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
‘힌두교의 윤회’와 ‘불교의 윤회’는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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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1:48 / 조회7,876회 / 댓글0건본문
법수法數 10 / 무아와 윤회 ②
힌두교의 윤회와 불교의 윤회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힌두교의 윤회를 나타낼 때에는 transmigration(이주移住)이나 reincarnation(환생還生)으로 번역한다. 이 말은 윤회의 주체로서의 영혼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를 나타낼 때에는 rebirth(재생再生)로 번역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심상속心相續(citta-santāna) 이론으로 윤회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윤회의 의미
붓다 생존 시 윤회사상은 갠지스 지역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에서도 자이나교의 개조開祖 니간타 나따뿟따Nigaṇṭha Nātaputta,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뿌라나 깟사빠Pūraṇa Kassapa 등은 윤회사상을 알고 있었다. 특히 니간타 나따뿟따는 업과 윤회를 자신의 중심 교의로 삼았다. 붓다도 정각을 이루기 전에 이미 윤회사상을 믿고 있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깨닫기 전,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수행자)이었을 때 나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참으로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하구나.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SN.Ⅱ.10) <증일아함경> 제23권 제1경에는 “이와 같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았다. 저기서 죽어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죽어 저기서 태어난 인연의 처음과 끝을 모두 밝게 알게 되었다.”(T2, 666b)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경전의 근거를 통해 붓다는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이미 윤회사상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윤회설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붓다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선과 악의 업도 없고 그 과보도 없으며,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다.”(T1, 437c)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견해[邪見]라고 가르쳤다. 이처럼 붓다의 모든 교설은 윤회설 위에 건립되어 있다. 만일 불교에서 업과 윤회를 부정하게 되면 붓다의 전체 교리체계가 무너져 버린다. 붓다는 처음부터 윤회를 전제로 자신의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윤회라고 하면 ‘생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 세상에서 죽으면 저 세상에 태어나고, 저 세상에서 죽으면 다시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이것을 윤회라고 한다. 윤회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따라 삼계三界와 육도六道를 돌고 돌면서 생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삼계・육도의 의미
삼계・육도는 중생들이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윤회를 펼치는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삼계・육도는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 그 내용은 동일하다. 불교의 윤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계・육도의 개념부터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삼계・육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윤회를 이해하는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으로 구분한다. 세간은 윤회의 세계를 말하고, 출세간은 윤회를 초탈한 열반의 세계를 말한다. 세간을 삼계三界라고도 한다. 삼계란 욕계欲界(kāmaloka)・색계色界(rūpaloka)・무색계無色界(arūpaloka)이다. 불교에서 세계를 삼계로 분류한 것은 오도五道와 사생四生을 세계에 배치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중생을 태어나는 방식에 따라 네 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즉 사생四生(catasso yoniyo)이 그것이다. 사생이란 태생胎生(jalābujā)・난생卵生(aṇḍajā)・습생濕生(saṃsedajā)・화생化生(opapātikā)이다. 태생이란 사람이나 짐승처럼 모태母胎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난생이란 새처럼 알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습생이란 모기처럼 습지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화생이란 천계天界 또는 지옥처럼 앞의 세 가지 생生 이외에 자연스럽게 화생하는 것을 말한다.(MN.Ⅰ.73)
