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론학 강설]
위대한 역경승 구마라집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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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2019 년 2 월 [통권 제7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337회 / 댓글0건본문
박상수 | 불교학자·번역저술가
서역西域 구자국龜玆國 출신의 위대한 역경승 구마라집(Kumārajīva.344~413 또는 350~409)(주1) 삼장은 중국 후진後秦의 요흥왕姚興王 홍시弘始 3년(401)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홍시 4년(402)부터 12년간 범본梵本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였다. 문헌의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35종류에 걸쳐서 약 300권 이상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키질석굴 앞에 있는 구마라집 동상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론에 의하여 학파의 성격이 짙은 삼론종 성실종 열반종이 성립되고, 정토종과 천태종의 소의경론이 일부 마련되었으며, 대승의 계율과 선수행에 대한 자료도 제공되었다. 그 역문이 능숙하고 빼어남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구라마집역은 빈번하게 연구 독송되어, 해당 분야의 경율론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여기서 삼론학과 연관 지어 구마라집의 업적을 몇 가지로 살펴본다.
구마라집 역경의 첫 번째 업적은 인도불교의 초기 중관학 논서와 반야경전을 역술한 것이다. 그 중 『중론』 『백론』 『십이문론』 및 『대지도론』의 사론을 한역하여 인도 중관학파의 시조 용수(龍樹. Nāgārjuna)의 학설을 최초로 중국에 전하였다. 또한 삼론학의 소의경전에 해당하는 『소품반야경』 『대품반야경』 『금강경』을 역출하였는데, 이들 경전은 그 이전에 다른 역경가들이 이미 한역했지만 구마라집이 다시 번역한 것이다.
1. 삼론학 소의경론 한역
종래의 한역본에 의거하였지만 반야의 공사상이 바르게 전달되지 않은 불교계의 상황을 고려하여 중역한 것이라 한다. 이들 삼론학의 소의경론이라 볼 수 있는 그 역출 연대를 살펴보면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번역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보면,
① 『대지도론』 홍시 4년 여름(402)에 착수하여 홍시 7년 12월(405)에 완료되었다. 원래 이 논서의 문장은 광박했지만 (인도어와 중국어에 따른) 간찰의 번거로운 차이가 있어, 원문의 3분의 1만 역출한 것이 지금의 대지도론 100권이라 한다.(주2) 용수가 저술한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이기 때문에 먼저 번역한 것이라 본다.
② 『대품반야경』 홍시 5년(403). 이 경전의 이역본異譯本으로 축법호竺法護역의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과 무라차無羅叉역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 존재했지만, 그 역문이 명료하지 못해 격의불교를 촉발시킨 까닭에 먼저 새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③ 『소품반야경』 홍시 10년(408). 『대품반야경』이 중역되어 종전의 다른 번역본과 차이가 드러나자, 후진의 태자의 요청으로 이 소품경도 재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 이후 중국불교계에서 『대품반야경』과 『대지도론』에 집중 연구 주석하고, 소품경은 거론되지 않은 현상을 남겼다.
④ 『백론』은 두 번 번역되었다. 먼저 홍시 4년(402)에 1차 번역을 시도하여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으나, 구마라집이 아직 중국의 한어漢語에 능통하지 못했고 그 서문도 조예롭지 못했다고 하는데, 초역본은 전하지 않는다. 이후 홍시 6년(404) 2차로 번역하여 문장이 바르게 되고 승조僧肇가 지은 서문도 좋은 것이 현재 전하는 백론이다.
⑤ 『중론』은 현재 한 가지만 존재하지만, 원래 두 번 번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시 11년(409)에 번역되어 승예가 지은 서문과 함께 전해지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그런데 일부의 연구에 의하면,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담영曇影이 지은 서문이 첨부된 중론의 초역初譯 혹은 시역試譯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주3)
⑥ 『십이문론』은 중론을 요약한 논서의 성격이 짙어, 중론과 함께 홍시 11년(409) 중론과 동시이거나 중론 직후에 번역되었다고 본다.(주4)
이러한 삼론 계통의 경론들이 한역되자 구마라집 문하의 수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삼론이 연구되기 시작했고, 구마라집 이후 여러 왕조들의 정치적인 변란 등을 계기로 제자인 도생道生·승예 등에 의하여 남방南方에 전해졌다. 다소의 세월이 지나 섭산에서 승랑이 삼론학을 부흥시키고, 이후 승랑에게 수업한 승전과 그 제자 법랑을 거쳐, 법랑의 제자 길장에 이르러 삼론학 삼론종이 대성되었다.
