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전쟁통에서도 수행은 계속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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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최동순) / 2024 년 6 월 [통권 제134호] / / 작성일24-06-05 10:32 / 조회1,182회 / 댓글0건본문
묘엄스님 ⑥
▶일제 말기에 한글 사용을 못하게 했는데 어떻게 배우셨나요?
일본의 백은선사白隠禪師(1685〜1768)가 수좌들을 위해 운동법을 가르쳤어요. 가부좌로 정진하면 육체적으로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24가지 동작을 성철스님이 직접 윤필암에 오셔서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따라했습니다. 모두가 무조건 성철스님을 따르기로 해 놓고, 어디가 아프니 하면서 그런다고 그만 안 오셨어요. 그래서 종이쪽지를 펴놓고 우리들끼리 계속해서 운동을 했습니다. 24가지였는데, 내가 윤필암에서 받아 적어 놨는데 그것이 없어졌어요. 지금도 없다고 합니다. 나보고 그걸 기억하라고 하는데, 그 운동법 몇 가지, 한 10가지쯤은 알겠는데 다른 것은 모르겠어요.
염불문 외우며 한글 익히다
제게 한글을 가르쳐주신 비구니 스님은 현재 90세 가까이 됩니다. 아주 환자가 되어서 돌아가시지는 않았는데 나한테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글을 내가 ‘가갸거겨’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그 스님이 염불을 가르쳐주면 그걸 가지고 외워서 한글을 배웠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한글 철자법이 갓 해방이 되어 나오지 않았는데, 성철스님께서 서울 가시더니 한글 철자법 책을 사 가지고 오셨더라고요. 서울에서 팔더라고 하시면서.
▶ 당시 큰스님들이 총림을 세우자고 하셨는데 한국불교사에 어떤 의미일까요?
총림叢林을 설립하자는 것은 큰 사찰을 맡아서 좀 넉넉하게 살면서 수행에 도움이 되게끔 하자는 뜻에서 스님네가 모여서 해인사나 어디 한 군데를 정한다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총림이 뭔지도 모르지요. 글자도 무슨 자, 무슨 자 쓰는 줄도 모르고 나가다가 앉아서 듣기도 하고 스님들이 “나가라.” 그러시면 나가기도 하고, 이래서 오다가다 막말로 표현하면 그냥 들은 풍월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듣고 내가 의심됐던 일을 “스님, 아까 그런 말씀 하셨는데, 저도 알아야 안 되겠습니까? 스님네들 연세가 높아서 다 돌아가시고 나면 나도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안 되겠습니까?”고. 그러면은 “별난 아이 다보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대충 설명을 해 주셨는데, 당신네들이 보기에 내가 못 알아듣는 것도 있고요. 총림 생활을 우리가 지금 생활이라 하는 것은 직접 하면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것이 생활화가 되는 것인데, 우리가 윤필암에서 사는 비구니들 생활하고 큰스님네가 사시는 것하고 영 달랐어요.
불조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일 뿐
성철 큰스님께서 대승사(윤필암)에서 ‘무조건’을 주장하셨습니다. 스님이 “무조건 나를 따르라.” 하는 것은 대장 노릇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내가 가르치면, 그것은 불조佛祖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천사항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께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말씀을 전달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철스님을 ‘철스님’이라고 불렀어요. 윤필암 대중이 30명 정도였는데, 성철스님은 “무엇이든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주겠다.”는 우리의 다짐을 받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불조의 말씀과 사상을 주입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지 않으면 안 가르치겠다. 시작을 안 한다.”는 그런 조건부로 시작하시거든요. 그래서 모두 다 따랐습니다. 청담스님, 자운스님 전부 다 큰스님네가 뭔가 우리보다 달라서 무조건 배워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때 윤필암 비구니나 다른 암자에서 홀로 정진하는 분들도 윤필암에서 법문이 있다고 그러면 다 와서 듣고 그랬습니다. 성철스님은 극성극패의 성질을 가지셨어요. “안 하면 안 하고, 하면 참 죽기살기로 한다.” 하시는데, 오히려 극성스러운 사람들을 잘 가르칩니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비구니는 윤필암 스님들입니다만, 그 전이나 후에도 비구니 스님들이 오고 가고 왕래를 잘했습니다. 수덕사 만공스님께 배우는 견성암 비구니들이 윤필암으로 오고, 방한암스님께 배우던 오대산 지장암의 비구니들도 오고 가고 했습니다.
