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부처님 법대로 살고자 했던 봉암사 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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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최동순)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0:36 / 조회1,841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18 | 묘엄스님 ③
▶ 봉암사 결사와 관련된 기억을 말씀해 주시죠.
봉암사 결사에서 제일 첫 단계가 ‘부처님 당시처럼 살자’였지요. 그렇게 하려면 부처님은 목발우를 쓰지 말라 했다. 그 동기는 목련존자가 하루는 어디를 다녀오는데 어떤 범지(바라문)가 장대에 전단향 목발우를 매달아 놓고는 “누가 신통을 부려 저걸 따서 내려오는 사람에게 그 발우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때도 전단목 값이 아주 비쌌답니다. 목련존자가 우쭐한 기분에 신통으로 공중에 올라 발우를 따 가지고 내려왔어요. 목련존자가 기원정사를 향해 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따라와요. 문 앞이 시끌시끌하니까 부처님께서 “왜 문 앞이 시끄러우냐?” 하고 물으시니 어느 한 비구가 부처님께 그 경위를 말씀드렸어요.
목발우와 비단가사를 불태우다
부처님이 대중을 다 모아놓고 목련존자에게만 꾸중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를 해서 저지레(잘못)를 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계율을 제정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목련존자를 보고 “신통이란 남에게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곤궁할 때 도와주는 것이다.” 하고, 그 발우를 손으로 싹 비벼 가루로 만든 다음 대중들에게 요만큼씩 줬다고 그래요. 그리고 앞으로 나의 제자는 목발우를 쓰지 말고 철발우나 옹기발우 두 가지만 쓰라고 그랬거든요. 거기에는 장식을 못하거든요. 지금 우리도 좋은 거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처럼 그때도 그랬겠지요.
그래서 목발우를 싹 다 불태워버렸습니다. 봉암사 지증국사 비석 뒤에 큰 대밭이 있었어요. 그 대를 쪄서 봉암사 큰방 앞에 마당에다가 놓고 또 왕겨를 갖다 가세(가장자리) 놓고 대를 위에다 얹습니다. 왕겨에 불을 붙이면 대가 활활 타는 게 아니고 뭉긋하게 타서 그 연기가 올라오거든요. 그래 하얀 양은 양재기(그릇)를 크고 작게 네 개를 그 연기 위에다가 엎어 놓습니다. 그러면 연기가 올라와서 찐득하게 묻거든요. 그거를 연훈煙熏이라 그럽니다. 그 꺼멓게 해 가지고 뜨끈뜨끈할 때에 들기름을 바릅니다.
뜨거운데 들기름이 들어가니까 금방 익어서 반들반들해지는데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이 쓰던 솥뚜껑이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철발우를 썼습니다. 철발우에 뜨거운 국을 받으면 들고 먹기가 어려워요. 이때는 발우 닦는 수건을 받쳐서 들고 먹으니까 불편한 점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와기瓦器를 가지고 한번 해보자 해서 독 굽는 집에 부탁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철발우와 와발우 사용이 봉암사에서 시작됐어요. 그렇게 부처님 당시를 본받았어요.
그때 봉암사에서는 하루 종일 장삼을 입고 있었습니다. 화장실 갈 때만 문밖에 대못을 치고 거기에 걸어 놓습니다. 소제(청소)할 때에도 장삼 소매를 걷어서 뒤에다 짊어지고 또 이렇게 모으고 끈으로 묶고 마루 걸레질, 방 걸레질을 했습니다. 장삼을 수하고 마당 쓸고 청소할 때 가사가 거추장스러우니까 오조가사 앞에 낙자 이렇게 해서 조그맣게 해서 그걸 입었어요.
큰스님네는 그때 고승장삼을 입었어요. 우리는 여기에 모를 여덟 개 이쪽에 네 개 이쪽에 네 개를 달고, 띠를 하나 하고, 소매는 별로 안 크고 이런 장삼이었어요. 대처한 분들 즉 사판승이 입는 것처럼 입었어요. 그런데 청담 큰스님하고 성철 큰스님하고 두 분은 고승장삼을 입었지요.
우리는 그 장삼이 보조국사가 입던 것이라 큰스님들만 입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광목공장에 가서 수십 필을 사왔습니다. 큰절에서 불사를 한다고 하면 여여처사라고 묘희스님 아버지가 그 비용을 다 댔습니다. 부처님 당시는 목가사와 면가사를 입었지요. 그래서 대승사에서 비단 가사를 모두 태웠습니다.
