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론학 강설]
구마라집 문하의 삼론학자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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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2019 년 5 월 [통권 제7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31회 / 댓글0건본문
박상수 | 불교학자 · 번역저술가
구마라집 문하 삼론학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전회에 이어 마저 열거해 본다.
9) 도항道恒 (345~417)
① 도융의 경우에도 그러했지만, 팔준에 들어가기도 하는 도항에 대해서도 종래의 관련 연구서적 중에 거의 언급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마 도융이나 도항에게 이렇다 할 학문적 저술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기에는 이러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② 관직官職을 사양하고 불도佛道를 추구하다.
도항이 9세에 길에서 노는 것을 보고, 은사隱士 장충張忠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어린 아이는 범부를 뛰어넘는 자태가 있어, 세속에 있으면 반드시 국정을 다스리는 공을 세울 것이고, 도道에 처하면 반드시 불법佛法을 빛나게 할 것이라. 내가 늙어 그걸 못 보는 게 한이로다.”(주1)라고 하였다.
도항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후모後母(계모)를 효심으로 섬기다, 나이 20을 지나 후모가 사망하자 예를 다하여 상을 치르고 출가하여, 구마라집이 장안에 오자 찾아가 수학하였다. 그 때 도항의 동학 도표道標도 재능이 있어, 후진後秦의 요흥왕은 도항과 도표가 나라를 운영할 만한 역량이 있는 것을 알고, 법복法服(승복)을 벗고 상서령尙書令(진秦 나라 때에 천자와 신하들간에 문서文書를 주고 받는 일을 담당한 요직으로, 후대의 장관에 해당함)을 맡아 국정에 힘쓰라는 칙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 둘은 불법佛法을 학습할 뿐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다. 다시 왕이 구마라집과 승주僧主(승정僧正)의 직무를 맡은 승략(주2)에게 서간을 보내 그 둘을 깨우치게 하였으나, 은혜를 베풀어 그 둘을 놓아주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후에도 국왕은 자주 서간을 내렸으나, 나라의 온 지경이 도와 가까스로 사면되었다. 이에 도항은 탄복하여 바위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소식蔬食을 하며 인적 없이 살다가,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 72세로 산중의 정사에서 입적하였다.(주3)
③ 『석박론釋駁論』과 『백행잠百行箴』을 저술하였고, 『사리불비담舍利佛毘曇』의 서문을 지었다. 불교를 학습하기 위하여 국가 관리로 중용하려는 국왕의 요구를 사양하고, 구마라집과 출중한 동문들을 떠나 인적 없는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적 저술은 별로였지만, 도항의 행적은 수행자의 본보기로 본받을 만하여 팔준에 거론되었을 것이다.
10) 담영曇影 (4세기 전반~5세기 초반)
① 출신 지역은 자세하지 않다. 성품이 단정하여 세인과 과하게 교유하지 않았고, 가난하여도 학업에 뜻을 두었다. 『정법화경』과 『광찬반야경』을 강연하여, 매번 법륜을 한번 돌릴 적마다 도속道俗 1천명이 모였다고 한다. 나중에 장안에 들어가자 요흥이 크게 예로 맞이하였고, 구마라집이 도착하자 왕의 조칙으로 번역 사업을 보조하였다. 그 때 구마라집은 요흥에게 말하기를, 어제 담영공을 보았는데, 역시 이 나라의 풍류風流에 대한 기대를 드러낼만한 승려라고 감탄하였다. 나중에 산중에 은거하여 티끌세상으로부터 절의를 지키며, 진의 의희 중(405~418) 70세에 입적하였다.
② 처음 『성실론成實論』이 역출되자 문답 쟁론이 오고가며 지리 해지자, 담영이 다섯 차례나 결판하고 구마라집에게 드러내보이자, 구마라집이 자신의 뜻을 깊이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나중에 『묘법연화경』을 역출하였는데 담영이 예전에 전공한 바라, 특별히 깊이 생각하여 『법화의소法華義疏』 4권을 저술하였다. 또한 『중론』의 주석서를 저술하였다(주.4)
③ 이상의 『고승전』에 기록에 의하면 담영은 구마라집 문하 중에 『중론』의 주석서를 지은 것이다. 담영의 『중론』 주석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담영의 학설이 길장의 저서 여러 곳에 단편적으로 인용되고 있어, 후대 삼론학의 교의 수립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또 후대 일본에서 저술된 주석서에도 담영의 학설이 인용되어 있는데,(주5) 이에 의하면 담영은 『중론소中論疏』 2권을 저술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실정에 의거하여, 구마라집 문하 중에 최초의 『중론』 연구자로서 담영의 업적이 불교의 사가史家에 의하여 정당한 평가를 얻지 못하였다는 일부 학자의 견해(주6)는 타당하다고 본다. 여기서 구마라집 문하의 사성 팔준 등의 생애와 저술 업적을 망라하여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중에, 『중론』의 주석서를 지은 것은 오직 담영 뿐이다.
