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이중슬릿 간섭 실험의 무아無我와 참여하는 관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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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09:42 / 조회4,801회 / 댓글0건본문
빛은 우리 곁에 늘 같이 있지만, 빛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물리학에서는 그렇다. 빛은 광학이라는 이름으로 물리학의 한 분야를 이뤄왔다. 빛을 다루는 물리학의 발전은 양자광학을 낳았다. 빛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 그만큼 많다.
빛을 보는 관점의 변화
이 글에서는 빛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나타나는 양자의 이중성과 상보성, 무아無我, 참여하는 관측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이 여러 색으로 분리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 분광이라고 한다. 어떤 파장의 빛이라도 진공에서는 모두 속도가 같다. 그러나 진공이 아닌 경우에는, 파장에 따라 빛의 속도와 굴절률이 달라진다. 빛의 색깔이 파장에 따라 결정되므로, 서로 다른 색깔의 빛은 굴절하는 정도가 다르다. 그러므로 여러 색의 빛이 뭉쳐 있는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두 번 굴절하면 여러 색깔의 빛으로 갈라진다(그림 1).

뉴턴은 빛이 같은 매질 안에서는 직진하지만 다른 매질로 들어가거나 나오면서 굴절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직진과 굴절의 기하학적 현상은 빛을 입자라고 생각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동은 퍼져나가기는 하지만 직진하거나 굴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뉴턴은 빛이 지극히 작은 입자의 형태로 광원에서 방출된다고 생각했다.
영Young의 이중간섭 실험과 빛의 파동성
뉴턴을 따라 빛이 입자의 형태로 전파된다는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빛이 입자라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쌓여 가면서 여러 과학자가 빛의 파동 이론을 제시했다. 영(Thomas Young, 1773~1829)이 수행한 이중슬릿 간섭(double slit interference) 실험은 빛이 파동의 형태로 진행한다는 것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
이중슬릿 간섭 실험은 하나의 광원에서 빛이 방출되면서 시작된다. 이 빛이 두 틈새(slit)를 통과하고, 두 틈새를 통과한 빛이 서로 간섭한다는 것이 이중슬릿 간섭이다. 간섭이란 (그림 2)에서 보는 것처럼 두 파장이 더해지는 것이다. 두 슬릿에서 나온 빛을 어느 지점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 명암은 (그림 3)과 같이 두 슬릿과 관찰 지점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입자인 당구공은 서로 충돌하면 두 공의 진행 방향이 바뀐다. 이와 달리 파동은 서로 겹치는 영역에서는 두 파동이 더해지지만, 이 영역을 지나면 각자의 방향으로 계속 진행한다. 레이저광선은 서로 만나더라도 그 영역을 지나면 각자의 방향으로 진행한다. 여러 음파가 섞여도 한 음파가 다른 음파의 진행을 방해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여러 음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 이처럼 겹쳐지게 되면 서로 더해지는 간섭은 파동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중슬릿을 통과한 빛이 간섭한다는 것은 빛이 파동임을 말해 준다.
양자역학과 빛의 이중성
영의 이중간섭 실험 이후 1900년에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양자가설을 제시했을 때까지도 물리학자들은 빛을 파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의심할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플랑크가 양자가설로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를 설명하고 아인슈타인이 양자가설로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를 설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빛을 입자라고 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물리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왜 그런가?