비단가사를 대체하기 위해 가사불사를 하는데 신도들이 모두 왔어요. 트럭에다가 천을 싣고 와서 대승사 선방에서 가사불사를 했습니다. 가사 색깔로 광목에 물들일 때 도반 중에 비구니 청안靑眼 노스님이 계셨는데 수덕사 스님이었어요. 그 분에게 광목에 물을 들이라 했는데, 힘이 드니까 밤에 살짝 몰래 윤필암으로 가져왔어요. 물감 세 가지를 청홍녹 이렇게 배접을 하면은 가사 색깔이 나옵니다.
청안스님이 윤필암에서 물들인 다음 머슴을 시켜 대승사에 갖다드리라 그랬습니다. 내가 따라갔는데 중간에서 딱 성철스님하고 마주쳤어요. 성철스님이 “이게 뭐냐. 가사감이지?” 하고 물었어요. 내가 엉겁결에 “예!” 그랬습니다. 그날로 고만 성철스님이 걸망 짊어지고 달아나셨어요. 그래 비구니가 손댄 가사를 입지 않겠다는 겁니다. 스님이 점촌 묘희스님 집에 들어앉으셨어요. 어디로 가실지 모릅니다. 묘희스님 부친 여여처사가 “큰절(대승사)에 가사감 가지고 가서 새로 하겠다.” 하셨어요. 그래서 손질한 걸 전부 물에 다시 담가서(웃음) 헹궈서 손질했습니다. 비구니 발때, 손때 묻은 거 안 입으신답니다. 큰절에서 그렇게 괴팍시러웠어요.
▶ 스님들이 직접 회색물을 들이고 바느질을 했군요?
그랬지요. 광목은 지붕에다 말립니다. 누런 광목이 바래서 하얗게 된 뒤에 회색물을 들여 손질합니다. 우리 모두가 신도들 집에 트럭으로 한 열 개를 구해서 봉암사에 가지고 와서 바느질을 했습니다. 내가 그때 배워서 가사도 할 줄 알고, 장삼도 할 줄 알고, 바느질 잘합니다. 그렇게 옷도 하고, 큰스님네도 와서 “이렇게 해라.” 하고 가르쳐주면 다하고 그랬습니다.
자기 옷은 자신이 해 입을 줄 알아야 된다고 큰스님네가 말씀하셨어요. 또 삼베를 가지고 고의적삼을 만드는 걸 내 눈으로 봤거든요. 대승사 선방에서 이불 홑청도 빨고 이불을 씻는 것도 봤습니다. 그때는 큰스님네가 젊은 시절이니까 손수 다 했어요. 같이 마당도 쓸고 그랬지요.
누구나 하루에 나무 두 짐씩 하는 보청법
그때 내가 윤필암에 있었는데 봉암사로 오라고 통지가 왔어요. 스님네가 봉암사에 오셨기 때문이지요. 봉암사에는 백련암이라는 암자가 있습니다. 한 30분 올라가는 거리인데, 그 백련암을 비워놨으니 와서 청소하라고 합니다. 그때 대승사 살면서 알고 있던 비구니들 여섯 명을 데려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갔는데 백련암을 치우고 거기에서 살았어요.
밥만 먹으면 나는 큰절(봉암사)에 내려갔습니다. 큰절에 내려가서 성철스님한테 법문 듣고 또 「이산혜연선사발원문」을 배우고 그랬습니다. 내가 그것만 배우고 있으니까 성이 안 차서 날마다 배울 것이 없느냐고, 가르쳐 달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큰스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글을 가르친다고 앉았으면 선객禪客 팔다리 다 부러지는 거다. 그러니까 안 가르친다.” 그러시더라구요.
“선객이 어찌 강사처럼 글을 가르치느냐?” 그런 뜻인가 봐요. 그렇게 해서 나는 “아우, 선객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건가 보다.” 그리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스님은 “발원문을 읽어 보라.”고 그래요. 나는 한문 발음은 할 수 있지만 한글로 새길 수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그걸 새겨서 한 번만 딱 들려주고는 또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더듬어 가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큰절 봉암사에서 하루에 나무 두 짐씩 했습니다. 우리도 암자에 올라가서 나무하고 식량은 큰절에서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비구니 여섯 명이 살았는데 식량은 대줘서 먹고 또 가을이 되면 점촌이나 문경 나가서 탁발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큰절에만 얻어먹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미안해서 여섯 명이 교대로 두 명씩 나가서 쌀 탁발도 했지요. 가을에 방아 찧고 할 때는 모두 나가서 운력을 했어요. 그때가 참 평화로웠어요. 그런 게 부끄럽다거나 “이렇게 고생하면서 뭘 하겠나?” 하는 생각도 안 했고요. 그냥 내 일상생활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고 살아서 그런지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무 지고 내려오다가 내가 미끄러져서 넘어졌는데 나뭇짐이 앞으로 다 넘어왔어요. 그래도 안 다쳤거든요. 옆에 비구 스님들이 “아고, 안 다친 게 다행”이라고 나무는 새로 짊어지면 된다고 하면서 지게를 들어 올려 주더라고요. 비구니 여섯 명이 함께 살도록 한 것은 나를 가르치기 위해 부른 겁니다. 봉암사 백련암 살림살이는 그들이 살고 나는 큰절(봉암사)에 다니면서 배우고 그랬거든요.
