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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심리학의 만남]
불교심리학의 방법론적 토대로서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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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11:50  /   조회2,40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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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는 연기와 인간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존재론, 인식론, 진리론의 이면에 연기와 세계와 인간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마지막에 있는 진리론에서 방법론이 도출된다. 불교의 진리론에서는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한다. 불교심리학의 관점에서 팔정도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호의 목표이다. 

 

방법론으로서 팔정도

 

모든 방법론은 항상 목표를 가진다. 방법이라는 용어 자체는 불완전 명사처럼 사용된다. 목표와 짝을 지어 사용될 때 그 완전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방법론 자체로는 완전한 기능을 할 수 없고, 목표와 연관해서 사용될 때만 그 기능을 할 수 있다. 팔정도의 목표는 멸성제이다. 만약 이러한 목표가 바뀌면 그에 따라서 방법론도 바뀔 수 있다. 괴로움의 제거를 위해서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 멸성제라고 한다면, 초기불교에서 번뇌의 소멸을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팔정도이다.

 

만약 붓다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붓다가 되기 이전에 보살이 행한 수행, 즉 육바라밀이 그 방법론이 될 것이다. 이처럼 불교 안에서도 그 목표를 정확하게 무엇으로 잡는가에 따라서 그 방법론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동일한 불교라고 할지라도 그 목표들 간의 미세한 차이는 그에 따른 방법론의 차이를 불러온다.

 

팔정도 가운데 정견正見은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다룬 존재, 인식, 진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견見은 관점으로, 철학과 종교를 동시에 일컫는 용어이다. 올바른 견해, 올바른 철학을 세우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 된다. 견해는 한편으로 가장 사적인 영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사적인 영역이 가장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다. 어떤 관점을 가지는지는 나머지 일곱 가지 방법론의 토대가 된다. 이것이 제대로 잡혀야 나머지 방법이 그 위에 건립될 수 있게 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잡히고 나면, 어떻게 생각을 전개해야 하는지가 보이게 된다. 나머지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관점이 잡히고 나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등이 보이게 된다. 만약 이러한 견해를 잘못 정립하게 되면, 나머지 방법론도 잘못된 방식으로 전개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견해를 정립하는 것이 순서상 가장 먼저 오게 되고, 이를 토대로 나머지 칠정도의 방향성이 정립된다.

 

견해가 정립되면, 사고와 의도의 방향성이 정해지게 된다. 모든 사고를 할 때 탐욕이 없는 방식으로, 악의가 없는 방식으로, 남을 해꼬지할 의도가 없는 방식으로 사고를 하라는 것이다. 무아, 연기의 견해가 정립되면, 이러한 사고방식과 의도가 정립된다. 무아이고 연기이기 때문에 탐욕이 없고 악의가 없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의도를 낸다는 것이다. 정사유正思惟는 정견을 사유와 의도의 영역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견해가 벼리의 역할을 한다면 각론의 첫 번째가 사유이고, 두 번째부터는 순서대로 어업명語業命이 된다. 정견에 기초한 정어, 정업, 정명이 된다.

 

정어正語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십업十業으로 확장될 때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망어, 양설, 악구, 기어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말이 된다. 속이는 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 쓸모없는 말을 하지 않고 사실에 부합하는 말을 하고, 화합하는 말을 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고, 쓸모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호흡이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듯이, 말 또한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지점이 된다. 말은 입이라는 발성기관을 통해서 소리로 나오지만 견해를 담고 있다. 말은 몸과 마음의 협업 하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말은 실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은 항상 모든 존재를 고정화시키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실재를 표현하지 못한다. 말은 실재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개구즉착開口卽錯,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같은 용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말은 진동을 만들어 내고, 심상을 만들어 내고, 행동을 만들어 낸다. 말이 실재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대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한다. 

 

즉 말은 데이터를 축적하는 획기적인 장치이다. 말을 통해서 기억의 형태로 데이터가 축적되어 문명이 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된 데이터가 실재를 반영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의 파괴의 가능성 자체도 내포하고 있다. 말은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실재를 표현하지 못하지만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하고, 문명을 만들어 내지만 파괴의 가능성도 동시에 지닌다. 이렇게 언어는 모순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특징을 정확하게 알면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어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정업正業은 오계 가운데 망어妄語를 제외한 네 가지를 차지한다. 계를 지키는 것은 모두 어語·업業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업이라는 용어 자체만 보면 가장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생각에서 행동까지 모든 것이 업이다. 오온에서 행行으로부터 수受·상想이 분리되듯이 팔정도에서 업으로부터 사유·어·업·명이 분리된다. 정업은 팔정도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정업은 모든 행위 하나하나를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업을 바르게 하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 지금부터 짓는 업을 바르게 하고, 이미 지은 업은 정업화正業化하는 것이다. 정업화는 지금 정업을 행함으로 인해서 과거의 업을 가볍게 받는 것이다. 이러한 정업화를 통해서 지금까지 지은 업과 앞으로 지을 업을 모두 바르게 할 수 있다.

 

정명正命은 단순히 직업을 넘어서 사회적 생활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견·사유·어·업이 개인적인 차원이었다면, 명命은 사회적 관계를 말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직업이 형성되므로 사회적 관계의 차원으로 방법론이 확장된다. 명에서는 남을 해치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을 첫 번째로 꼽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타인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연기와 무아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어·업·명까지를 살펴보면, 이들은 모두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유·어·업·명으로 나아가면서 범위가 확대된다. 사유가 개인적인 생각과 의도라면, 다음은 이것을 말로 표현한 것이고, 그 다음은 행위로 드러난 것이고, 명에서는 사회적 관계로 확장된다. 이는 다른 차원에서 보면 가장 미세한 것에서부터 거친 것까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유·어·업·명은 견해가 바탕이 된 이후 이를 실천하는 과정이다.