2. 격의불교 폐단 시정
구마라집이 장안에 오기 이전에 다른 역경승들에 의하여 『소품반야경』과 『대품반야경』 계통의 반야경들이 이미 한역되었다. 그러자 위진시대에 성행한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친숙한 중국인들은 반야경에서 말하는 반야般若와 공空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반야사상이 바르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라, 노장老莊의 무無·허무虛無 같은 유사한 개념을 사용하여 불교의 반야 공을 이해하는 이른 바 격의불교格義佛敎가 한동안 유행하였다. 그 중심 문제인 공의 의미를 논의한 결과, 승조가 지은 『조론』에는 3가지 설이 소개되어 비판되었으며. 유송劉宋의 담제曇濟는 『육가칠종론六家七宗論』에서 6~7가지 설을 거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론학이 들어오기 전에 크게 활약한 고승 도안道安(312~385)은 이러한 격의불교가 불교를 이해하는 바른 태도가 아님을 알고서 처음으로 비판하였다. 도안의 제자였던 승예가 지은 서문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혜의 바람이 동쪽으로 불어오고 법다운 말씀이 읊어진 이래…비록 함부로 격의를 강설하지만 아득하여 근본에 어긋나니, 6가家는 치우쳐 성공性空의 종지에 상즉하지 않아…이 땅에 먼저 (『대품반야경』의 이역본 같은) 여러 경전들이 역출되었지만, 식신識神의 성공性空에 대해 명료하게 말하는 곳은 적고, 식신(의 상태)에 머무는 글을 설하는 곳은 지나치게 많다. 『중론』과 『백론』의 문장이 이에 이르지 못하고, 또한 끝까지 독파하지 못했으니, 누구와 더불어 이를 바르게 하랴. 이전의 학장께서(저술 강론 같은) 문장을 그만두고 멀리 개탄하며 미륵에게 말씀 드리고자 생각하신 이유가 실로 여기에 있노라.”(주5)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당시의 불교계는 격의불교의 폐단이 극심하여 구마라집이 중국에 와서 반야경을 새로 번역해 주기를 고대했지만, 도안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한탄하며 미륵보살을 생각하며 세상을 하직하였다.
승예가 지은 『중론』의 서문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곧 백 개의 대들보로 지은 저택에 비추어 보면 띠풀로 지붕을 엮은 집이 기울어 비루한 것처럼, 『중론』이 널리 밝은 것을 보게 되면 (당시 불교계의) 편협한 깨침이 더욱 비루해진다(주6)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의거하면, 저서와 서문 등을 지어 격의불교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것은 바로 구마라집 문하의 삼론학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동력원은 바로 구마라집이 장안에 와서 역출한 신역新譯의 반야경전과 새로 선보인 삼론 사론이었다. 여기에서 잘 번역된 불경佛經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위력을 실감할 것이며, 훌륭한 번역에 따른 구마라집의 공적이 또 얼마나 대단했는지 평가해야 할 것이다.
구마라집이 수많은 경론을 번역함으로 말미암아 중국불교의 여러 종파가 직접 간접으로 성립되고 보조 받는 일이 발생하여, 일찍부터 학계에서 그의 번역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구마라집의 번역은 표면적으로 그 달의적達意的인 역어譯語로 유명하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사상이나 학설의 체질개선이라는 성향이 스며들어 있어, 원어原語의 본래 의미를 더듬어보아야 비로소 개량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추적하는 게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몇몇 학자는 실토하였다.
3. 대승경론의 중요성 인식시켜
중국 삼론학의 교학은 인도 중관학파 용수의 중관학을 수용하여 전개한 것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도의 학설과는 다른 면모 독특한 뉘앙스가 풍긴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도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견해를 부분적으로 표출한 학자들이 일부 존재한다. 중론의 역어 중에는 구마라집이 녹여낸 독특한 개념의 용어가 더러 발견된다. 그 중에 하나인 실상實相이란 용어를 찾아본 학자는, 거기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원어는 한 가지가 아니라 많아서 규정하기 곤란하다고 하였다.(주7)
다른 연구자는 중관학설의 차이에 주목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곧 “라집역羅什譯에는 때로 지극히 대단한 의역意譯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 『중론』의 청목석 부분과 『백론』 『십이문론』에는 라집의 독자적 해석이 번역의 형태로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 여기에 삼론교학이 인도 중관파의 공사상과 이질적異質的인 전개를 보이게 된 하나의 커다란 이유가 있다.”(주8)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없어, 논증에 아쉬움이 남는다.
앞의 인용문에서 『중론』의 주석문 등에 번역의 형태로 구마라집 자신의 해석을 섞어 넣었을 가능성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구마라집이 『대지도론』을 원래 분량의 3분의 2를 제거하고 3분의 1만 번역하여 지금의 100권으로 제작하였다는 기록을 고려해 보아도, 일리 있어 보인다.
서역의 구자국에서 출생한 구마라집은 7살에 출가하여 서역의 계빈罽賓과 소륵(疎勒. Kashgar)에서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를 학습하고, 소륵에서 만난 야르칸드yarkand의 왕자 수리야소마Sūryasoma에게 대승교학과 『중론』 『백론』을 수학하였다. 이후 다시 구자국으로 돌아온 뒤 대승교학에 전념하여 명성을 떨쳤다. 구마라집의 전공이 용수 계통의 중관학이라는 그의 전기를 참작하면, 여러 경론의 번역에 구마라집의 중관사상이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역출된 『중론』과 반야경 등이 전파된 결과, 중국불교의 전개에 어떻게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가? 또 다른 학자의 일부 견해는 삼론학설과 결부되어 논의되는 만큼, 여건이 되면 차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중론』이 삼론학의 가장 중심적인 논서 이기에, 이와 관련된 다른 한역漢譯 『중론』 주석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아, 그 비중을 검토해 본다. 삼론학파 학자들은 그 누구도 라집역 외에 다른 『중론』 주석서를 사용하지 않았고, 삼론학파 이외의 다른 학파의 학자들도 다른 『중론』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슨 뜻이냐면, 한문으로 번역된 『중론』 주석서는 구마라집역 외에 세 가지가 더 존재한다. 『순중론順中論』,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이 그것이다.