인홍스님은 6.25가 나니까 거기서 그들을 데리고 남방으로 내려오셔서 윤필암에 오셨는데, 해방되기 전에도 왕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걸망을 북태산같이 짊어지고 걸어서 다녔거든요. 평창 진부면에서 오대산까지 걸어서 들어갔답니다. 거기가 20리나 30리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대승사는 점촌이라는 데서 내려서 윤필암으로 오려면 60리를 걸어야 됩니다.
견성암에서 오신 덕수스님, 종현스님도 보았구요, 묘경 그러면은 사람들이 ‘경스님’ 이래 불렀어요. 법희 노스님은 ‘비구니의 도인’이라 그럽니다. 참선을 잘해서 만공 노스님의 비구니 제자로서 공부를 가장 잘한다고 했습니다. 또 만성스님도 그랬습니다. 그 일타스님 누님인 응민스님도 정진 잘하는 스님이라고 다들 알고 있습니다.
교학과 수행을 겸한 봉암사의 가풍
그 당시 봉암사 결사에서 큰스님들의 법문을 날이면 날마다 들을 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입지라고 할까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하게 섰습니다. 그래서 힘차게 수행생활을 계속 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학문적으로 많이 발달되었지만, 실천이 없이 그런 말만 잘하는 경향이 만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우리가 선禪과 교敎를 겸해서 배웠거든요. 그래서 교의 이런 말이 선의 이 말과 같다는 점, 이 둘이 병행을 할 수 있도록 그런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경전을 보고 자기 혼자서 이해하기도 하고, 교수님들의 해설을 듣고 또 “아, 그렇구나.”하고 몰랐던 것이 이론적으로만 알게 되기도 합니다.
내가 볼 때는 이론적으로는 아는데 실천면에 대해서는 힘이 없어요. 그래서 실천이 없어서 ‘불교가 바로 이런 것인데’ 하는 본래의 의미 즉 진국의 맛을 몰라요. 참선은 안 하고 교학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볼 때는 옛날의 큰스님들은 탁하고 울타리를 쳐서 모두를 한군데 모아서 지도하고 가르치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생각들을 보고 들어서 안 것을 다시 표현시키거든요. 쭈욱 다 대중이 둘러앉아서 표현을 시키고 그러니까 오히려 불교사상이 꼿꼿하게 섰어요. 자립정신이 강화가 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리적으로만 하니까 옛날처럼 힘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제 나름대로 요즘 분들을 좀 낮춰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하고 요즘 스님들이 한 단체로 모여서 참선하고 거기에서 자기 소리가 나와야 됩니다. 경전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경전에 나오지 않는 자기 소리가 곁들여져야 힘 있는 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점이 현대에는 좀 부족하다 싶습니다.
▶ 성철스님이나 청담스님이 떠나실 때 결사체를 다시 조직하자는 기약은 없었습니까?
나는 봉암사 백련암에서 대중생활을 하다가 다시 대승사 윤필암에 돌아왔어요. 그분들이 먼저 봉암사를 떠나셨는데 저는 그 사정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6·25가 터졌어요. 윤필암 누각에서 내려다보면 점촌에서 전쟁하는 게 보입니다. 또 산에서 밤에 내려다보면 총알이, 빨간 불이 이쪽으로 쭉 가고, 또 저쪽으로 주르륵 가고, 총알 날아가는 게 다 보입니다.
그때 빨치산들이 절에 올라와서 젊은 비구니들 다 데려간다는 소문이 났어요. 우리는 낮에 다락방에 올라갑니다. 장독을 놓아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마룻장 천장을 뚫고 이불을 올려다 놓고 자리 깔아 놓고 오르내리며 생활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젊은이들 여남은 됐는데 천장에 올라가고 노인들만 밑에서 생활합니다.
바깥에 사람들이 오면 우리더러 숨으라고 그러고, 당신네들이 나가서 맞이합니다. 사람들이 가끔 오거든요. 점촌 쪽과 대구까지 모두 점령이 되고 해놓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김철 씨라는 대처승 주지가 있었어요. 자기 딸도 잡혀갈까 봐 윤필암에 데려와서 우리하고 같이 처나방(다락방)에서 몇 달간 숨어서 살았습니다.