어떤 상황에서는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더라도 이중간섭 실험을 하면 빛은 언제나 파동처럼 행동한다. 빛이 사실은 입자인데 과거에 파동이라고 잘못 이해했던 게 아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곤란한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인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과학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듯이 과거 이론의 오류를 바로잡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빛이 파동이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빛이 입자라는 것이 아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빛이 파동처럼 행동하는 현상만을 알았고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는 현상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플랑크가 양자가설을 세우면서 양자역학이 시작됐다.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는 아주 특별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이 나왔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빛이 언제나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처럼 빛을 포함하여 양자는 상황에 따라 달리 행동한다. 이를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duality)이라고 한다.
무아無我: 파동이나 입자라는 개념의 틀을 내려놓으면 된다
빛은 이중간섭 장치에서는 파동으로 행동하고 흑체복사에서는 입자로 행동한다. 고전물리학이나 일상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언제나 세계를 실체적으로 보려는 완강한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다. 실체적 세계관에서 보면 입자는 언제나 입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파동은 언제나 파동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런 세계관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빛이 이중성을 보이는데 그러면 빛은 도대체 무엇인가? 입자인가 아니면 파동인가?”라고 묻게 된다.
빛이 파동이기 때문에 이중간섭 실험에서 파동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빛이 입자이기 때문에 광전효과에서 입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essence)이 드러나는 것이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현상을 이데아idea가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세계관은 빛을 파동이라고 할 수도 없고 입자라고 할 수도 없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붕괴된다. 그럼 빛은 무엇인가?
이중간섭 실험에서 파동처럼 행동한다 하더라도, 광전효과에서는 입자처럼 행동하므로 빛을 파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광전효과에서 입자처럼 행동한다 하더라도 이중간섭 실험에서 파동으로 행동하므로 빛을 입자라고 할 수도 없다(그림 4).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리학자에게 이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리만큼 어렵지만, 불교에서는 오히려 아주 간단하다.
입자나 파동이라는 개념의 틀에서 떠나면 된다. 우리가 만들어 낸 개념의 틀을 무리하게 자연에 적용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내려놓음이다. 물론 쉽지 않다. 이는 존재자 이전에 설정된 이데아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무아無我다.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이중간섭 실험의 이중성과 상보성(complementarity)
양자가설에 의하면 빛은 양자다. 광자(photon)라는 알갱이다. 이제 빛의 세기를 아주 약하게 줄여서 이중간섭 실험을 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1초에 광자 하나를 방출하는 정도로 지극히 약한 빛을 보낸다고 하자.
슬릿 두 개를 모두 열어 놓으면 하나의 광자만이 슬릿을 지나가더라도 간섭무늬가 생긴다. 하나의 광자지만 두 파동이 더해지는 것처럼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이는 실험적 사실이다. 이 경우엔 두 슬릿이 모두 열려 있으므로 광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를 모른다. 이처럼 광자의 경로를 모르면 간섭무늬가 생긴다(그림 5).

이와 달리 슬릿 하나를 닫고 하나만 열어 놓으면 간섭무늬가 생기지 않는다. 광자는 열어 놓은 슬릿을 통과했을 것이므로 광자가 어느 슬릿을 통과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광자의 경로에 대한 정보를 알면 간섭무늬가 생기지 않는다. 이 역시 실험적 사실이다.
이 두 실험적 사실을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과 관련시켜 정리해 보자. 슬릿 하나만 열어 놓아 경로 정보를 알게 되면 입자성이 드러나면서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슬릿 둘을 모두 열어 놓아 경로 정보를 알 수 없게 되면 파동성이 드러나면서 간섭무늬가 생긴다. 경로 정보를 알면 입자처럼 행동하면서 간섭무늬가 사라지고, 경로 정보를 모르면 파동처럼 행동하면서 간섭무늬가 생긴다. 경로 정보가 나타나면 간섭무늬가 숨고, 경로 정보가 숨으면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이 둘을 모두 얻을 수는 없다. 보어(Niels Bohr, 1885~1962)는 이 둘의 관계를 상보적(complementary)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객관 자체가 아니라, 주관이 참여하면서 드러난 객관이다
광전효과가 나타나는 상황을 만나면 무아無我의 빛이 입자가 되고, 이중간섭 실험 장치를 만나면 무아의 빛이 파동이 된다. 이런 변신은 빛이 무아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무아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즉 어떤 연기緣起의 맥락이 성립하느냐에 따라 파동이 되기도 하고 입자가 되기도 한다.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지만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연기緣起하는 공空이다. 물방울이 하늘로 올라가면 구름이 되고 땅으로 내려오면 강물이 된다.
이중간섭 장치에서는 두 슬릿을 모두 열어 놓았을 때에만 빛이 파동처럼 행동한다. 같은 장치를 사용하더라도 슬릿 하나를 닫는다는 아주 작은 변화만 주면 파동처럼 행동하던 빛이 입자처럼 행동을 바꾼다. 내가 관측 장치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빛은 파동이 되기도 하고 입자가 되기도 한다.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가 관찰자의 개입으로 결정된다. 양자역학의 관측 결과는 객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주관이 관여한 객관의 모습이다. 주관이 참여하면서 그 참여하는 방식에 따라 객관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주관이 참여하면서 대상이 드러난다는 것이 양자역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세계의 모습이 사실은 다 그렇다. 나에게 나타나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나에게 드러나는 세계다. 바닷물은 짠 것도 아니고 짜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 바닷물이 나에게는 짜고 돌고래에게는 짜지 않다. 이처럼 어떤 주관이 참여하느냐에 따라 객관의 모습이 달라진다. 보다 보편적으로 말하면 어떤 연기적 설정이 이뤄지느냐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달라진다. 파동을 만나려면 이중간섭 실험을 해야 하고, 입자를 만나려면 광전효과를 보면 된다. 북도봉을 보려면 의정부에 가야 하고, 남도봉을 보고 싶으면 백운대에 오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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