11) 혜예慧叡 (4세기 중반~5세기 중반)
① 승예僧叡와 혜예는 둘 다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북지 장안의 승예와 남지 건강의 혜예는 『고승전』에 다른 인물로 기록돠어 있다. 그러나 그 둘이 동일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논의가 발생하였다. 그 둘의 전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승예는 위군魏郡 장락長樂 출신으로, 18세에 승현僧賢의 제자가 되었으며, (불도징佛圖澄의 제자) 태산太山의 승랑僧朗에게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청강하고, 24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곳곳에서 강설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오자 번역 사업에 참여하여, 『중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좌선삼매경』 등의 서문을 지었다. 평소 안양安養(극락정토)에 태어나길 서 원하여, 임종시 자리에 앉아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며 67세로 입적하였는데, 승예가 입적한 방에서 오색의 향연香煙이 나는 것을 사찰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고 한다.(주7)
혜예慧叡는 기주冀州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경전을 학습하고, 멀리 남천축까지 이르렀으며, 서로 다른 음역音譯 고훈詁訓 수방殊方 이의異義에 잘 통하였다. 나중에 돌아와 여산廬山에서 휴식하고, 구마라집이 장안에 도착하자 (「도생전」의 기록을 보충하면, 도생 · 혜관과 함께) 찾아가 수학하였다. (후진이 멸망하자) 강남으로 건너와 오의사烏衣寺에 거주하며 경전을 강설하였다. 송나라 대장군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이 청하여 스승이 되고 사찰에 들어가 수계受戒하였다. 불교의 도리를 좋아한 사령운謝靈運(385~433)이 혜예에게 경전 중의 글자 및 음과 뜻이 다른 것을 문의하자, 범어와 한어를 열거하여 해설한 『십사음훈서十四音訓敍』를 지었으며, 송의 원가元嘉 중(424~453) 85세로 입적하였다고 한다.(주8)
② 그 이후 송宋나라 지반志磐이 편찬한 『불조통기佛祖通紀』에서 『고승전』의 「혜예전」을 「승예전」으로 기록하였는데, 근대에 와서 몇몇 학자들이 이와 연관하여 시비를 논의하였다. 그 둘의 출신 지역, 입몰년도, 행적, 장안에 간 시기 등이 서로 달라,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발표된 한 논문에 의하여 결국은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제안되었고, 그 이후 대체로 수용되고 있는 편이다.
그 요지를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출생지 장락長樂(하북성河北省 기현冀縣)과 기주冀州는 서로 다른 곳이 아니고, 장안에서 입몰한 67세는 승예가 흉노의 침략을 피해 남지로 건너간 시기로 볼 수 있고, 후진 멸망후 남지 건강으로 가서 기원사祇洹寺 오의사烏衣寺에 거주하여 송宋에서는 혜예로 불렸고, 『십사음훈서十四音訓敍』를 저술하고 음역 고훈 등에 통효한 것은 번역 사업에 참여한 지식에 따른 것이며, 『고승전』에 승예와 도안道安의 사제관계와 혜예의 저술 『유의론喩疑論』이 누락된 것은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의 기사를 보고 빠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주9)
③ 혜예와 승예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나면, 승예의 업적과 위상이 더욱 보강된다. 우선 저술에 있어서도 삼론의 서문과 대품경 소품경의 서문 외에, 『십사음훈서』가 추가되고, 혜예의 저작 『유의론』도 길장의 저술에 인용되어 있다.
삼론학의 강남 전파라는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 이행하였다. 북지의 장안에서 삼론 사론에 조예가 깊은 승예가 직접 남지에서 삼론학을 선양한 것을 계기로, 이후 남지에서 주목할 만한 삼론학자들이 등장하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고, 마침내 섭산의 삼론학파가 부흥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12) 승도僧導와 승숭僧嵩
사성과 팔준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구마라집이 역출한 삼론과 『성실론』을 중점 학습하여 중국의 남지와 북지에서 삼론학과 성실학을 널리 전파한 공적을 이룬 이들이 승도와 승숭이다. 관련 인물이 많아 자세한 전기를 생략하고, 주요 저술과 업적으로 그들의 행적을 요약해 본다.
① 구마라집이 411년 『성실론』 16권을 한역하자, 승도와 함께 구마라집에게 『성실론』 을 수업한 승숭僧嵩은 북지 제주除州(팽성彭城)의 백탑사白塔寺에 거주하며 홍보하였다. 승숭의 제자에 승연僧淵(414~481)이 있고, 승연의 제자에 담도曇度 · 혜기慧記 · 도등道登 · 혜구慧球 · 법도法度(437~500) 등이 있었는데, 이 승숭의 계통을 팽성계 성실학파彭城系成實學派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주10)
또 팽성에서 오래 거주하여, 승숭과 승연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생각되는 혜차慧次(434~490)가 있는데, 삼론과 『성실론』을 잘 하였다. 그 문하에 유명한 양梁의 삼대법사라 불리는 지장智藏 승민僧旻 법운法雲의 세 명이 배출되어 성실학을 흥성하게 하였다.