가을이 됐는데 생전 모르는 비구스님이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나를 찾았답니다. 우리 스님이 “여기 그런 스님 없다.”고 그랬더니 그 비구스님이 깜짝 놀라더랍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지금 내가 왜 왔느냐 하면, 성철스님하고 청담스님이 문수암에 계셨는데 전쟁이 나서 성철스님은 안정사로 가시고, 청담스님은 문수암에 계시는데, 묘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몰라서 큰 걱정을 하고 계시는데 어디를 갔느냐?”고 그래요. 우리 스님이 “진짜 스님이냐?”고 확인을 한 다음 나를 내려오라 하더라고요.
남으로 가는 피난민, 북으로 가는 빨치산
나는 그 스님을 모르지만 자기는 나를 알아보고, “지금 큰스님네 두 분이 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왜 여기에 들어앉았느냐고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해요. 그러나 우리 스님이 나를 혼자 남쪽으로 내려보낼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안 된다.”고 그러면서 그 비구스님한테 “어디로 가느냐?” 하니까, 자기는 오대산으로 간다고 해요. 그 비구스님에게 부탁하기를 청담스님에게 가서 묘엄이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이제 남쪽으로 안 내려가고 죽으나 사나 오대산에 가서 살 거다.” 그래요. 그 스님의 이름도 성도 모릅니다. 그 비구스님은 떠나고 그러니까 맘이 있으니까 우리 스님이 안 되겠거든요. 그러면 우리 사형 묘전스님이라고 있습니다. “묘전이 하고 둘이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그래요.
둘이서 8월 추석을 쇠고 떡이 좀 있어서 떡을 싸 가지고 걸망에 짊어지고 옷도 좀 짊어지고 윤필암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김룡사 들어가는 갈림길에 빨치산 부대가 수백 명이 줄을 지어서 걸어오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조그만 애도 있고, 나이 많은 50대도 있고, 그런 군인들이 총을 짊어지고 오는데 열댓 살 먹은 아이도 있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침 일찍인데 밥을 못 먹은 것 같아서 내가 우리 사형님보고 “이 떡 내서 저 사람들 주자고, 이 빨갱이들 주자.”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사형님이 잘 생각했다고 떡 싼 거를 내어주니까 서로 막 뺏어가면서 너무 맛있게, 순식간에 다 먹어 버리더라고요. 제법 많이 쌌는데 다 먹고는 어떤 군인 하나는 우리 보고 “저게 뭐냐?”고 그래요. 이북에 살고, 중국에 사는 사람들이니까 스님이란 거 모르잖아요. 그래서 우리 보고 “저게 뭐냐?” 그랬지요. 그 가운데서 누가 “중”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또 우리를 붙잡아 갈라 싶어서 가만히 서 있으니까 그 행렬이 다 지나서 문경새재 쪽을 넘어 이북으로 가는 거예요. 1·4후퇴 이후의 일입니다.
그 군대가 이북으로 가는 걸 보고 우리는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데 경찰차를 타고 왔어요. 경찰이 대구까지 오는 전투경찰이 있는데, “우리가 대구까지 가는데 좀 태워 달라.” 그랬더니 군인차라서 안 된다고 그래요.
우리 사형님 마을에서 살 때 시동생이 대구에 경찰 국장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그 경찰국장이 내 아는 동생이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그러냐고 그래서 군인들 차를 태워 주더라고요. 그 트럭 지엠시(GMC) 큰 트럭 있지요? 그거를 태워 줘서 대구까지 왔습니다. 대구에 왔는데 한참 전투가 있을 때 거든요. 대구까지 와서 우리 사형님이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까 “너는 혼자 진주로 가라. 그래서 진주로 가서 다시 고성에 가면 되지 않나, 누굴 데리고.”
그래서 내려가니까 내가 안정사로 갔어요. 안정사에 계시는 줄 알고요. 안정사로 가서 “묘엄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아우, 네가 살아있냐?” 그러시더라고요. 들어가서 저녁밥을 먹고 나니까 “문수암에서 느그 스님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줄 아나? 이천왕씨들아.” 그러면서 가라 해요.
그때는 문수암에 전화도 전기도 없었거든요. 해가 다 졌는데. 문수암까지는 꽤 멀었거든요. 그래도 걸어가야 했지요. 그때는 난리 중이라서 버스도 없었어요. 그래서 못 가겠다고 하니까, 저 동네 가서 할매를 하나 데리고 가라고 그래요. 그래서 문수암에 올라간 시간이 새벽 1시인가 그래요. 할매는 동네에서 떼 놓고 혼자 문수암에 올라갔어요. 가니까 청담스님이 놀래시더라고요. 그래서 “살아있었구나!”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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