전오식에서 잠자고 있는 마음의 종자를 놀라게 하여 깨우는 것’이 본질적인 성질이고, 마음을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여 집중하게 하는 것[心一境性], 즉 동일한 대상에 대해 언제나 반복해서 마음을 고정하게 하는 것이 부수적인 성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친보살은 또 다른 저작인 <대승오온론>(한역본)에서 작의를 “능히 마음을 발오發悟하게 하는 것을 본성으로 한다.”(주5)라고 하였고, 범본에서는 “[작의는 대상에] 마음cetasa을 유도[發悟, ābhoga]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오發悟, 즉 아보가ābhoga’는 (특정한 대상으로) ‘마음을 유도하다[이끌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작의는 대상에 집중하게 하는 마음작용입니다. 그렇지만 감산스님이 <백법논의>에서 작의를 “지금 참선을 하고 화두를 관찰하여[간看] 의식[마음]이 <선으로 흐르게 하여 불선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막고 끊어야 한다[도절堵截].”(주6)라고 주석하고 있듯이, 작의의 역할은 선한 쪽으로 마음을 이끌 것 인가, 아니면 불선[악] 쪽으로 마음을 이끌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작의는 우리의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선이나 수행을 통해 마음을 선한 쪽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닦아 악을 끊는[수선단악修善斷惡]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중)>(p.313)에서 ‘작의[意]’를 “마음이 생기고 생각이 움직이는 시작이다〔生心動念之始〕.”(감산스님 주석)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정의합니다. 그리고 “작의는 최초의 생각이 일어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중생이 알 수 있는 그런 생각이 아닙니다. 자재보살 이상의 보살들도 이것을 무심인 줄 알지 실제로는 모릅니다. 그 정도로 미세하기 때문에 저 깊은 데에서 하는 말입니다.”라고 풀이합니다. 즉 작의는 그 작용이 미세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감산스님의 주석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해설하고 있습니다.
2. 상(想, saṃjñā)
상이란 ‘대상을 분석하여 언어를 부여하는 심소[마음작용]’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상想은 대상을 단지 정리하면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대상에 언어를 부여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상을 이렇게 정의한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먼저 감산스님은 “대상의 바람이 휘몰아쳐도 스스로 대상을 안립하고, 명언[언어]을 시설(주7)하기 때문에 상想이라고 한다.”(주8)라고 주석합니다. 성철스님도 <백일법문(중)>(p.314)에서 “자신의 경계[대상]를 세워서 명언을 시설한다〔安立自境. 施設名言〕.”고 하여 감산스님과 동일하게 상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욱스님(<대승백법명문론직해>)은 “대상에서 상像을 취하는 것을 본질[체성體性]로 삼고, 갖가지의 명언名言을 시설施設하는 것을 작용[업용業用]으로 삼는다.”(주9)라고 주석하여, <성유식론>의 주석과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성유식론>의 주석을 살펴보겠습니다. <성유식론>에서는 “대상에서 상像을 취하는 것을 본성으로 삼고, 갖가지의 명언名言을 시설施設하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주10)라고 주석합니다.
두 주석에서 취상(取像, nimitta-udgrahana)이라는 어려운 말이 나왔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설명을 첨언하고자 합니다. 취상이란 대상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 즉 대상이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작용입니다. 취상取相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이것[대상]은 빨간 것이며, 빨간 것이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대상을 한계 짓는 것을 말합니다. 서양철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분석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때 언어가 개입하는데, ‘갖가지의 명언을 시설한다’는 것은, ‘이것은 자동차다’ 또는 ‘이것은 산타페이지 소나타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대상을 확실하게 언어로 파악하여 인식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상이란 외부로부터 들어온 센스데이터를 분석하여,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구성하는 마음작용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상을 ‘대상을 분석하여 언어를 부여하는 심소’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서양철학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표상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승오온론>(한역)에서는 “경계에 대해 갖가지 상相을 취하는 것이다.”(주11)라고 하였고, 범본에서는 “그것[상]은 [인식]대상의 다양한 특징(相, nimitta)을 파악하는 것이다.”(주12)라고 주석합니다. 그리고 티베트 역에서는 “그것[상]은 [인식]대상의 특징[相, nimitta]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특징에는] 3종류가 있다. 즉 한정적인 것, 광대한 것, 무량한 것이다.”(주13)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티베트 역에서는 범본에 없는 ‘특징[相, nimitta]’에 대해서 ‘그 특징에는 세 종류가 있다. 즉 한정적인 것, 광대한 것, 무량한 것이다’라고 첨언하고 있습니다.
