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
세 가지 배움[三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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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09:42 / 조회5,137회 / 댓글0건본문
세 가지 배움[三學, tisso sikkhā]이란 지계持戒(sīla), 선정禪定(samādhi), 지혜智慧(paññā)를 배운다는 뜻이다. 빨리어 ‘띳소 식카(tisso sikkhā)’는 ‘세 가지 배움’이라는 뜻인데, 중국에서는 ‘삼학三學’이라고 번역했다. 빨리어 ‘식카(sikkha)’는 study(공부, 학습, 배움), training(훈련, 수련), discipline(규율, 계율) 등 세 가지 뜻을 갖고 있다. 또 니까야에서는 간혹 ‘띳소 식카(tisso sikkhā)’라는 용어 대신 ‘따요 칸다(tayo khandhā)’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따요 칸다’는 ‘세 가지 모임[積集]’이라는 뜻인데, 삼온三蘊이라고 번역한다.(MN.Ⅰ.301)
교학적 체계로써 삼학
초기불교에서는 유학有學(sekha, Sk. śaikṣa)과 무학無學(asekha, Sk. aśaikṣa)의 둘로 구분한다. 유학이란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를 말한다. 무학이란 모든 번뇌를 끊어 더 닦을 것이 없는 아라한, 또는 그 경지를 말한다.
아라한은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는 ‘무학’이지만, 나머지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해서 ‘유학’이라고 한다. 『앙굿따라 니까야』(AN3:84)에 따르면, “그러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보다 높은 계를 배워야 하고, 보다 높은 마음을 배워야 하고,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AN.Ⅰ.231, kiñ ca sikkhati? adhisīlam pi sikkhati adhicittam pi sikkhati adhipaññām pi sikkhatī ti)라고 했다. 한역에서는 “보다 높은 계를 배움[增上戒學], 보다 높은 뜻을 배움[增上意學],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增上慧學]”(T2, 210a)을 삼학이라고 했다. 한역의 ‘증상의학增上意學’은 ‘증상심학增上心學 (adhicittasikkhā)’과 같은 뜻이다. 하지만 계戒·정定·혜慧 삼학의 관계에서 보면 이것은 ‘보다 높은 선정을 배움[增上定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원래의 뜻에 더 가깝다.
『잡아함경』 제29권 제817경에서는 삼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어떤 것이 보다 높은 계를 배움[增上戒學]인가? 만일 비구가 계戒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율의律儀와 위의威儀를 갖추어 미세한 죄를 보더라도 곧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고 계를 받아 지녀 배우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 보다 높은 뜻[마음]을 배움[增上意學]인가? 만일 비구가 탐욕과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고, …(내지)… 네 번째 선정까지 완전히 갖추어 머무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增上慧學]인가? 만약 이 비구가 ‘이것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괴로움의 발생[集], 괴로움의 소멸[滅],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사실 그대로 알면, 이것을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이라고 말한다.”(T1, 210ab)
이 경에 대응하는 『앙굿따라 니까야』(AN3:88)에서 설명하는 삼학의 내용도 동일하다.(AN.Ⅰ.235) 이른바 바라제목차의 크고 작은 계를 배우는 것을 계학戒學이라 하고, 초선初禪에서부터 멸진정滅盡定까지의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배우는 것을 심학心學이라 하고, 고·집·멸·도의 사성제四聖諦를 배우는 것을 혜학慧學이라 한다.
그런데 삼학을 교학적인 체계로 설명하기도 한다. 세 가지 배움[三學]은 유학有學(sekha)에 포함된다. 「세카 숫따(Sekha-sutta, 有學經)」(MN53)에 의하면,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까삘라왓투의 사꺄들에게 유학有學의 길(sekha pāṭipada)에 대해 설해 주라고 지시했다. 주석서에서는 보다 높은 계를 배움[增上戒學, adhisīla-sikkhā]을 논하는 것은 모든 『율장律藏(Vinaya-piṭaka)』을 말한 것이고, 보다 높은 마음을 배움[增上心學, adhicitta-sikkhā]을 논하는 것은 모든 경장經藏(Sutta-piṭaka)을 말한 것이며, 보다 높은 지혜를 배움[增上慧學, adhidhamma-sikkhā]을 논하는 것은 모든 논장論藏(abhidhamma-piṭaka)을 말한 것이다. 아난다 존자는 많이 배운 삼장 법사(tipiṭaka-dhara)였기 때문에 삼장을 통해 세 가지 배움[삼학]을 충분히 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MA.Ⅲ.27-28)