4. 구마라집역 『중론』의 비중
이 중에 앞의 『순중론』은 유가행파瑜伽行派의 무착(無着. Asaṅga) 논사가 저술한 것으로, 『중론』의 초품初品 일부 게송만 해석한 것이다. 북위北魏의 반야류지般若流支가 543년 이전에 한역하였다.(주9) 길장(549~623) 생존 당시 역출되었으나, 길장이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길장 자신이 중국불교 학승 가운데 최고의 박수광인博收廣引(자료를 많이 모아 폭넓게 인용하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유로 인하여 그 번역서를 입수하지 못하였거나 사용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반야등론석』은 인도의 중기 중관학자 청변(淸辯. Bhāvaviveka. 490~570) 논사의 주석서로서, 당대唐代 바라파밀다라波羅頗蜜多羅가 630년에 한역했다.(주10) 나머지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은 인도 유가행파의 안혜(安慧.Sthiramati) 논사의 주석서로, 송대宋代 유정惟淨과 법호法護가 11세기 초중기 사이에 공역共譯했다.
이 두 주석서는 모두 길장 이후에 역출되어 길장은 열람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연구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둘 다 한역 문장이 난삽하기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삼론학의 대가 길장 이후에 누가 있어 해독하기 난처한 후대의 주석서에 주목했겠는가?
설령 시공을 넘나들어 입수했다 하여도 삼론학설을 수립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저서들 모두 중요한 주석서들이고, 이후 별도로 연구할 필요도 있지만, 길장이 전하는 여러 삼론학설의 대부분은 고삼론古三論과 신삼론新三論 학자들의 학설에 기반 하여 주장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길장 이전에 『중론』을 주석한 70명의 대가들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그들 모두 구마라집역을 텍스트로 삼아 해석한 것들이며, 길장 시대에도 그러했다.
삼론학파 말고도 『중론』을 참고하여 연구한 중국불교 다른 학파의 몇몇 걸출한 학자들도 구마라집 역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면 관계상 생략하지만, 한국의 삼국시대에 저술된 몇 가지 『중론』 주석서도, 수백 년간 유지된 일본 삼론종에서 저술된 많은 주석서의 경우도 사정은 동일하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동양 삼국의 삼론학 및 중관학 연구에 있어 라집역을 대체할 수 있는 주석서는 아마 있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역경가를 넘어 구마라집을 초기 중관학자로 보아도 좋을 정도가 아니겠는가.
주)
(주1) 구마라집의 생몰년대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대부분은 『광홍명집廣弘明集』의 기록에 따라 344~413년을 따르지만, 츠카모토 젠류塚本善隆가 제안한 350~409년을 지지하는 학자도 있다.
(주2) 승우 『출삼장기집』 제10권, 「대지석론서大智釋論序」 제19. “胡夏旣乖, 又有煩簡之異, 三分除二, 得此百卷.” T55-p75b. 이하 이 부분의 출처 생략함.
(주3) 塚本善隆, 「구마라집론鳩摩羅什論(2)」, 『干潟博士古稀記念論文集』 p.357.
(주4) 平井俊榮, 『중국반야사상사연구中國般若思想史硏究』, 東京 春秋社, 1976, p.89.
(주5) 승우, 『출삼장기집』 제8권, 僧叡 「毘摩羅詰提經義疏序」 제14, T55-p59a. “自慧風東扇 法言流詠已來雖曰講肆格義迂而乖本 六家偏而不卽性空之宗. 此土先出諸經 於識神性空明言處少 在神之文其處甚多. 中百二論文未及此 又無通覽誰與正之. 先匠所以輟章遐慨 思決言於彌勒者 良在此也.”
(주6) 『증론』, 「승예서僧叡序」, T30-p1a. “夫百樑之搆興 則鄙茅茨之仄陋 覩斯論之宏曠 則知偏悟之鄙倍”
(주7) Richard H. Robinson, 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 , Motilal Banarsidass, Delhi, 1978, p.252.
(주8) 木村淸孝, 『中國佛敎思想史』 <バーブル總書>, 東京:世界聖典刊行協會, 1979, p.77.
(주9) 박상수역, 『順中論義入大般若波羅蜜經初品法門』,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한글대장경 210. 중관부 2), 동국역경원, 1997. 참조.
(주10) 이현옥역,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한글대장경 210. 중관부 2), 동국역경원, 1997, pp.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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