3. 사(思, cetanā)
사란 간단하게 말하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의지를 일으켜 행위를 하게하는 마음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감산스님은 <백법논의>에서 “미세하여 끊지 못하며, 자신의 마음을 몰고 부려서 선‧악을 짓게 하기 때문에 사思라고 한다.”〔微細不斷. 驅役(주14)自心. 令造善‧惡. 故名為思.〕고 주석합니다. 성철스님도 <백일법문(중)>(p.314)에서 감산스님의 “자신의 마음을 부려서 선‧악업을 짓게 한다.”(주15)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사思’를 정의합니다.
그리고 지욱스님(<대승백법명문론직해>)은 “마음을 조작시키는 것을 본질로 삼고, 선‧악‧무기에게로 마음을 부리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주16)라고 하여 <성유식론>의 주석과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성유식론>의 주석을 살펴봅시다. <성유식론>에서는 “마음을 조작造作시키는 것을 본성으로 삼고, 선품善品 등에게로 마음을 부리는 것[마음을 부려서 선한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주17)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위의 주석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사思는 의지적인 마음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의지적인 마음작용은 우리의 마음을 선악 또는 무기[선도 악도 아닌 것]로 물들이는 심리 작용입니다. 선한 의지로 마음을 작용시키면 선업이 생기고, 악한 의지로 마음을 작용시키면 악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思는 자기가 인식한 대상에 대해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작용입니다. 예를 들면 마치 자석[대상]의 움직임에 따라 철[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思는 인간 행위의 근원이 되는 마음작용이라고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 행위[업業]를 신체적 행위[신업身業], 언어적 행위[어업語業], 사고적 행위[의업意業]로 나눕니다. 그리고 사고적 행위를 ‘사업思業’이라고 하고, 사고적 행위로부터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가 생기하였다는 의미에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사이업思已業’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사思가 바로 오변행 심소 중의 사思입니다.
한편 <대승오온론>(한역)에서는 “공덕과 과실 및 두 가지가 아닌 것[공덕과 과실]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의업을 조작하게 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것이다.”(주18)라고 하였고, 범본에서는 “성공guṇa, 실패doṣa,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에 의해anubhayata 마음을 형성citta-abhisaṃkāra하게 하고, 사고思考에 의한 행위manaskrama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역의 경우, ‘의업意業을 조작造作하는 것’이 ‘사思’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업은 신身・구口・의意의 삼업 중의 하나를 말합니다. 즉 좋은 것을 생각하거나 나쁜 것을 의도하는 마음속에서의 활동입니다. 한편 범본에서는 사를 ‘마음을 형성하는 것’과 ‘의업[사고에 의한 행위]’의 둘로 나누어 열거합니다. 전통적인 사思의 해석은 범본의 해석이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아뢰야식뿐만 아니라 모든 마음과 두루 함께 작용하는 5가지 심소[오변행]에 대해 여러 유식 논서에 나타난 내용을 열거하여 정의했습니다. namaste
주)
(주1) 경각[경심]’이란 잠자고 있는 마음[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을 놀라게 하고 깨워서, 깨어난 그 마음을 대상[새소리, 노을]에 향하게 한다는 뜻이다.
(주2) 본성 또는 본질이란 1차적인 성질[본질적인 성질]이며, 업[작용]은 2차적인 성질[부수적인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면 ‘불’의 본성은 ‘뜨거움’이고, 업[작용]은 ‘사물을 태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3) 作意謂能警心為性. 於所緣境引心為業. 謂此警覺應起心種引令趣境故名作意.(T31, 11c7. T는 『대정신수대장경』, 31은 권수, c는 하단. 이하 동일)
(주4) 警覺心種. 令起現行. 以為體性. 引現起心. 趣所緣境. 以為業用.(<대승백법명문론직해>, 속장경 48, 342c5)
(주5) 謂能令心發悟爲性.
(주6) 故今參禪看話頭. 堵截意識不行. 便是不容作意耳.
(주7) 시설[임시적으로 세움]과 안립은 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건립하여 발기發起하는 것을 또한 시설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성유식론술기>, T43, 332a)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8) 境風飄鼓. 安立自境. 施設名言. 故名為想.
(주9) 於境取像. 以為體性. 施設種種名言. 以為業用.
(주10) 想謂於境取像為性. 施設種種名言為業.
(주11) 謂於境界取種種相.
(주12) viṣaya-nimitta-udgrahaṇam/
(주13) tattrividham parīttam mahadghatam apramāṇam ca/
(주14) 몰 구驅, 부릴 역役
(주15) 驅役自心. 令造善惡.
(주16) 令心造作 以為體性. 於善惡無記之事役心. 以為業用.
(주17) 思謂令心造作為性. 於善品等役心為業.
(주18) 謂於功德 過失及俱相違, 令心造作意業爲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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