또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제1에서 경經·율律·논論 삼장은 의지하는 곳[依處]이 서로 다르다. “만일 증상심增上心에 의지하여 논한 길[論道]이면 소달람素怛纜(sūtra의 음사로 經을 말함)이고, 만일 증상계增上戒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毘奈耶(vinaya의 음사로 律을 말함)며, 만일 증상혜增上慧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阿毘達磨(abhidhamma의 음사로 論을 말함)이다.”(T27, 1b) 대승계경大乘戒經에 속하는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제10에서는 삼학을 육바라밀과 비교했는데, 보시·지계·인욕·정진의 네 가지 바라밀[四波羅蜜]을 계학에, 선정바라밀을 의학意學에, 반야바라밀을 혜학慧學에 배대시키고 있다. 이상은 세 가지 배움[삼학]을 교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삼학은 수행의 체계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수행을 통해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학은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을 의미한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삼학은 세발솥[三鼎足]과 같아서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똑바로 서지 못한다. 대승불교도 마찬가지다. 만일 삼학의 수행체계 외에 별도의 수행방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설佛說이 아니라 외도外道의 마설魔說에 불과하다. 붓다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삼학을 순서대로 수행하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설했다. 반대로 삼학을 순서대로 닦지 않으면 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계정혜 삼학의 관계
「Mahāparinibbāna-sutta, (大般涅槃經)」(DN16)에서 붓다는 계·정·혜 삼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했다. “이러한 계·정·혜가 있다. 지계의 실천을 통해 선정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선정의 실천을 통해 지혜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지혜의 실천을 통해 마음은 번뇌(āsava), 즉 욕루欲漏(kammāsavā), 유루有漏(bhavāsavā), 견루見漏(diṭṭhāsavā), 무명루無明漏(avijjā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DN.Ⅱ.81) 욕루欲漏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이고, 유루有漏는 존재에 기인한 번뇌이며, 견루見漏는 사견邪見에 기인한 번뇌이고, 무명루無明漏는 어리석음에 기인한 번뇌이다.
이 경에 대응하는 『장아함경』 제2권 제2경 「유행경遊行經」에서도 같은 취지의 내용이 설해져 있다. “계를 닦아 선정을 얻으면 큰 과보果報를 얻고, 선정을 닦아 지혜를 얻으면 큰 과보를 얻는다. 지혜를 닦아 마음이 깨끗해지면 등해탈等解脫을 얻어 삼루三漏인 욕루·유루·무명루가 없어지게 된다. 해탈을 얻고 나면 해탈의 지혜[解脫智]가 생긴다. 나고 죽음이 다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기에 다시는 다음의 생生을 받지 않는다.”(『장아함경』 제2권 제2경 「遊行經」(T1, p.12a). 위에서 언급한 니까야에서는 욕루·유루·견루·무명루의 사루四漏를 나열하고 있다. 반면 아가마에서는 욕루·유루·무명루의 삼루三漏를 나열하고 있다. 견루와 무명루는 그릇된 견해[邪見]나 어리석음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초기경전에서는 지계와 지혜의 관계 또는 선정과 지혜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Soṇadaṇḍa-sutta(種德經)」(DN4)에서는 “지계를 통해서 청정하게 되는 것이 지혜이고, 지혜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것이 지계이다. 지계가 있는 곳에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지계가 있다. 지계를 갖춘 자에게 지혜가 있고, 지혜를 갖춘 자에게 지계가 있다. 그러므로 지계와 지혜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것이다. 마치 손으로 손을 씻고 발로 발을 씻는 것과 같이 지계를 통해서 청정하게 되는 것이 지혜이고, 지혜에 의해 청정하게 되는 것이 지계이다.”(DN.Ⅰ.124; 『장아함경』 제15권 제22경 「種德經」(T1, p.96b).
이 경에 대응하는 『장아함경』 제15권 제22경 「종덕경種德經」에서는 “계가 있으면 곧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으면 곧 계가 있다. 계는 능히 지혜를 깨끗하게 하고, 지혜는 능히 계를 깨끗하게 한다. (종덕이여!) 그것은 마치 사람이 손을 씻을 때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를 필요로 하여 왼손이 오른손을 깨끗하게 해주고, 오른손이 왼손을 깨끗하게 해주는 것과 같다.”(『장아함경』 제15권 제22경 「種德經」(T1, p.96b). 위 내용은 소나단다 바라문과 붓다가 서로 대화하면서 동의한 부분이다. 이것은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지계·지혜의 관계와 불교에서 말하는 지계·지혜의 관계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지계 없이는 지혜가 있을 수 없고, 지혜 없이는 지계가 있을 수 없다. 즉 지계와 지혜는 어느 것이 먼저라고 순서를 가릴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선정과 지혜의 관계에 대해서는 『Dhammapada(法句經)』 제372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혜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사람은 열반에 가까이 간다.”(Dhp. 372)
한편 계·정·혜 삼학 가운데 어느 것을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수행관修行觀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는 지계보다는 지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도덕적 기초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 규범은 보다 높은 정신적 성취를 위한 불가피한 기반으로 간주되고 있다. 사실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도덕적으로 청정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정신을 통일·집중시킬 수 없다. 마음이 산란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지혜도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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