 

사유·어·업·명을 삼학의 차원에서 보면 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계는 단순히 혜를 계발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기보다는 혜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계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계는 토대의 차원이라기보다 혜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발현되는 삼업三業 또는 십업十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정도를 순서대로 보면 두 곳에서 불연속을 볼 수 있다. 견에서 사유로 넘어갈 때와 명에서 정진으로 넘어갈 때이다. 견해와 사유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견해는 전체적인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사유는 어·업·명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것에 해당한다. 생각·말·행동·관계라는 대상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정진이 나온다. 정진精進은 좋은 것을 더 키우는 방향, 나쁜 것을 더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사유·어·업·명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않고, 이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염정念定으로 나아간다.

 

정정진은 염과 정의 토대가 된다. 부지런한 노력과 인내를 통해서 염과 정을 계발하는 것이다. 염은 몸과 마음, 세부적으로는 신수심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키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올바른 견해가 생길 수 있도록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견해는 정정正定을 통해서 더욱 계발된다. 정은 집중으로, 사선四禪을 계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사선四禪을 계발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붓다는 그의 스승을 떠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사선을 통해서 붓다는 결국 그의 견해, 즉 철학을 바꾸게 되고, 기존의 철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철학을 제시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로 인해서 붓다는 마라를 포함한 신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육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트만이 있는 한 인간은 브라흐만의 파트너 정도만이 될 수 있고, 브라흐만의 세계를 넘어설 수 없다. 이러한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인해서 붓다는 브라흐만 역시 실체적 존재에 휘둘리는 하나의 유정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넘어서게 된다.

 

붓다는 올바른 알아차림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집중을 정정正定이라고 한다. 집중을 함으로 인해서 알아차림은 더욱 계발된다. 정진과 정 모두 알아차림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알아차림은 결국 올바른 견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팔정도는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견해를 중심으로 견해가 발현되는 사유·어·업·명이 있고, 견해를 계발하는 정진·념·정의 과정이 있다. 견해를 가운데 두고, 견해를 계발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정진·념·정을 견해 앞에 두고, 견해의 결과는 사유·어·업·명으로 표현된다. 정진·념·정 → 견 → 사유·어·업·명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견해를 중심으로 견해 이전은 견해를 발현시키기 위한 방법이고, 견해 이후는 견해의 발현으로 본 것이다. 삼학의 용어로 보면 정定·혜慧·계戒의 순서가 된다. 

 

사진. 팔정도의 상징인 조캉사원의 법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유·어·업·명은 견해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계는 견해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계를 지키는 것은 단순한 토대가 아니라 견해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결국 계에서 견해가 제대로 되었는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나오는 명命, 즉 사회적 관계, 인간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견해가 드러나는 가장 광범위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방식, 언어습관, 행동양식에서도 견해가 드러나지만 그러한 견해의 궁극적인 발현은 명命에서 드러난다. 타인을 유익하게 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것이 견해의 궁극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치료적 함의

 

이러한 결론은 또한 심리치료적 함축을 가진다. 사성제가 코끼리 발자국처럼 모든 진리를 포함하듯이, 삼십칠조도품은 팔정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조도품에는 없지만 팔정도에만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계에 해당하는 방법론이 팔정도에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계는 팔정도를 가장 포괄적인 방법론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계는 그 사람의 견해가 얼마나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견해가 확립되어 있는 상태와 아직 미확립인 상태를 불교는 성인과 범부로 구분한다. 견해가 확립되어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것이 성인의 첫 단계인 예류과의 징표인 것이다. 그러기에 팔정도의 첫 번째로 정견이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정견을 중심으로 정견이 내재된 사유에서 관계까지의 행렬이 있고, 정견을 계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정진에서 정까지의 행렬이 있다. 견해를 계발하는 차원과 견해가 발현되는 차원이 있다. 팔정도는 견을 중심으로 하는 이 두 가지 행렬을 방법론으로, 멸이라는 목표를 성취하도록 한다.

 

사유·어·업·명은 단순히 지켜야 할 계를 넘어서 서구의 심리치료적 요소를 포괄한다. 정사유에서는 올바른 사유방식과 연관된 인지치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또한 무탐, 무진, 무해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정서치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어는 언어, 대화와 연관된 언어치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업은 전형적인 행동치료라고 할 수 있고, 명은 관계치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사유·어·업·명에 서구의 심리치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면, 정진·념·정은 불교 고유의 심리치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노력의 계발, 알아차림의 계발, 집중의 계발은 불교 고유의 심리치료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는 서구 심리치료의 불교적 가능근거와 불교 심리치료의 독자적 가능근거를 동시에 보여준다. 또한 팔정도는 서구의 심리치료적 요소와 불교의 심리치료적 요소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방법론의 저수지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를 제외한 삼십칠조도품의 모든 방법론의 물줄기는 팔정도라는 저수지로 흘러들어 온다. 이후의 모든 방법론은 팔정도에서 흘러나가게 된다. 견해를 중심으로 서구 심리치료와 불교 심리치료가 만나고 있는 곳이 팔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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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ㆍ석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석ㆍ박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불교상담학전공 지도교수. 한국불교상담학회 부회장, 슈퍼바이저. 한국불교학회 부회장. 저역서로 『불교심리학연구』, 『불교의 언어관』, 『불교심리학사전』 등이 있다.
heecho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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