오도와 사생을 세계에 배치한 삼계는 다음과 같다. 욕계란 욕망이 성행하는 곳으로, 지옥에서부터 천天의 일부까지 포함하며, 사생은 모두 욕계에 속한다. 색계와 무색계란 순전히 천계天界인 동시에 모두 화생化生에 속하며, 둘 다 선정력禪定力이 뛰어난 곳이지만, 색계에는 아직 물질적(신체적) 활동이 남아 있고, 무색계에는 그런 활동이 없기 때문에, 그 명칭을 따로 구분한 것이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삼계는 수메루(Sumeru, 須彌山)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위치하고 있다. 욕계는 수메루의 아랫부분에, 색계는 중간 부분에, 그리고 무색계는 그 정상에 있다.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삼계를 실제로 생물이 살고 있는 세계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삼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실존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그 수행의 정도에 따라 스물여덟 단계로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붓다는 삼계를 실존의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불교의 삼계설은 불교 성립 이전부터 있었던 베다 시대의 천天・공空・지地라는 삼계의 개념을 채용하여 업보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붓다시대에도 삼계를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세계로서 이야기한 것이었다기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세계를 의미한 것이었다. 즉 인간의 정신 상태 중에서, 감관의 욕구가 많은 경우를 욕계라고 하고, 초선初禪에서 제4선까지의 선정의 상태를 색계라고 하고, 더욱 정적한 정신 통일의 상태를 무색계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출세간이라고 하는 성자의 세계가 삼계 밖에 있다고 하는 것도 성자의 정신 상태로서의 깨달음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에 이르러 삼계를 생물이 존재하는 구체적인 세계라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삼계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로 보면, 무색계는 물질이 없는 세계라는 뜻인데, 물질이 없는 정신만의 세계라든가 정신만을 가진 생물이라든가 하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구체적인 존재 현상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 가운데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이 없는 세계는 공간적 연장선을 갖지 않는 세계인데, 공간성을 갖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될 수 없다. 따라서 무색계천과 같은 세계나 생물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다.”(水野弘元, <原始佛敎>, p.81)
흔히 사람이 죽으면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가운데 어느 하나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대부분 아수라阿修羅(asura)가 빠진 ‘다섯 가지 태어날 곳’, 즉 오취五趣(pañcagati)로 나타난다. 부파불교에서는 육도를 삼계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라고 믿었다. 그러나 육도는 삼계와 마찬가지로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 육도 중에서 인간과 축생을 제외하고 모두 신화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붓다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윤회계의 한 현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즉 “변화가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계속되는 것이 바로 무한의 윤회이고, 더욱이 그 변화를 규정해 나가는 경과가 바로 인과라고 말하는 것인 바, 이것이 곧 불교의 진제적眞諦的 견지라는 것이다.”(木村泰賢, <原始佛敎思想論>, p.164)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에 의하면, 불교의 윤회론은 문자 그대로의 윤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윤회설이란 영혼이 공간을 떠돌다가 다양한 신분을 취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에 의하면 변화의 당체가 곧 윤회이고 공간을 떠도는 영혼과 같은 것이 없다. 마치 유충이 변하여 번데기와 나방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생명도 그 당체를 변화한 것이 바로 말[馬]이거나 소[牛]이고 지옥이거나 천당이라는 것이다. 즉 업業 자신이 스스로 이것을 변화시켜 지어 내는 것을 이름하여 윤회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木村泰賢, 위의 책, pp.164-165)
<증일아함경> 제43권 제2경에서 “잘못된 견해의 과보 때문에, 자연히 팔대지옥八大地獄이 생긴다.”(T2, 781a)라고 했다. 즉 주어진 것으로서 지옥이나 천당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업業이 자기의 경계로서 이것을 창조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나가서 말[馬]의 태胎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업이 그 변화의 경과에 있어서 인간을 이루는 오온五蘊 대신 말[馬]을 이루는 오온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붓다의 윤회론이 간직한 진의眞意는 실로 여기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육도도 삼계와 마찬가지로 ‘번뇌 때문에 괴로운 생존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한 생애 동안에도 수없이 육도를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도 수만 번 죽었다 태어난다[一日一夜 萬死萬生].”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사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지옥・축생・아귀・인간・천상으로 윤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윤회한다는 사실보다는 어떻게 하면 윤회에서 벗어난 경지, 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다. 「로히땃사-숫따Rohitassa-sutta」(SN2:26)에서 붓다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SN.Ⅰ.63)라고 했다. 이 대목은 윤회에 대한 붓다의 본회本懷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윤회의 종식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윤회를 강조하는 것은 금생에서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함이다.
이경미 작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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