중국은 간시궐, 우리나라는 요목
그때 봉암사의 생활이 중국 총림도 닮고 영산회상의 부처님 당시도 닮았다고 봐요. 변소 가는데 못을 치고 장삼 걸어 놓지요. 그때는 지금처럼 호화롭게 휴지로 뒤를 닦고 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 꽃밭에 물주는 조로朝露 있잖아요, 그 조로처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요. 조그만 물통이고, 거기에 꼭지를 달아서 들고 뒤를 씻어주는데, 구멍이 송송 뚫려 있고 뾰쪽 나온 데는 구멍이 있는데 거기를 누르면 물이 안 나오고, 놓으면 물이 솟아 나옵니다. 이것으로 화장실에서 뒷물을 합니다. 이걸 양철로 만들어서 전부 이름을 써 놓고 화장실 입구에 걸어 놓습니다.
거기 떠 놓은 물로 화장실 들어가서 씻고 달아 놓은 수건에 닦고 나왔어요. 그렇게 하는 장치는 중국식을 딴 거지요. 뒤를 닦는 것을 요목이라 합니다. 산에 도토리 나무 있지요? 그 큰 이파리 있잖아요. 그걸 화장실 한쪽에다 이만큼 재 놓습니다. 그게 바짝 마르면 바스라져서 구멍 뚫리니까 뒤를 닦을 때 가끔 물을 뿌려야 돼요. 그러면 이파리가 촉촉해지지요. 그것을 요목이라고 그랬어요. 글자는 뭔지 모르고요. 중국에 가보니까 요목이라는 것이 이거다 해서 보니까 나무를 납작하게 깎아서 뒤를 이렇게 닦아요. 작은 막대기지요. 그리고 물로 씻어서 도로 꼽아 놓고요. 자기 것을 꼽아 놓는 데가 있는데, 그것을 요목이라 하더라고요.
▶요목은 똥막대기를 뜻하는 간시궐과 어떻게 다를까요?
옛날에는 화장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산에서 도토리나무 가지를 꺾고 또 잎사귀를 뜯어 말려 놓고 쓰지요. 화장실을 정낭淨囊이라고 그럽니다. ‘주머니를 깨끗이 한다’고 해서 조촐할 정淨 자, 주머니 낭囊 자입니다. 그런 의미로 절에서는 변소를 정낭이라고 했습니다. 해우소解憂所라고도 하는데, 정낭은 또 ‘대장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정낭이라 했습니다. 나중에 점촌의 어떤 신도가 마분지 종이로 하면 어떻겠느냐 해서 많이 사다 줬는데 그것을 썰어서 통에 넣고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봉암사에서 화장실 대변은 요목이라는 도토리 나무 이파리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마분지를 사용했지요.
간시궐乾屎橛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온 말인데, 중국 화장실에 가보니까 요만한 통에다가 대나무 같은 걸 손가락 넓이로 깎아서 꼽아 놨더라고요. 그걸 하나씩 내서 뒤를 훑어서 닦고 나서 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른 똥막대기’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버리면 다시 쓸 수 없어요.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것을 간시궐이라고 그런답니다. 중국에서는 휴지를 간시궐이라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요목이라 하고요.
요목은 봉암사뿐만 아니라 산중 절에서 대부분 썼을 겁니다. 옛날 김룡사에 불나기 전 그 간시궐 통이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사용은 못 했던 모양입니다. 간시궐은 선문답하면서 “부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운문스님이 “닦고 내버리는 똥막대기다!”라고 대답했지요. 그것은 선사들이 말씀하시는 격외格外거든요.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범위 밖의 도리를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막대기통을 보기는 했습니다. 지금 이런 시대가 올 줄 알았더라면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놓고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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