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승려 수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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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0:40 / 조회1,680회 / 댓글0건본문
오늘날 우리나라 인구는 5천만 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출가한 승려 수는 대략 2만 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5년에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발표할 때 ‘2천 만 동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무렵 승려 수는 대략 7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승려 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백성의 1/3이 승려였던 고려시대
우리나라 역사에서 불교가 국가적 신앙으로 정착되어 국왕으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교를 신앙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승가의 운영을 위해 별도의 국가 기관으로서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였으며, 그 운영을 위한 관승官僧을 뽑기 위해 승과僧科시험을 통해 각 종파의 승려들을 선발하였고, 또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을 전국 사찰의 주지에 임명하였다.
승려들에게는 평상시 백성의 의무라고 할 수 있는 군역과 납세의 의무가 면제되었으며, 부분적으로 결혼도 허용되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출가하여 승려 되려는 자가 너무 많아 국가에서는 아들이 4명이 되어야만 그중에 1명을 출가시킬 수 있도록 하는 출가 제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승려 수와 관련하여 중국의 『송사宋史』 「고려전高麗傳」에 “남녀 210만 명으로 병사, 백성, 승려가 각각 3분의 1씩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천민을 제외한 백성 210만 명 가운데 1/3이라면 대략 70만 명 정도가 승려라는 이야기다. 『고려사절요』 범례에도 “반승飯僧한 수가 10만 명에 이르러 거금을 허비한 경우는 반드시 기록하였다.”라고 하여, 승려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학을 숭상한 조선에서는 승려의 수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태조로부터 성종 대까지 기록에서 승려 수에 대한 언급이 확인되고, 그 이후는 승려 수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다가 18세기 영조 대에 다시 나타난다. 아마도 연산군 대부터 사실상 국가의 불교 기구와 승과가 폐지되고 도첩度牒을 발급한 승려에게만 군역을 면제해 주는 혜택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승려 수에 대한 국가적 논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우선 『태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대사헌 박경 등이 상서하기를, “… 나라의 출가자는 원래 정한 수가 없고 백성 중에 승려가 10분의 3은 되는데, 그 가운데 부역할 수 있는 자가 3분의 2는 될 것입니다.” - 『태조실록』 4년, 1395년 2월 19일.
박경 등이 백성의 3/10이 승려라고 한 말은 앞에서 언급한 『송사』의 기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때는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다소 과장은 있었겠지만 현실 그대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당시 천민을 제외한 인구를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략 300만 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90만 명 정도가 승려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때 승려라는 신분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다를 수 있다. 『고려사』에 결혼한 승려를 의미하는 ‘유처승有妻僧’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조선왕조실록』에 대처승對妻僧(혹은 帶妻僧)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오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당시 유학자들이 말한 ‘승僧’이란 결혼하지 않은 비구·비구니를 비롯하여 결혼한 재가 신자인 우바새·우바이를 포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첩을 통한 환속 정책
조선의 권력자들은 결혼한 재가 신자인 우바새·우바이를 승가僧伽의 범주에서 분리시켜 군역과 납세의 의무를 지우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펼친다. 오늘날 학계에서 ‘억불’ 혹은 ‘배불’이라 부르는 이러한 정책은 태종 대부터 본격화된다. 태종은 사찰 노비의 대부분을 국가에 귀속시켰으며, 국가가 인정하는 종파를 11개에서 7개로 통합하고, 재정 지원 사찰 수를 242개 사찰로 대폭 축소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7개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재편하고 선종 18개 사찰 1,850명과 교종 18개 사찰 1,800명, 즉 36개 사찰 3,650명의 승려에 대해서만 국가에서 경제적으로 지원을 하고, 그 외 사찰은 자체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 외의 사찰에 소속된 승려라고 하더라도 도첩을 받은 승려들은 군역이나 납세를 면제받았다. 다만 도첩을 지급할 때 결혼한 승려를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을 더 이상 승가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면역승의 수가 줄어들지 않았던 것 같다.
임금이 도승지 이계전 등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 어리석은 백성들이 (선왕께서) 부처를 좋아하셨다고 제멋대로 여겨서, 삭발하여 승려 되려는 자가 거의 천백에 이르니, 금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제부터 기한을 엄하게 정하여, 기한 안에 보고하고 출가하는 자에게는 정전丁錢을 받고서 도첩을 주고, 기한 안에 보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삭발하는 자는 법에 따라 단속하라.” - 『문종실록』 1년, 1451년 4월 15일.
국가에서 출가를 단속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군역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출가하려는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출가자가 많아질수록 일반 백성의 군역에 대한 부담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었다. 면역승을 줄이고자 하는 국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출가자의 수는 그리 줄어들지 않았다.