② 승숭과 함께 『성실론』을 학습한 승도는 먼저 승예에게 사사하고 나중에 구마라집에게 학습하였으며, 남지로 건너가 삼론과 『성실론』을 전파하였다. 의희 12년(416) 요흥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요홍姚泓(재위 416~417)이 즉위한 무렵 흉노의 침략이 발생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의희 13년(417) 장안을 점령한 동진의 대장군 유유에게 후진이 멸망하였다. 이 후 송宋을 건국한 유유가 승도에게 어린 아들 의진義眞의 안위를 부탁하고 건강으로 돌아간 사이 흉노족이 침략하여 살상을 자행하자, 승도는 장안에 남겨진 유유의 아들 의진을 보호하여 수백 명의 제자들과 함께 남지로 건너갔다. 이 일로 감격한 고조가 나중에 수춘壽春에 동산사東山寺를 건립하여, 항상 경론을 강론하여 천 여명이 수업하고, 전란을 피해 온 사문 수백 명에게 의복과 음식을 공급하였다. 승도는 건강의 중흥사中興寺, 이후에는 와관사瓦官寺에서 강연하다가, 수춘으로 돌아와 96세로 입적하였다.(주11)
남지에서 활약한 승도는 『이제론二諦論』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를 지었다. 전자는 삼론학 분야의 저술이고, 후자는 최초의 성실론 주석서이다. 이렇게 송 무제의 아들 의진을 전란에서 보호하여 지켜낸 공적을 통하여, 승도를 남지에 구마라집의 삼론과 성실론을 이식한 최대의 공로자로 간주하는 학자도 있다. 승도의 제자에 담제曇濟 승종僧鐘 도량道亮 등이 있었다. 담제曇濟는 『육가칠종론六家七宗論』을 지어 격의불교의 학설을 6~7종으로 구별하였다.
다보사多寶寺의 도량道亮은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를 지었다. 도량의 제자에 지림智林이 있어 『이제론二諦論』, 『비담잡심기毘曇雜心記』, 『주십이문론 注十二門論』, 『주중론注中論』 등을 저술하였다. 이 승도의 계통을 수춘계壽春系 성실학파成實學派라 부르기도 한다.
13) 소결
구마라집 문하 사성 팔준을 중심으로 그들의 활약과 업적 저술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들은 우선 삼론 사론을 강의하고 서문과 저술을 지어 후대 삼론학이 성립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구마라집이 역출한 『법화경』 『유마경』 『선경禪經』 『성실론』 등의 여러 경전들의 주석서를 대부분 최초로 저술하여 후대에 영향을 끼쳤고, 학습 자세도 후대에 나타나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학풍과는 다르게 삼론 『성실론』 『열반경』 『법화경』 등을 병행하여 학습하였다. 그러한 능력과 열정의 소산으로 삼론학파 성실학파 열반학파의 성립을 보게 되어, 중국불교의 흥기를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동문 사제 간에 축발된 돈오설과 점오설의 주장은 삼론학을 너머 화엄종과 선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남긴 저술과 다른 문헌에 수록된 인용문은 이미 충분히 연구된 것도 있고, 아직도 일부분만 설명된 것도 있다.
주)
(주1) 『고승전』 제6권, 「석도항」.(T50-p364b)
(주2) 승략은 육경六經과 삼장三藏에 통달하고, 계율이 청정하여 불법을 떨칠만하여, 진작에 요흥왕의 존경을 받았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오고 나서 모여든 승니僧尼가 많아지자, 과오를 범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하여 요흥은 승략을 승주僧主에 임명하고, 승천僧遷은 열중悅衆에, 법흠法欽과 혜빈慧斌은 승록僧錄에 취임하였다. 승주의 직위가 곧 승정僧正으로, 이후의 승정의 흥기는 승략에게서 비롯되었다. (『고승전』 제6권, 「승략전」.(T50-p363ab))
(주3) 『고승전』 제6권, 「석도항」.(T50-p364b~365a)
(주4) 『고승전』 제6권, 「석담영」.(T50-p364a)
(주5) 일본 남도南都 삼론종의 안징(安澄, 763~814)이 저술한 『중관론소기中觀論疏記』 (日本大藏經·三論章疏)에도 담영의 학설이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주6) 平井俊榮, 『중국반야사상사연구中國般若思想史硏究』, 東京:春秋社, 1976, p.105.
(주7) 『고승전』 제6권, 「석승예」.(T50-p364ab)
(주8) 『고승전』 제7권, 「석승예」.(T50-p367ab)
(주9) 橫超慧日, 「僧叡と慧叡は同人なり」.(『東方學報』, 東京第十三冊ノ二, 1942년 7월).
(주10) 湯用彤, 『漢魏兩晋南北朝佛敎史』 下冊, 臺北:漢聲出版社, 1938, p.721.
(주11) 『고승전』 제7권, 「석승도」.(T50-p371ab)
박상수朴商洙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용수龍樹의 화엄사상華嚴思想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역임. 동국대에서 『한국불교전서』 제13권과 제14권(『유가사지론기』) 공동 교정 편찬. 고려대장경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돈황불교문헌 공동 연구. 번역서로 『삼론현의三論玄義』와 고려대장경의 한글 번역본 몇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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