도승지 현석규가 말하기를, “무릇 백성으로 군졸들은 옷과 양식을 준비하느라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 처자도 보육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승도는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며 처를 두고 자식을 키우며 어떠한 국역도 없이 제멋대로 합니다. 그래서 세금에서 도망하고 역을 피하려는 자는 모두 그리로 돌아갑니다. 병사의 수가 날로 줄어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정해년에는 호패법을 행하여 담당 관리가 백성의 군정軍丁을 단속하였는데 그때 승려 된 자들이 모두 14만 3천 명이었으며, 깊은 산에 숨어서 찾지 못한 자가 또한 그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 10년이고 그 사이에 승려 된 자가 또 50~60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이 때문에 병사의 수가 늘지를 않습니다. 지금 산사山寺마다 거주하는 승려가 적어도 10여 명을 밑돌지 아니합니다.” - 『성종실록』 7년, 1476년 6월 5일.
성종 대까지 대처승을 가려내어 군역을 부과하도록 하는 정책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던 것 같다. 여전히 군역과 납세를 면제받는 승려 가운데는 대처승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해년(1467)에 있었던 호구조사에서 14만 3천 명의 승려가 확인되었는데, 10년이 지난 1476년의 보고에서는 산사마다 10여 명의 승려가 있고, 그래서 전국적으로 승려 수가 50~6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숫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장된 수치라고 무시해야 할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장령 구치곤이 아뢰기를, “… 지난 정해년 호패를 줄 때 승도가 30여만 명이었습니다. 이로 보아 지금은 거의 40여만 명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많음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구치곤이 말하기를, “금천현으로 말하자면 정병이 불과 5, 6명이나 사사寺社는 한두 곳이 아니고, 절마다 승도가 10여 명을 밑돌지 않습니다. 그래서 40여만 명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성종실록』 10년, 1479년 11월 29일.
구치곤의 보고에서는 정해년(1467) 호패를 줄 때 승려 수를 30여 만 명이라고 하였고, 1479년에 40여 만 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앞에서 언급한 현석규의 보고와 비교해 보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승려 수를 40만 명 이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정극인이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린다.
정극인이 대궐에 나아와 상서하기를, “… 선교양종에 소속된 사사寺社를 헤아려 보면, 전라도가 2천, 경상도가 3천, 충청도가 1천 5백, 강원도와 황해도가 합하여 1천, 영안도와 평안도가 합하여 1천, 경기·경산이 1천이니, 대개 1만을 밑돌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려 수는 10만 5, 6천을 밑돌지 않습니다. … 원컨대 도첩이 없는 자를 크게 색출하여 모두 환속시켜서 군액에 충당하소서.” - 『성종실록』 11년, 1480년 10월 26일.
정극인은 전국의 사찰 수가 1만 여 곳이고 승려 수가 10만 5천 명 정도라고 하였다. 이는 정해년의 호구조사에서 승려 수가 14만 3천 명이라고 했던 수보다 줄어들기는 했지만 매우 신빙성이 있는 숫자라고 여겨진다. 이 숫자는 태조 대에 백성의 1/3이 승려라고 했던 것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는데, 지속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승려에게만 도첩을 발급했던 효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한 승역으로 줄어든 승려
이러한 승려 수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의승군 수가 4~5천 명이었을 것으로 추산되므로 16세기 후반 승려 수는 아무리 적게 추산해도 4~5만 명을 밑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송시열(1607~1689)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승도들이 신역身役을 피하고 놀면서 백성의 양식을 축내어 국가의 해가 되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몇 해 전 어떤 선비가 총섭摠攝인 각성에게 승려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대략 17만 명이라고 했다 합니다. - 『송자대전』 권13.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했으며 병자호란 때 3천 여 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임금을 구출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임금의 항복 소식을 듣고 진군을 멈추었던 벽암각성(1575~1660)이 당시 승려 수는 17만 명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전보다 승려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닌가? 이는 『영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부호군 이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역을 가볍게 하려고 삭발하여 승려가 됩니다. 영남의 경우 큰 사찰이 3백 여 곳이며 절마다 각기 승려가 4, 5백 명이 됩니다.” - 『영조실록』 13년, 1737년 9월 11일.
이목의 상소대로 영남의 300개 사찰에 승려 400명을 합해 보면, 영남 사찰에만 승려 수가 12만 명에 이른다. 이는 과장된 수치이겠지만, 도리어 송시열의 상소에 등장하는 17만 명의 승려 수가 그리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승려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20세기 초에는 2천만 명의 인구에 승려 수가 7천 명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일까? 이 역시 『영조실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승역僧役이 평민들보다 많기 때문에, (균역법을 시행하여) 감필減疋한 이후로부터는 승려 되는 자가 적다고 합니다.” - 『영조실록』 27년, 1751년 11월 26일.
1751년(영조 27) 9월에 15~59세의 양인으로서 군대에 가지 않은 보인保人에게 1인당 연간 무명 2필에서 1필로 줄여주는 균역법을 공포하였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승역에 비해 양역良役이 더 가벼워졌다. 이로써 양인들은 더 이상 삭발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승려 수의 추이를 정리하자면, 초기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백성의 1/3 정도가 승려였는데, 국가에서 결혼한 대처승에게 도첩을 지급하지 않고 환속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승려 수가 점차 줄어들어 임진왜란 이전까지 대략 1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다시 늘어나서 17세기 후반 약 17만 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18세기 중반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다시 승려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인구는 2천만 명으로 늘어났으나 승려 수는 7천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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